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행동' 사이에서
한국 교회가 처한 암담한 우리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일꾼 된 '의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행동'이 더 중요한가를 질문한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물론 '행동'이라고 대답하였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떠 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윤리적 정황을 누구보다 스스로 더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우들에게 이런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교회 공동체내에서 어떤 교우들은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손님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가져 왔을까? 나는 그것이 바로 의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의식이 있는 이들은 주인처럼 행동하고, 손님 의식을 가진 이들은 결국 손님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의식의 훈련이다.
바울 사도의 편지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컨대 에베소서의 핵심은 교회론이다. 바울은 먼저 에베소 1-3장까지 교회가 무엇인가를 원리적으로 접근하여 가르친다. 그리고 4-6장까지 그런 원리에 입각한 공동체내에서의 실천내지 행동을 다루고 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다. 골로새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권이다. 먼저 1-2장에서 교리적으로 주권론을 말한 다음 3-4장에서 주권을 적용하는 실제적인 실천과 행동을 권면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부실한 기초는 단순히 윤리적 실천의 허약성이라기보다 성경적 의식화 운동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를 반성한다. 그런데 이런 건강한 의식화 운동의 출발은 마르크스의 교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다시 읽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성경적 의식화 운동의 본질이 바로 의식을 깨우는 영성 운동이라고 믿는다.
우리 가운데 맑고 깊고 깨끗한 영성의 강이 흐르기 시작한다면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행동을 결실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일까. 지나간 교회 역사에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행동가들은 피상적 사회 변혁 가들이 아닌 영성가 들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영적 각성이 바로 사회 변혁의 큰 강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되다"는 이 단순하지만 심오한 말씀이 여전히 한국 교회의 윤리적 희망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