복음이 복음 되게 하는 능력
어느 부자 동네의 초등학교 한 반 학생 중에 명품 외제 운동화를 신지 않은 아이가 두 명밖에 없었다는 보도 자료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도 명품의 바람이 꽤 심상치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소위 말하는 짝퉁이 활개를 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라는 말이 있다. 물건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현상을 말한다. 기업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판매 전략을 짠다고 한다. 소위 명품이란 것이 품질이 좋기도 하겠지만 베블렌 효과를 마음껏 이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살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갖고 비싼 물건을 구입한다고 할 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일정 한도에서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과시용 물건 구매와 사용은 돈이 쓰임에 관계없이 정신적,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내적으로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이를 외적인 것으로 만족하려는 마음의 상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들이 사회에 자리잡게 되면 사회는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과거 영국의 헨리 4세 때 백성들이 너무 사치를 하니까 왕이 검소하게 살자고 담화를 발표했지만 듣지를 않자 담화문 밑에 한 줄을 더 집어넣었다. "단, 창녀와 사기꾼은 예외입니다"라는 구절이었다. 이 글이 적혀지자 얼마 후부터 이런 사치 풍조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있다.
절제는 인격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만큼 절제하려는 정신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자세일 것이다.
절제라는 단어는 무언가 잘 나가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잘 나가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장난감 자동차에는 브레이크가 필요 없지 않는가?
어쩌면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사람, 또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절제의 미덕은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교단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 수 억 원의 돈을 써야 한다면 오히려 돈을 안 쓰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특히 개인적으로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온 돈일텐데…. 그렇다면 뭔가 심각한 부정적 요인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절제 못하는 데 따르는 제 2의, 제 3의 문제들은 우리의 양심까지도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17년 한반도에 불어온 성령의 바람은 한반도의 여러 가지 가치를 변화시켜 놓았다. 그 중에 하나로, 1923년 5월 '세계 기독교 여자 절제회'에서 파송된 틴링 선교사를 중심으로 '조선 기독교 여자 절제회'를 만들어 절제운동을 강력히 전개했다. 그 때 나온 것이 금주 금연 운동, 공창폐지 운동, 마약퇴치 운동이었고, 이 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애국운동,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교회에서 쓰는 찬송가에도 '금주가'가 포함되었겠는가? 이 절제 운동으로 인해 법적으로 공창이 폐지되었고, 1938년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될 때 '미성년자 금주 금연법'을 법조항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교회가 절제에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절제'였기 때문이요, 성령을 받게 되면 강력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희망이다'고 외친다. '예수님이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모르기에 교회의 외적인 모습만을 보고 평가한다. 이 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공감대가 생겨나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때 교회는 진정한 한국 사회에 희망이 될 것이다. 이 일은 쉽다면 엄청나게 쉽고, 어려워지려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울 것이다. 해답은 절제에 있다. 절제는 많이 가진 자가 하면 쉽게 드러난다. 대형교회, 드러난 지도자들, 이들이 세상에서는 많이 가진 자들로 비추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언론들은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좀 더 절제되고, 다듬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과거의 모습으로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보다는 외면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 안에서 보는 관점을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 돌려볼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런 지혜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포장이 좋지 않으면 사람의 눈길이 가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좋은 복음을 좋은 포장으로 싸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명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