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공적책임에 대한 소감
필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바른교회아카데미(원장 김동호/높은뜻숭의교회)에서 그동안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세 번에 걸쳐 연구위원회 세미나를 개최했다. 현실적으로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주제였고 아주 유익한 세미나였다. 천만 신자를 자랑하는 한국교회는 이미 한국사회의 매조리티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공적, 역사적 책임은 막중하다 하겠다.
그동안 거듭된 세미나는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에 대한 무책임을 회개하고 오류를 반성하는 기회였고, 비전을 만들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항상 향상교회(개체교회) 내의 목회적 책임에만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이 세미나가 목회적인 안목을 넓힌 것은 물론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와 토론 속에 뭔가 핵심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교회가 가진 최고의 가치요, 교회의 존재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과 복음전도가 무시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소위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대립시킴으로써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고, 모든 공적 사역의 동력이 되는 복음을 애써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컸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모든 비참과 죽음의 저주에 빠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대책이다. 복음이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이고 확실한 대답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다. 구원이란 아주 광범위한 말인데, 개인적인 구원과 사회적인 구원을 포괄한다. J. Stott가 말한 대로 "New Life, New Society, New Kingdom"이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은 속량(贖良)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서 의롭게 하심으로 죽음에서 해방하셔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느 정도의 선의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모본이 아니라 속죄를 위한 제사요, 구속(救贖, 또는 해방)을 위해 지불된 값이다.
간략한 서술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갖는 공공성이라고 할까, 개인적 사회적 구원에 미치는 효능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나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된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순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의 공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복음과 복음전도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확인하고 싶다. 보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나 함께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은, 복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거나 또는 복음적인 가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가치에 경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음전도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교회의 공적 책임이고, 이를 수행하는 가장 효력 있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일을 하는 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곧 사회를 구성하는 것도 사람이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주체도 사람이다. 그런데 복음은 이 사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복음은 사람을 온전케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따라서 복음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수행하는 공적(사회적) 책임 중에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한 사역이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을 통한 영혼구원의 직접적인 사역뿐 아니라 종교교육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전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확장된 복음사역이다. 한국교회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일천만 명의 이상의 교인들이 교회를 통해 정신 교육을 받는다. 예배와 설교를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희망을 갖게 된다.
누가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가? 누가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는가? 누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가르치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끌어온 정신적인 파워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따라서 국민정신교육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상당한 공적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잘못된 교회나 지도자들에 의해 교인들이 잘못된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기복적이거나 반사회적이고 염세적인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복음의 몰이해나 왜곡으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 물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문제는 아니지만 - 이를 가지고 교회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막대한 교육적 순기능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설립하거나 운영하고 있는 교육기관들과 복지시설 등은 그 어느 종교단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비율도 높다. 예를 들어, 노숙자 시설의 63%를 교회들이 운영하고 있고, 북한 동포들을 위한 지원 사업이나 그 물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또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조용하게 이웃을 돕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는 어느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한 책임자로부터(그는 기독인이 아니다) 자기기관을 후원하고 있는 사람들의 80%가 기도교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위와 같은 교회의 복음적인 모든 사역을 교회 내부의 사적사역으로 치부하고, 교회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도 온정주의적인 시혜로 폄하하며, 구조적 변화를 위한 이념적 정치적 활동만을 공적인 봉사로 평가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지나친 판단이 아닐까 싶다. 한국교회가 공적 책임이라는 명제 앞에서 깊이 반성하고 그 사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크고 완전한 대책인 복음을 제쳐두고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 더 의존하는 좌파적 사고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정주채 목사 (향상교회, 바른교회아카데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