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설교에 있어서 서론은 그 길이에 비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서론을 하는 동안 회중들은 그 설교를 계속해서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설교학자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설교자는 세 가지 형이 있는데, 도저히 귀를 기울여 그 설교를 듣고 있을 수 없는 목사와 귀를 기울여 설교를 들을 만한 목사, 그리고 그의 설교에 귀는 기울여 듣지 안 되는 목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서론이 중요한 것은 회중들은 보통 설교의 서론을 듣는 동안 그 날 설교를 할 목사가 어떤 유형의 목사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설교를 계속 들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서론은 얼마나 중요한가?
커뮤티케이션 연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보통 회중들은 설교나 강연이 시작된 후 평균 30초 이내에 그들이 계속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들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약 3분 정도의 서론에서 회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그 설교자는 30분 내내 회중들을 놓쳐버리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설교의 서론은 신중하게 잘 준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먼저 서론의 목적과 좋은 서론의 필수 조건들, 그리고 서론에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몸말
*서론의 목적
1) 주의를 집중시키고 흥미를 끌 것
무엇보다 먼저 서론은 회중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면 안 된다. 설교자가 강단에 나설 때 회중들이 기대에 찬 마음으로 회중석 한 쪽 끝에 앉아 자기 설교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회중들 가운데는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설교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중들은 그 주간에 있었던 수 많은 일들과 사건들과 문제들로 인하여 아주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중석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의 처음 약 30초 내에 듣는 사람의 주의를 사로잡지 못하면 전혀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회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치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와 같은 역설로 시작할 수 있다. 또는 수사적 의문문도 회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 예컨대 "언젠가 Time지 겉장에 Is God Dead?라는 질문이 실리고, 하나님께서 정말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수 없이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시니 이런 질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죽으신 것일까요?"라는 수사적인 질문은 회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가 하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나 통계도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한국사회에서 세 쌍의 결혼한 부부 가운데 한 쌍은 이혼 법정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여섯 쌍의 결혼한 부부 중에 오직 한 쌍만이 행복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와 같은 놀만한 사실이나 통계는 회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 외에도 설교자는 유우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자극적인 설명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회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해돈 로빈슨은 어떤 방법으로 시작하든지 간에 설교자는 처음 25마디의 말로 회중들의 주의를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2) 필요를 충족시킬 것
두 번째로 설교의 서론은 회중들의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듣고 싶어서 듣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회중들이 가지게 되는 "내가 왜 이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서론에서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회중들은 추상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생활의 폭넓은 경험들 한 가운데서 울려 나오는 말씀을 듣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회중들은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서론에서 회중들의 필요성을 건드릴 수 있어야 한다.
레슬리 티자드(Leslie Tizard)는 이렇게 말한다. "설교자로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의 필요를 생생하게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의 영혼을 사로잡을 때까지 느껴야 한다" 그래야 설교자는 회중들로 하여금 목사가 지금 자기에게 그리고 자기에 관하여 설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사람들의 필요성을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유명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필요성에 관하여 설교자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7개의 범주로 나누는데, 그것들은 육체적 필요(safety), 사랑과 애정(affection) 그리고 소속감(belonging)에 대한 필요, 자존감에 대한 필요(self-esteem), 자아실현의 필요(self-actualization), 지식과 이해에 대한 필요(knowing&understanding), 그리고 심미적인 필요(aesthetic)라고 한다. 설교자들은 매슬로의 이러한 인간이해 뿐만 아니라, 에릭 에릭슨(Erick Erikson)의 8단계 인격이론이나, 제임의 파울러(James Fowler)의 신앙의 발달단계 등도 회중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많은 통찰력을 주고 있으므로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설교의 주제나 중심사상, 그리고 본론을 소개할 것
서론은 또한 회중의 관심을 설교의 본론에로 돌리며 그것을 소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설교의 서론은 전체 설교를 예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서론은 반드시 그 설교를 소개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러므로 서론은 설교의 주제를 소개하고, 설교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하여 그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존 길링거(John Killinger)는 주장하기를 "좋은 서론은 전도성을 가진다. 그것은 사람들을 설교 가운데로 인도해 들이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설교의 서론에서 설교의 주제나 중심사상을 회중에게 말해주는 것이 좋으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 최근의 설교학에서 많은 논란이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설교의 서론에서 본론의 내용을 미리 소개받으면 설교의 긴박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인데,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서론에서 설교의 구조를 미리 회중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 관객들이 극의 줄거리의 개요가 인쇄된 프로그램을 읽게 되면, 연극의 서스펜스가 사라지게 된다. 관객들은 미리 연극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스펜스 파괴야말로 매우 불친절한 일이다"
설교의 중심사상을 서론에서 회중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으냐 그렇지 않는 것이 좋으냐의 문제는 설교의 방법론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서 연역적인 접근을 하는 설교에서는 설교의 주제나 중심사상을 서론에서 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귀납법적인 접근을 하는 설교에서는 서론에서 본론의 내용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모든 설교는 그 서론에서 회중들에게 그 설교의 흐름과 방향, 그리고 설교에서 회중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것이 좋다.
