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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18
14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육신하심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에는 은혜가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성탄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통하여서는 왜 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이 상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문제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일부분 일리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벽송 같은 프로그램이 없고, 장식을 잘 못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질적으로 오늘의 성탄이 왜 이렇게 변질되고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외부의 어떤 문화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남포동에 가보면 얼마나 화려한 성탄장식들이 꾸며져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4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데아오마이(theaomai)'로 영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 영안에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아 서, 자기 주님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플러스 인생](2013.12)이란 기독교 잡지에 어느 분이 왜 예수님이 가축들과 오물더미가 많은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 안에 태어났는가를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마구간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마구간 같은 우리 안에 오셔서, 그 중에서도 부끄럽고 못난 구유 같은 곳에 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얼마나 허물이 많습니까? 연약함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탁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끝이 없이 품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구약적 용어로는 '인자'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에 대하여 먼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찾아와 주셨고, 항상 하나님 쪽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믿는 집안에 태어난 것 이것 은혜가 아닙니까? 그 은혜가 희미하게 보이기에, 깨달아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에 우리를 통한 은혜가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성탄의 은혜가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오늘 이것을 살펴 보며 우리 삶에 적용하는 시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첫째, pros-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갈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
(1절)
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함께"(ho logos pros tou teon)라는 말은 '나란히' (meta)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다(para)'는 뜻도 아닙니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pros'는 방향성과 목적성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마주보다'의 의미입니다. 말씀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귀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고, 그 깊은 교제 속에 있었기에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요14:10) 예수님의 행동은 곧 아버지의 행동이었습니다.(5:17, 6:38)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그러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리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서 왜 마르다는 주님을 섬기려하면서 짜증이 나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반면 마리아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입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을 때 그의 열심에서 드러난 것은 오히려 강한 자아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동생을 향해 불평하고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앞에 pros 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교제와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도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움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제하여 주는 일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구제와 봉사는 주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할 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말씀과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주님께 집중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 보면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까?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과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기도 시간은 빨리 끝내고 성경 읽는 시간은 지루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누구와 오래 교제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면 그를 닮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오랫동안 면대함으로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새 정부가 들어서면 꼭 가까운 인척, 또는 가까이에 있던 중요한 인물들이 커다란 부정에 연루되는 것을 우리가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왜 이런 부정한 삶과 권력들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권력 가까이, 권력과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 지도자를 pros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시대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입니까?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가까운 관계도 없을 것입니다. 형제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지간은 같이 몸을 맞대고 삽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는 가까이 있을 지라도 마음이 멀면 구만리처럼 먼 관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마치 이와 같은 영적인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주님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주님을 통하여 내 이익만을 생각하고, 내 자아만을 살리려고 한다면 주님의 뜻과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을 향하여, 그 어떤 것 때문에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그분으로 기뻐하고, 그분과 깊이 있게 교제하고,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는 그런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향과 목적에 우리의 방향성과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의 축도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대면할 때 그곳에 축복이 있고, 평강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향할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주변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가 없습니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아만 들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주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였습니까?
두 번째, dewelling-자신을 비우고 나눌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14절)
1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14절에 그 하나님, 창조주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샤륵스'(sarx, flesh)입니다. 죄에 약하고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몸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헬라인들은 육체는 악한 것으로, 영혼을 구속하는 하는 감옥이고, 정신이 유폐되어 있는 무덤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헬라철학들은 병적인 금욕주의나 심지어 육체를 자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성육신하였다는 내용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becoming이 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빌립보서 2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특권을 붙잡으려고,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made himself nothing 입니다. 케노시스(empty)입니다. 오히려 비우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 즉 섬기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어 낮아지심으로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누릴 수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심, 섬기려는 마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흘러넘치게 된 것입니다.
