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신 예수
예수님이 모델이라는 사실은 맹목적인 모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저 앵무새나 원숭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단순하게 모방할 수도 없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소명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수님은 메시아, 구속자로서 오셨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또한 은사나 능력면에서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 되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초청하신다. "내가 …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이처럼 훈련의 목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릇 온전하게 된 자(제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40)고 선포하신다. 요한복음 13장 본문에서는 "보냄을받은 자(사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20절)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당신의 사자들(messagers)을 동일시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 사용하신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다루고자는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리더들을 훈련시킬 때 사용하신 방법으로, 이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 교육과는 다르다. 특히 '사도'라고 불리는 열두 제자들에 대한 훈련,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파송하신 그 주변의 '칠십 인'의 제자에 대하여 집중하고자 한다. 비록 성경에 분명하게 정의되고 설명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훈련 사역에 어떤 교육의 원칙이 적용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훈련이 요구하는 대가
짧았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는 데 자신의 힘과 시간의 상당 부분을 쏟으셨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초자연적 방법으로 그들에게 놀라운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부여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가끔 이런 상상에 빠지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이며, 훈련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훈련 기간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은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하여 훈련 기간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예수님 안에 두 성품이 연합된 것은 우리에게 신비로운 것이다.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 관한 진리를 삼켜버리도록 할 수 없다. 그분은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52). 성육신의 조건들은 그의 인성이 사람의 성장법에 따라 자라게 하였고, 거기에 훈련까지 포함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위 '감추어진'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준비하셨고 훈련을 받으셨다. 이것은 비록 인간 스승의 개입은 없었지만, 성경공부를 통해 충분히 이루어졌다. 12세의 소년이 성전의 선생들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을 통해(눅 2:46 이하) 보여준 것처럼, 이 성경공부를 통해 그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성숙하고 참신하게 자랐는지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 성경공부가 얼마나 정확하고 깊이가 있었는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이른바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여러 해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성경을 배웠다는 가정은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예수회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예수회 수도사들은 우리에게 한 교훈을 준다. 그들에게 훈련이란 큰 대가를 치루는 것이다. 그들의 훈련은 보통 12년 또는 15년 동안 지속된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온전하게 훈련 받은 자가 그 훈련을 통해 얻은 것을 유익하게 사용한다면, 비록 이삼십 년을 일한다 하더라도 훈련을 덜 받은 자가 50년을 일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의 교육은 진실로 훈련에 중심이 있었다. 이는 현대의 수많은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관념론자들에게 교육이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력을 단순히 해방시키는 것이며, 각자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시키고, 그의 품성을 성숙케 하며, 가능하다면 개인이 하길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육은 소크라테스의 그것과도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교육은 산파와 같아, 정신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로부터 정신을 해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이 이렇다. 각 사람은 자기 안에 이미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교육에 의해 마치 묻혀진 기억이 표면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교육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을 가져다 주시며, 아직 형태가 없거나 변형된 것으로부터 형태를 만들어 가셨다. 물론 우리는 비성경적인 이런 개념들이 부분적으로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거의 모든 오류가 한 부분의 진리는 가지고 있지 않지 않는가. 사실 교육에는 독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독재는 훈련생을 업신여기고, 부수고 짓밟으며, 그에게 낯선 내용을 강요하고, 억압적이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이 행해지도록 해왔다. 이때의 훈련이란 일종의 축소이며, 때로는 틀에 박힌 가혹한 규격화이다.
수세기 동안의 교육은 이러한 형태를 지녀왔으며, 우리가 그런 위험을 항상 피해 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사실 피교육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교육자의 유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육에는 이런 독재적인 것들이 전혀 없다. 예수님은 훈련생으로 하여금 자족하거나, 스스로 독립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게 하셨고, 외부적이고 강요된 법인 '타율성'에 의해 균형을 찾고자 하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으셨다. 훈련은 훈련생의 진정한 신분을 구축할 수 있다. 그것이 해방시키는 교육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훈련은 최소한 세가지의 계획에 따라 전개되었다. 먼저 지식을 주입시키셨고, 또 한편으로는 방법을 전달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도제이면서 동시에 학생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품성을 계발하셨다. 인격을 만들며, 그것을 견고케 하고, 정결케 하며,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인격 속에서 지식과 방법을 넘어선 지혜를 잉태시키셨다. 그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조건이 완전하거나 전혀 흠이 없는 온전한 자들을 택하지 않으셨다. 교육에는 인격의 도야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나 미래의 훈련생들은 이 사실로 인해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훈련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훈련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셨다. 모든 교육이 일정 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것은 기본이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사람의 마음에 영원이라는 것을 심었다(전 3:11). 하지만 이 영원도 우리 각자가 지적, 정서적, 영적 삶에서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훈련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법칙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훈련을 위해 시간을 헌신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실 때 우리보다는 덜 바쁘시다. 훈련의 첫 단계는 제자후보를 택하는 것이다.
준비된 제자 선택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실시되던 것과는 정반대로 행하셨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시대의 랍비(때론 예수님도 랍비라고 불리곤 했다)는 제자들에 의해 선택되었다(중세 때 대학의 스승도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제자들을 택하셨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예수님께서 이런 차이를 두신 것이 흥미롭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택하실 때 주도권을 가지신 것처럼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주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은채 그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당신을 따르라고 명하셨지만 그 배경을 살펴보면 동의가 있었다. 예수님은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하신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열성을 가지고 참여하지만, 그들의 타오르는 열정은 마치 짚불이 타듯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금방 식어버린다. 예수님은 비용을 계산하라고 말씀하시고(눅 14:28), 자기 부인이 필요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출발하는 자세를 요구하신다(눅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많은 제자들이 그를 떠날 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라고 물으셨다. 예수님께는 강제로 징집할 의도가 없으며 선동하지도 않고, 다만 제자들이 깊은 헌신의 자세로 참여하길 요구하셨다.