* 좋은 서론의 필수 조건
1) 간결성
서론은 가능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유명한 설교학자 그래디 데이비스(Henry Grady Davis)는 설교의 서론은 대체로 1-2분의 길이가 적당하다고 말한 바 있고, 휫셀(Whitesell)은 설교시간의 5-15%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설교의 몇 퍼센트를 서론으로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는 충고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론이 회중들의 주의를 끌고, 필요를 제시하고, 주제나 중심사상에 청중을 이끄는 만큼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물이 일단 올라왔으면 펌프질을 멈추어야 한다. 서론이 1분이 걸리든, 5분이 걸리든, 설교의 15%가 되든, 그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단 물이 올라오면 펌프질을 멈추어야 하듯이, 회중들의 주의를 끌고, 필요를 제시하고, 본몬으로 이끌만큼 되었으면 서론은 즉시 멈추고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청교도 설교가 존 오웬(John Owen)에게 어떤 노부인이 찾아와서 그가 너무 오래 식탁상을 차리고 있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설교가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어떤 설교는 좀 더 긴 서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즉, 회중이 설교의 주제에 관한 지식이 너무 없다거나, 오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론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오해된 개념을 명확히 하거나 정의를 내려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설교는 간결하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2) 적절성
서론은 또한 몸에 꼭 맞는 옷을 맞추어 입는 것처럼 설교의 본론과 꼭 맞는 것이어야 한다. 즉, 설교의 서론이 이 설교에서도 쓰이고, 저 설교에서도 쓰인다면 그것은 좋은 서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래디 데이비스는 "만일 그 서론을 그 설교 아닌 다른 설교에도 쓸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설교에 좋은 서론이 못 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서론은 고유한 특징이 있어야 하고 바로 그 설교의 중심사상을 지향하는 개념이 들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론은 반드시 그 설교에 적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3) 겸허성
서론은 본문에서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즉, 좋은 서론은 겸허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지나친 약속, 예를 들어 "오늘 우리는 이 설교를 통해서 모든 전쟁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라든지,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론에 관한 모든 의문점들을 다 해결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는 등의 과장된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가 서론에서는 이렇게 거창하게 제시해놓고, 본문에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못할 경우에 회중들은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다니엘 바우만(Daniel Baumann)은 그의 책에서 이런 예를 소개한다. 그것은 평신도가 자기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난 뒤에 이렇게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목사님, 목사님은 초고층 건물의 기초를 놓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다 지은 것은 병아리 둥지 하나 뿐입니다." 이렇게 인상적인 서론을 제시한 뒤에 별 볼일 없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서론은 겸손하게 시작하고, 서론에서 한 약속과 어울리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 서론에서 피해야 할 점들과 기타 주의 사항
1) 변명으로 시작하지 말 것
서론은 변명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지난 주간 동안에 너무나 바뻐서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식의 변명이나 사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변명을 함으로써 설교자는 회중의 공감을 얻으려 하지만 기껏해야 동정을 얻을 뿐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설교자의 그런 변명을 통하여 회중들은 그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회중들은 설교자의 변명을 듣는 순간 "아, 오늘 목사님은 나에게 주실 말씀이 별로 없구나"라는 생각을 무의식 가운데 갖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회중들은 그 설교에 대한 마음을 접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그래서 해돈 로빈슨은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설교자가 절대로 변명을 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혹 준비가 덜 되었을 경우라도 회중이 슷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내버려 둘 것을 지적한다.
2) 지나치게 흥미위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미 앞서서 지적하였듯이 설교의 서론은 회중들의 관심과 주의를 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론이 유우머 등을 통한 흥미위주로 전개될 때가 많다. 그러나 서론이 단지 회중들을 웃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설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지나친 속어를 사용한다든지, 천박한 유우머를 사용해서 회중들의 흥미 만을 끌려고 시도하는 서론은 피해야 한다.
3) 강단으로 나가는 설교자의 자세
설교자가 강단으로 나서는 모습은 그 설교자에 대한 많은 것을 회중들에게 전해 준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설교단에 나선다면, 그의 신체 언어는 그가 무엇인가 전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만일에 설교자가 강단으로 나설 때 망설이며, 무엇인가 불안한 태도를 보인다면 회중들은 그 날의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곧 눈치를 채고 말 것이다. 즉, 설교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든지 하는 등의 문제를 눈치채고 만다. 미국의 한 유명한 설교가는 설교시간이 되면 강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누군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 목사는 대답하기를 "나는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한 순간이라도 더 빨리 회중들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에 항상 강단으로 뛰어올라 갑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설교자의 말씀을 향한 이런 열정적인 모습은 분명히 회중들의 마음 속에 깊숙이 각인될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설교를 듣고자 하는 기대감과 열망을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진정한 서론은 설교자가 강단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회중을 바라보면서 서론을 시작하라
설교자는 설교의 시작을 반드시 회중들 바라보면서 시작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기의 원고나 심지어는 성경책까지도 보지 말고 반드시 회중과 함께 설교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가 처음부터 원고를 바라보거나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본다면 회중들은 "오늘은 목사님이 우리에게 주실 분명한 말씀이 없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설교자를 바라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서론을 하는 동안 만큼은 가능한 대로 원고를 보지 않고 회중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비록 원고 전체를 다 외우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서론은 반드시 외워서 시작해야 한다.
나가는 말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설교에서 서론이 잘 되어지면 그 설교는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가장 부주의하게 그리고 무관심하게 준비되어지는 부분이 바로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설교의 본론, 즉 내용을 준비하는데 모든 열정과 관심을 쏟다가 막상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서론 또는 결론을 대충 마무리짓고 만다. 그래서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서론은 아주 주의 깊에 그리고 충분히 준비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 호에는 여러 가지 설교의 형태들에 대해서, 그리고 서론의 한 가지 방법론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