dwelling 거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주님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낮고 천한 마구간의 인생의 자리까지 낮아져주셨기에, 함께 있어 주었기에 그곳에서 은혜가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 장막을 쳤을 때 쉐키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났던 것처럼, 그리고 시은좌에서 용서의 은혜가 나왔던 것처럼 주님의 낮아짐으로, 함께 있어 줌으로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영광중에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열 제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깁니다. 은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2-45)
주님이 성육신 하신 까닭은 giving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자신을 주시려 한 것입니다. 나누려 한 것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KBS의 감동대상을 받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은 "울지마 톤즈"라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의과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된 이후에 신부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다 뒤로 하고 아프리카 남 수단의 부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톤즈에 왔습니다. 거기에 와서 학교도 세우고 또 한센병 환자도 돌봐주고 먼데까지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여 아프리카의 슈바이쳐와 같은 그런 일을 했는데, 거기에 전기가 없기 때문에 태양발전을 하고 냉장고를 돌려서 주사액을 거기에 넣어 놓고 병도 고쳐주고 치료하는 일에 온힘을 쏟아 밤낮으로 일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건강검진을 해 보니까 간암말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분은 자기 전부를 다 남 수단 톤즈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 바다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톤즈라고 하는 그 동네에 우물도 파주고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을 공부도 시켜주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가서 병도 고쳐주어서 살 희망을 불어 넣어 주므로 톤즈 사람들의 가슴에 이태석 신부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서 악대를 만들었는데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소식을 듣고는 이태석 신부의 영정을 앞에 들고 행진해 가면서 한국말로 가르쳐 줬던 노래'사랑해 당신을' 부르면서 이태석 신부님과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 시대에 성경은 오늘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며칠 전에 저희 안사람이 "여보! 여보! 책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하며 저를 붙잡아 놓고 일장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는 것, 돈을 버는 것,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 이성 교제를 하는 것, 승진하는 것, 다 즐거운 일이지만 그 즐거움은 잠깐으로 끝나야지 오래가면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즐겁다고 더 먹으면 병이 나고, 돈을 벌수록 근심도 많아지고, 이성 관계 중 성관계도 조금만 지나쳐도 병이 나고, 통치욕이 많아지면 전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누면 기쁨이 넘치고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이웃과 나누면 기쁘고, 명예욕을 버리고 나면 기쁘고, 재물을 없는 자와 나누면 기쁘고, 후진국과 나누면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탄의 계절에 주님처럼 더 낮아지고, 더 비워지고, 내 목소리가 작아질 때 그 곳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그 은혜가 흘러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함께 거해 주고, 동행해 줄 때 은혜가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줄 때 소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자기희생, 낮아짐을 이야기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율법 화되기 쉽고, 남을 판단하기 쉽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셋째로, Reimaging Evangelism-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줄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18절)
18절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설명했다는 것입니다.(interpreted) 주석했다는 것입니다 (exegete)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가슴에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품속에 있었다는 것은 가장 깊은 친밀성을 표현하는 히브리의 관용어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육신으로 계시던 날 동안에 주님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을 때 그는 주님의 가슴속에 뛰는 박동 안에 숨겨진 십자가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심정에 있는 것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한이 연로하여 거동조차 힘들게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갈 날이 가까워지자 한 번은 그 제자들이 요한 사도에게 이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 소천하실 날이 가까웠는데, 마지막으로 저희들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이에 사도 요한은 이르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말하기를, "선생님, 그 말씀은 많이 들었으니 그것 말고 뭐 다른 좋은 말씀이 없으시겠습니까?" 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같은 답변을 들은 제자들은 마지막 세 번째로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사랑 얘기는 이제까지 족히 들었으니 그것 말고 다른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세 번째 역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훈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품속에 안겨 그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심장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창녀촌으로 팔려간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순정은 있었나 봅니다. 그 여자는 어떤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어둠을 스스로의 힘으로 걷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녀촌을 탈출해 아무도 자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도시로 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는 창녀촌에서 지낼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주일에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발품을 팔아 교회에 찾아 등록을 했습니다. 부부는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모두 집사가 되었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행복한 삶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느 집사님이 그 여자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신실해 보이는 그 여자가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쳐했습니다.
