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아내였지만 천대받은 여인, 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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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이라는 여인. 아브람과 사래가 엮어 가는 이야기에 하갈이 등장하는 것을 썩 좋아할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선 출신이 걸린다. 하갈은 애굽 사람이었다. 히브리인도 아니고 이방인인 애굽 여인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사래 이야기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래의 종이었단다. 여종 주제에 아브람 아이를 임신했다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고 감히 여주인인 사래를 깔보았다는 것이 괘씸할 것이다. 이것은 개역개정 번역자에게서도 드러난다. 개역개정은 각주에 '히, 아내'라고 표기하면서도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번역한다. 이에 비해 새번역은 '아내'로 번역한다. 개역개정은 하갈을 사래와 동등한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든 일은 사래가 계획하고 실행했다. 사람들은 그랬다고 사래를 비난한다. 사래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지 않고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래가 범한 불신으로 인해서 일이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마엘 임신과 탄생으로 인해 집안 문제도 복잡하게 되었지만, 나중에 이스마엘이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어 이스라엘과 대립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문제를 조장한 책임을 사래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제나 여자가 문제란다.
▲ 사라에 의해 아브람과 동침하게 된 하갈. Matthias Stom의 작품 'Sarah Leading Hagar to Abraham'. (사진 제공 Wikimedia Commons) |
하지만 하나님이 아들 낳기를 단념하고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는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낳은 아들을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고 했지, 그 아들을 꼭 사래가 출산해야 한다고 한정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래도 그렇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누가 아이를 출산하든 아브람의 자식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래는 그렇게 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갈이 이스마엘을 출산한 지 13년 후였다(창 17:21).
그리고 성경 기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나 지나서 사래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갈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도 성경 기자도 누구도 사래가 잘못했다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출산한 이후에 사래와 갈등을 빚을 때, 아브람은 매우 방관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브람은 하갈을 자신의 아내로 인정하지 않고 사래의 여종으로 취급한다. 결국 아브람으로부터 여주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래가 하갈을 학대해서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주한다. 하나님도 하갈을 아브람의 아내가 아닌 "사래의 여종"으로 부르신다(창 16:8).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여주인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라고 권한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갈이 사래를 여주인으로 대하면 문제가 풀릴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갈이 사래를 피해 도주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오직 하갈만이 아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갈은 매우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꼼꼼하게 경청했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 16:11).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이 낳을 아이 이름도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심')로 짓게 하셨다.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히브리어로 '엘 로이')이라고 불렀다. 성경 기자는 하갈이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까닭을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하갈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인 광야의 어느 샘을 '브엘 라해 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로 불렀다는 말을 첨가한다.
하갈은 귀가해서 하나님이 일러 주신 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사래와 갈등을 빚었다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아브람에게 상세하게 전했음이 분명하다. 하갈이 아이를 출산했을 때, 아브람이 그 아이 이름을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결코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맺으셨고, 그를 축복하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즉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서 이스마엘이 하는 역할도 크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 16:10)고 하셨고,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창 17:20)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갈은 그 이후로 20여 년 동안 지혜롭게 처신해서 사래와도 원만하게 지냈고, 그래서 가정이 평화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베푸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렸던 모양인데, 하필이면 그 장면을 사라가 보았다. 그 장면을 성경 기자는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 21:9)라고 서술한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스마엘이 아브람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지만, 사라의 아들이 아니고 사라의 여종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임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치게 한다. 물론 자신이 낳은 이삭의 앞날을 위해서 그렇게 했겠지만, 매우 비정하고 폭력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충분히 살 길을 마련해서 내보냈을 것으로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겨우 며칠 버틸 양식만 들려서 내보냈다. 참 잔인한 사람들이다. 하갈이라는 여인,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았다. (다음에 계속)
이종록 /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