"정말 가증스러워. 어쩜 자기의 더러운 과거를 그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이건 당신만 알아야 해. 정말 기막힌 일이야"라며 다른 교인들에게 전해준 귓속말은 그들 부부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부는 교인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전에 그토록 친절하고 따뜻했던 교우들이 자기들만 나타나면 마치 벌레 보듯이 힐끔거리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교우가 자기들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안타까웠습니다.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아픔이지 교인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인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창녀촌보다 더 싸늘한 교회에서 그들 부부는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밤 부부는 수면제를 나눠 먹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청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부부 집사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서 담임목사님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양 떼를 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리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내가 속한 순안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내외를 품어줄 수 있을까요?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 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이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습니다. 무대 뒤 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 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습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바로 이때였다.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 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있는 이 사랑의 신학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품안이 증거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독선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알파코스는 1976년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HTB(Holy Trinity Brompton) 교회에서 찰스 만함(Charles Marnham)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영국교회 상황은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으며 교회는 썰물처럼 성도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사역자가 30,000여명이 있었는데 무속인은 80,000명이나 되는 영적인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교회에는 습관적으로 드나드는 노인들과 소수의 젊은이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17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0%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떠나는 젊은이들이 남긴 말을 2가지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하지 말고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지하철에서 두 명의 승객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어느 할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왜 여기서 싸우는 거야?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얼마나 창피한 이야기입니까? 이 시대 교회가 사상을 이야기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교리를 이야기 하지만 그 안에는 독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사랑의 도구가 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은혜가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글
설경욱씨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우리는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을 또 한 번 지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났는가가 중요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더 낮아지고, 함께 해주고, 나누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 보이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 성탄을 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문
주님, 주님의 성육신의 모습을 보면서 종교적인 지근거리에는 있었지만,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깨달을 수도 볼 수도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더 많이 나를 높이려했지 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신앙의 성숙으로, 헌신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지는 율법의 도구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고, 은혜와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주의 손발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22
눅 2:8~14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던 장기려(張起呂) 박사가 80회 생신을 맞이해서 생애에 가장 기뻤던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첫 아들을 낳았을 때 기뻤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고 했습니다. 온 국민들이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제 강점기 당시 한 청년의 승리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것은 장박사만이 기뻤던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기뻐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소식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확신이 생겼을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기쁨이 너무 커서 앞의 두 가지 기쁨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의 탄생 소식과 그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이 됨을 믿으십니까?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잘된다는 소식,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소식들을 원합니까? 복권을 사놓고 기다리는 사람은 1등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아파트 청약을 해 놓은 사람들은 청약 당첨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결혼한 자녀가 있는 부모나 당사자들은 임신했다는 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주식을 산 사람들은 주식이 크게 올랐다는 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혹시 병원에 검진을 받은 사람은 아무 병이 없다는 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시험을 치룬 학생들은 합격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는 모두가 기쁩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당사자들에게 국한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은 없습니까? 누구나 100살까지 산다고 하면 아마 기뻐할 것입니다. 암을 정복하는 특효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쁠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약이 개발되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가 탄생했다는 소식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닙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쁜 소식으로 받지 않으면서, 그 소식을 전하려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좋은 소식으로 받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서 '기쁨의 소식' 이란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의 탄생 소식이 우리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에 축복입니다. 왜 예수의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첫째로 임마누엘의 소식이기에
미국 버지니아의 리치먼드 대학 구내 캐논 메모리얼 채플에서 색다른 크리스마스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밝고 즐거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우울한 멜로디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습니다. 교회 곳곳에는 빨간색이나 금색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대신 슬픔을 상징하는 파란색 천이 걸렸습니다. 초록색 나무 장식 대신 죽은 나뭇가지가 장식됐습니다. "블루 크리스마스(Blue Christmas)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별했거나 이혼 등으로 잃고 갑자기 생긴 빈 자리를 견디기 어려워 고통 받는 사람들 이들을 위한 예배인 것입니다. 소위 "빈 의자 신드롬"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를 위해 시작된 예배입니다. 이 교회의 케이트 오드 와이어 랜들 목사는 이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전통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연말연시 가족의 빈 자리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에게 주님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워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성탄은 주님께서 우리 삶의 빈자리에 찾아오시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해 오셔서 함께 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로를 얻고, 그래서 우리가 평안을 얻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 무엇으로도 맛 볼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가장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의 탄생은 임마누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축복하시며,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떠나가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며,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진정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좋은 소식입니다.
둘째로 죄사함의 소식이기에
국민일보에 '전과 8범 재소자가 보낸 성탄절 카드-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라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굿간, 어둡고 더러운 추한 곳이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복된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탄을 맞는 우리 마음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빌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글 옆에는 발신자가 직접 그려넣은 양 한 마리와 예수님이 서 있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전과 8범 김씨는 절도·공무집행방해·상해. 횡령 등 여러 죄목으로 1972년부터 교도소와 청송감호소 등을 전전했습니다. 99년 청송감호소를 나왔지만 뺑소니 교통사고가 딸을 앗아갔고 그 충격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혈우병을 앓는 10살된 아들을 뒤로 한 채 2003년 다시 교도소에 들어온 김씨는 삶의 의욕을 거의 잃었습니다. 교도소 측은 그에게 신앙생활을 권했고 그는 신앙을 가지면서 손수 허드렛일을 찾아 했습니다. 주변으로부터 " 사람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김씨는 한 독지가가 돌보는 아들에 대해 적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 아들까지 주님의 귀한 아들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출소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걸어 올라 올 것입니다. 오직 주 안에서 새롭게 살고 싶은 결심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평생을 감옥살이하는 사람에게도 큰 소망이 임합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야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나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집착을 벗어버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이라도 주어진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심이 성탄이며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평화의 소식이기에
인류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지구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원자폭탄'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미국 국회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제조를 감독한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박사를 초빙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원자 폭탄을 만드셨는데, 이 원자 폭탄을 막을 수 있는 무기는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이머 박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원자 폭탄을 막을 무기도 있지요. 그것은 바로 '평화'라는 무기입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나 어느 곳에서도 예수가 주시는 참 평화, 예수로 말미암은 이 평화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아는 사람은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공포에서 벗어나 참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이 평화의 축복이기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가 밤중에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평소 어둡던 숲이 전등을 켜놓은 것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전나무 숲 사이로 영롱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빛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도 저 전나무와 같다. 개인은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빛을 받으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루터는 이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전나무를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눈 모양의 솜과 빛을 발하는 꼬마전구와 촛불을 장식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빛이 스며들면 보석처럼 영롱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성탄의 소식을 통하여 성탄의 빛이 스며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 아침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구주 예수를 모시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임마누엘과 죄사함과 평화의 기쁘고 좋은 소식을 통해 축복이 넘치는 삶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강의 왕으로 나신 아기
- 9
사 9:1~6
인도네시아의 이리안 자야(Irian Jaya) 족에게 전도하던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의 일화입니다. 그때는 자야 섬에 식인종이 있을 때였습니다. 부족 간의 싸움이 심했습니다. 서로 싸우다가 화해를 청할 때는 마을의 갓난아기를 상대에게 제물로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평화의 아기(Peace Child)'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섬에 도착한지 2년째 되던 해 부족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가 아기를 안고 언덕에 나타났습니다.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놀란 눈으로 서양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교사 부부는 자신들의 갓난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완전한 화해의 아이, 예수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라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들은 아기들을 가슴에서 떼어놓지 않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그의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 위에 손을 얹으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이 여러분 마음에 내주하실 것이고, 여러분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쌍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공격의 외침이 아니라 평화의 도래를 가리키는 기쁨의 소리였습니다. 그때부터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던 이리안 자야 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악습도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화를 위해 거창한 구호를 외치거나 거창한 단체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평화를 위해 나의 아이를 내놓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평화의 아기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고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줄 때 비로소 참된 평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책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전쟁을 많이 겪었고 다른 민족의 압제를 당했기에 평화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마다 평화를 기원하며 '샬롬'이라고 인사 하였습니다. 본문 이사야 9장에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갈망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당하던 고통과 좌절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1절에 '고통'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흑암'도 나오고 '멸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절에는 '흑암', '사망', '그늘진 땅'이 나옵니다. 4절에는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가 나옵니다. 5절에는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겉옷'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전쟁과 압제,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어디에서나 희망이 없고 그들이 원한 샬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크나큰 절망과 고통이 이스라엘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평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날 때 평강이 가능해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를 다스리실 것인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이며, 특히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아기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 천군과 천사들이 부른 찬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즉 예언과 성취처럼 아기 예수는 성탄에 평강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왕으로 나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은 고통과 흑암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평강의 왕으로 우리에게 나신 아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감당하십니까?
첫째로 빛을 비추시리라
1569년 추운 겨울날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종교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더크 윌렘스(Dirk Willems)는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추격자들이 그를 뒤쫓았습니다. 윌렘스가 강을 건너는데, 추격자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강에는 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윌렘스가 강을 건너자마자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살려달라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윌렘스는 몸을 돌이켜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추격자에게 달려가 구해주었습니다. 곧 이어 다른 추격자들이 당도했고, 윌렘스는 체포되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그는 차마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갈 수 없었고, 그 마음 때문에 도리어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이 다른 이의 가슴에 붙인 불꽃 때문일 것입니다.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윌렘스의 불꽃처럼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심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여기의 '흑암'은 호쉐크라는 원어로 '죄', '무지', '고통'을 상징합니다. 빛은 '생명', '여호와의 진리'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 가운데 있게 될 백성들이 빛과 생명되신 메시아의 오심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흑암의 땅으로 불리던 스불론, 납달리 땅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 지역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지역들이었습니다. 전쟁이 그치지 않았고, 열국들의 침입으로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메시아가 오심으로 소망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메시야 왕국은 구원으로 인하여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빛을 누리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들은 빛으로 오신 구주를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열방의 빛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을 부르시기 원하십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을 비추며 오시는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즐거움을 더하시리라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Jirani Children's Choir)은 39명의 케냐 아이들로 구성된 합창단입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고로고초 마을은 슬럼 지역입니다. 고로고초의 뜻은 '쓰레기'라는 뜻입니다. 일자리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 마l을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아이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생명을 연연해 가고 있었습니다. 각종 질병, 말라리아 에이즈로 인해 부모를 잃고 가족을 잃고, 동생을 먹이기 위해 새벽부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고로고초의 아이들입니다. 대통령 선거시 고로고초 마을을 이주시키고 일자리를 지원하겠다는 공약이 나왔지만 선거가 끝나자 오히려 마을을 강제 철거하겠다며 주민들을 협박하였습니다. 갈 곳 없고 돈이 없고, 삶의 희망마저 없는 아이들이 있는 마을을 지나던 선교사의 마음이 움직여져 합창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쓰레기가 모이는 곳에서 살던 아이들이 모여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어나 한 번도 악보를 본 적도, 노래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은 발성은 커녕 목소리조차 자신 있게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화음을 만들고, 리듬을 타고 멋진 합창을 완성했습니다. 합창단의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그 감동의 깊이가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합창단의 아이들은 나쁜 짓 대신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며 모두 자랑스러워합니다. 아이들은 '하쿠나 마타타' ,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라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케냐 정부조차 외면한 마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즐거움이 임한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메시아가 모든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실 때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통치권의 변화로 인한 회복입니다. 즉 이방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임할 때 회복되는 진정한 즐거움입니다.
이방인의 압제 속에서는 수고가 고통이었고, 멸시 당함이었으며, 사망의 그늘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통치는 즐거움을 더하는 통치입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전투에 나가서 승리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대적의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셔서 즐거움을 누리는 수고가 되게 하십니다. 기쁨이 함께하는 수고가 된 것입니다. 메시아의 출현으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고통을 거두시리라
김성자 전도사는 1980년도에 패션모델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장마철에 홍천을 내려가는 고갯길에서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이 마비되고 대소변까지 받아내는 중증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설상가상 가해한 차가 무보험차가 되어 치료비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퇴원을 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골방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지내다 욕창이 생기고, 대인공포증으로 인하여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지옥이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자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사고를 만난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이야. 고통 가운데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라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고통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이면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예수를 영접하였고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슬퍼하며 자신을 괴롭혔던 것을 회개합니다. 비록 하반신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지만 아직 저에게는 두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움직일 수 있으며, 입이 있어 먹고 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재활의 의지가 생긴 그녀는 감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고통 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처럼 저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장애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그들이 주님을 만나는 도구로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지금 그녀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남편과 함께 장애인들을 돌보며 고통 중에 만난 하나님을 전하는 간증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여기의 '멍에',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는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압제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애굽의 속박을 연상시킵니다. 과거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메시야만이 고통을 제하여 주실 것입니다. 무겁게 맨 짐을 내려 주십니다. 어깨에 지워진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참된 자유가 회복됩니다. 메시야 탄생은 온 누리에 평화의 소식이 됩니다.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기쁨을 누리며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1879년 프랑스와 독일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입니다. 여기 저기 총탄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병사들은 별들을 바라보며 저마다 고향에서 성탄절을 보내던 추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실아계신 주님과 그분의 오심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프랑스 군의 참호에서 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총과 칼을 내어던지고 하늘을 향하여 감격에 찬 찬양 '오 거룩한 밤(Oh Holy Night)'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거룩한 밤 별들 반짝일 때 거룩한 주 탄생한 밤일세. 오랫동안 죄악에 얽매여 헤매던 죄인들을 놓으려 우리 위해 속죄하시려는 영광의 아침 동이 터온다. 경배하라 친사의 기쁜 소리. 오 거룩한 밤 주님 탄생하신 밤, 주 예수 탄생하신 밤일세" 찬양을 듣고 있던 독일군 진영에서 한 병사도 총을 던지고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전쟁터에 휴전이 선포되고, 크리스마스는 서로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은 흑암에 거한 모든 백성들에게 빛이 되어 주십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죄를 해결해주시는 즐거움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거두어 주십니다. 부디 평강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함으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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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3~6
'아이 앰 세컨드 (I AM SECOND)'는 각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브라이언 웰치(Brian Welch)는 그래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록그룹의 기타리스트였습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삶은 마약으로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성경 말씀이 떠올랐는데, 왠지 당신에게 중요할 것 같아서요.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그 말씀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해 보았지만 남는 것은 공허함뿐이었습니다. 많은 돈과 인기를 얻었지만 마음의 무거운 짐은 없어지지 않았고 가슴에 난 구멍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부딪혀왔습니다" 그 후 교회에 출석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약을 끊지 못하던 어느 날,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이 마약들을 제게서 가져가 주세요" 그런데 그때 "다 내게로 오라"는 성경 구절이 다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크나 큰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어요. 그건 마치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다음 날 바로 마약을 다 내다 버렸어요. 그리고 그룹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룹을 그만 둔 후 팬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담대히 예수를 전했습니다. 자신의 사진과 "I AM SECOND"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판을 도로변에 설치했는데, 이는 자신의 삶의 최우선 순위는 주님이시며 자신은 그 다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고판을 보고 그의 간증을 들은 수많은 청소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함으로 주의 오실 길을 곧게 만든 결과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혼돈과 부패와 혼란의 시대에 세례를 베풀고 회개할 것을 선포하므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신앙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돌이켜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회개는 삶의 근본적 변화를 통하여 구체적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위와 생활로 이어지지 않는 회개란 일시적이고 감정적 차원의 회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만이 참된 회개입니다. 구체적인 행위와 생활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생활로 표현되는 회개만이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으로 메우라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 목사가 강의를 끝낸 후 의사인 나이지리아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특이해서 맥도날드 목사가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상처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맥도날드 목사가 호기심이 생겨 '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조부모가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부모와 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가족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가 그녀를 낳고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을 안으면서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분노와 적대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는 그 이름이 예수에게 적합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상처를 사라지게 한 아이'로 오셨기에, 예수를 만나는 순간 누구든지 사랑으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마음의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로 인해 미움과 분노 등 여러 가지 마음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사회에는 마음의 골짜기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처로 인한 마음의 골짜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메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마음에 균열이 생겨 버립니다. 두 마음이 생깁니다. 두 마음이 생기면, 두 주인을 섬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됩니다. 골짜기가 생긴 두 마음으로는, 결코 성탄의 주님을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골짜기가 많아서,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시게 했습니까?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등의 많은 골짜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고린도전후서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골짜기처럼 이리 저리 나누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골짜기가 날마다 벌어지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녀간의 골짜기는 없습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골짜기는 없습니까? 형제간의 골짜기는 없습니까? 이러한 골짜기들이 모두 메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상처로 인한 마음의 골짜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메워져야 합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와 예수를 만나 그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깊이 파인 마음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온전한 회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으로 낮아지라
성 부라더 로렌즈(Brother Lawrence) 수도사가 분쟁과 다툼으로 소문난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가 서있는 것을 보고, "노 수도사가 왔구려!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 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고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수도사는 3개월이나 접시를 닦았습니다.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수도사들이 쩔쩔 매었습니다.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놀라며 말합니다. "아니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 수도사의 극도로 낮아진 겸손의 도에 모두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은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귀히 쓰지 않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우리 마음에는 교만과 고집과 불순종으로 높아진 산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을 통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교만을 깨뜨리고 부수고 낮춰야 합니다. 낮은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마음의 길을 곧게 하려면 교만의 산을 제거해야 합니다.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가 없으면 부흥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교회에서 가장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교만의 산이 있습니까? 산과 같은 마음을 낮추십시오. 더 겸손해지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을 찾는 사람을 통해 이땅에 오실 것입니다.
셋째로 화평으로 평탄하라
중국 양나라의 송취(宋就)는 초나라와 접경지대에 있는 고을의 군수로 부임했습니다. 접경지대에 사는 농민들은 수박과 참외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 농민들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양나라 농민들은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농사를 지었기에 수박과 참외가 달고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나라 농민들은 게을러서 농사에 힘을 쓰지 않다보니 수박과 참외는 맛이 없었습니다. 초나라 농민들은 양나라 농민들을 시기하여 국경을 넘어와 양나라 사람들의 수박과 참외밭을 엉망으로 휘저어놓고 도망을 쳤습니다. 양나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밭에 나가보니, 갓 맺힌 열매와 새순들이 짓밟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수인 송취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초나라 사람들의 짓입니다. 이대로 당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했던 대로 초나라로 넘어가 그들의 밭을 모조리 짓밟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송취는 원한으로 복수하는 것은 결국 화를 부를 뿐이라면서 해결책을 알러주었습니다. 그날 밤 송취가 일러준 대로 국경을 넘어가 초나라 사람들의 밭에 물과 거름을 듬뿍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 초나라 사람들이 밭에 나왔다가 누군가 자기들 밭에 물과 거름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양나라 농민들이 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초나라 밭에서 나는 수박과 참외 역시 달고 맛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초나라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초나라의 왕은 양나라에 금은보화를 보내어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고, 그 뒤로 두 나라는 사이좋은 이웃이 되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마음의 거친 부분을 평탄하게 만들어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입니다. 험한 길은 죄의 습관을 의미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남의 흉을 봅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냅니다. 방탕하게 지내고 술에 취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와 같은 죄의 습관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들을 모두 잘라내어 심령에 평탄한 길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에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말하기를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듯이 우리 마음을 다듬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들은 돌보지 않아 너무 황폐해졌습니다. 병들었습니다. 더러워졌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교만과 악한 마음이 가득 차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예수의 마음을 전혀 닮은 데가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진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를 나누고 분리시키는 일이 있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높은 산 작은 산처럼, 큰 교만 작은 교만 할 것 없이,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회개를 통하여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여 성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골짜기 같은 마음의 상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메워야 합니다. 교만의 산을 겸손으로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악의 습관과 불화로 험해진 길을 화평으로 평탄케 함으로 구주 예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의 표적
- 8
눅2:1-7
서울에 언니를 둔 강원도 산골에 사는 여동생의 글입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서울에 사는 나의 언니는 일을 더 빨리 해주는 온갖 것을 갖고 있어요 옷은 백화점에 가서 사기만 하면 되고, 자동차 세탁기 청소기 가스레인저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시간을 절약해 주는데도 언니를 만나러 가면 나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데요.
그리고는 봉투 하나를 주면서 나보고 내려가라고 해요.
우리 언니 참 이상해요." 이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동생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일까요?
동생을 배려하는 함께 있어주는 마음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은 예수님 만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로 주신 '예수' 라는 이름 그건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입니다.
마1:21절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금번 성탄주일을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밤에 천사들이 베들레헴 들판에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눅2: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기 때부터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표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구원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우리의 구원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말해 보세요(1-2절)
눅2:1절에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로 호적하라고 하니 당시 이스라엘이 포함된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수리아 총독 구례노가 호적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와와 함께 호적을 하러왔다가 예수님을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단순히 로마 황제가 식민지 조세를 거둘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본적지로 돌아가 호적을 하라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행은 역사적 사건이요 바로 역사의 분수령이 됩니다.
이 역사의 분수령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세계 경제가 어렵습니다만 세계 경제가 미국의 윌가의 금융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 사실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2.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 사실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3-5절)
물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요셉이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 하러 본적지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 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미가5:2절의 인용으로서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
바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 하러 간 것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 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고 불리워진 곳인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2: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의 예고의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도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찾아간 박사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바로 베들레헴 구유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구유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자의 삶은 왕궁의 높은 곳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구유의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이 예언의 성취라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성취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고향 베들레헴에 호적 하러 왔을 때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잉태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3. 3절에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더라는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 역시 성경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 사건입니다.
구약에 선지자 이사야가 사7:14절에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안티기독교 세력들의 공격의 핵심이 바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입니다.
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있지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들에게는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고 신비적인 사건인지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7:에 당시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이 연합을 하여 형제 유다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사7:2절 [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그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사7:11절에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
고 하니 아하스 왕이 하는 말이 [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 ] 고 합니다.
그럴 때 이사야 선지자가 [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 하면서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징조입니다.
어떤 징조입니까?
지금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아람과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것과 처녀가 아들 낳은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
하나님은 얼마든지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대적들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붙들고 있는 신앙고백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는 고백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의 중심 -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성탄의 믿음이 나의 삶의 믿음으로 삶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 기독교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동정녀 탄생이 주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유전적 부패로부터 오염되지 아니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누가는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4. 예수님의 탄생 환경인 "첫아들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말합니까?(7절)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계시고 주변에는 말을 포함한 몇 마리의 동물들이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목자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아주 목가적인 풍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초라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 마구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세트가 마련됩니다.
그 세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구유의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란 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 듯 교회가 구유 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아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혀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서울에 있는 현암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근간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책이 초판 제1쇄가 발행된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파문이 커지니 조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는 없다 ]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표적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초라한 출생 같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은
1)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1:21절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2)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사53: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동정녀 탄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조가 되고 표적이 되신 예수님 찬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3) 만왕의 왕이 되신 분이십니다.
사9:6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다고 합니다.
즉 만사를 다스리는데는 우리와는 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짐을 당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정사와 평강의 더 더함이 무궁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온 세상에 이 진리를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출생의 초라함이 가장 잘 나타낸 말이 7절 [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는 말씀입니다.
5.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7절)
로마 황제의 영을 따라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 하러 고향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빈방이 없었습니다.
먼 여행길에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더군다나 마리아는 홀몸이 아닙니다.
다급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아마 이리 저리 여관 문을 두드려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방이 없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집 마당에 짐승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마리아는 해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성탄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말을 더듬고 좀 모자라는 아이가 여관 집 주인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 있습니까?" 물을 때 "빈 방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짤막한 대사였습니다.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을 찾아와 묻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실망하고 돌아가려는 요셉과 마리아가 너무 애처로워
"가지 마세요. 우리 집에 방이 있어요 진짜 빈방이 있어요.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집에는 방이 있단 말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 날 연극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마는 그날 교인들은 큰 감명을 받고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첫 번째 성탄절에 예수님이 누울 곳을 이 집 저 집 방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이 거하실 방을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계3:20절 [ 보라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페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제목의 보잘것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징조요 표적이 되십니다.
예수를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한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적 사건이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 즉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어떤 문제보다 해결하기 힘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그 표적이 우리의 삶 속에 재현되어지는 성탄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