때로 우리는 피상적인 열정, 특히 갓 회심한 자들이 잠시 품는 그런 열정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장 빨리 싹이 나오는 것은 돌밭에 뿌려진 씨이다. 그것은 좋은 땅이 아니다. 신앙 여정의 초기 단계에서 보이는 열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실수임에 틀림없다. 많은 경우 이런 열정은 곧 식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예수님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디는 성숙된 참여를 요구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를 택하시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는 것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먼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의 첫 제자들은 세례 요한 모임 출신들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제자들 중 여러 명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결속력이 강한 관계였다는 것이다.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들,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어부 동업자들 등이 그 경우이다. 더군다나 성경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세베대의 아들들은 사실 예수와 사촌지간이다.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마리아의 동생이다. 그것은 예수님에서 자신의 가까운 인척 중에서도 제자들을 택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교부에 의하면, 다른 여러 제자들도 요셉의 가문 쪽으로 예수와 친척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택하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과 견고한 관계였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제자가 되는 영적 축복과 이런 인척 중에서 제자를 택한 자연적 관계 사이에 대응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관계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 안에서 주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 위에 있는 강물을 어느 정도 사용하듯이, 구속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가 이용된다. 그런데 사람이 갖는 마음의 태도란 창조주이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비록 신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것은 가족에게 임하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택한 자들은 모두 일하는 남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비록 일하지 않는 남성, 실업자를 비판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사실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매우 인상적으로,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제자들 사이의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열두 제자의 기질상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다. 세리 출신인 레위 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은 서로 정반대였다. 물론 과격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 혁명가로서의 열심당은 예수 시대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때의 항전주의자, 급진주의자, 헤즈볼라 당원(헤즈볼라는 열성가 또는 열심당원이라는 뜻에 근접하다)을 열심당원으로 볼 수 있다. 열심당원과 세리. 이 둘은 서로 부딪치기 쉬운 관계이다. 예수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제자들의 결합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으셨다. 사실 가장 큰 위험은 위험 부담을 저버리는 것일지 모른다.
설교와 생명의 언약
예수님의 훈련은 통합된 방법, 즉 다양한 측면들을 연결하는 매우 포괄적 이고 종합적이었다. 이를 통전적인 방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훈련 대상의 모든 면에 관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와 대부분의 문명(오늘날의 서양은 제외)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형태를 채택하셨다. 바로 공동생활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신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택하시되 목적이 그들이 자신과 함께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스승이 갖는 권위가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같은 방식을 취하도록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루 24시간 온종일을 공동 생활하는 방식이 훈련에 가져다주는 엄청난 이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천일 동안 밤낮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인생의 동반자처럼 함께 사시고, 공동생활의 환경을 만드시고 이를 유지하셨다. 그런 가운데에서 열두 제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게 행한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에 항변하기도 했다(베드로 "주여 그리 마옵소서", 도마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빌립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렇다고 보헤미안 생활 방식처럼 자유분방하거나, 무질서한 무정부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 조직화되었고, 위계질서도 있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의 사촌들, 사실 그들은 모두 사촌지간이었지만, 예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세족식에 관하여 이 사건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지나친 해석을 하는 설교들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설교들은 권위의 개념을 뒤집어서 선포했다. 권위는 섬김이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고, 계급과 지위를 무시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위의 효과는 그 행위가 예외적인 성격을 지닌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행위로 인해 제자들이 놀라며 더 나아가 충격을 받았다면, 평소 예수님께서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르셨다. 즉 제자는 스승에 대해 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자는 스승의 발을 씻긴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그때 그 역할을 뒤집으셨다면, 이는 비유를 행위로 주신 것이다. 몸의 비유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보기로 지도자의 겸손을 가르치신 것이다. 즉 지도자는 필요하다면 가장 낮은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권위를 행사한다는 의미는, 권위는 계속 존재하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섬기는 것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무언의 예언적 형식으로 그의 임박한 죽음, 십자가에서의 낮아짐을 전파한 것이다. 이 십자가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위계질서의 원칙을 뒤엎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각자에게 합당한 일들(식량 구입, 모인 무리들을 들에 조직적으로 앉히기 등)을 오늘날 학생들에게 실습의 기회로 주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어 그일을 하도록 했다. 이 중에는 세례도 있었다(요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제자들은 세례 요한에 의해 베풀어진 예비적 성격의 세례를 베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때까지 기독교 물세례를 제정하시지 않았기에, 이 점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행 19:3~5). 고린도에서도 사도 바울은 새신자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을 보조인에게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1:14~16).
이론 교육 역시 예수님의 교육 방식에서 빠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가르치셨다. 때로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특별한 설명은 제자들을 위해서 따로 남겨두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서는 기본적으로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열두 제자나 칠십 인을 위해서는 보다 직접적인 설명을 덧붙이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이론적인 교육을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설교를 통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에서는 설명을 하시고, 생각의 틀을 제시하시며, 제자들이 숙고할 수 있도록 지침을 제시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단지 비유로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논리적인 언어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신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요 16:25 참고). 예수님께서는 기억을 돕는 수법, 핵심 단어, 요약, 그리고 아마도 아랍어 또는 히브리어로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시적 형태 등을 이용하셨다. 그는 제자들이 소화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했다(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보다 항상 좀 더 멀리 가셨다. 성경 본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기대하면서 제자들을 끌어당기시지만 신중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실습'이라는 방법을 취하셨다. 열두 제자의 파송, 칠십 인의 파송 등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파송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도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대담함, 즉 연약한 사람들에게 거는 위험부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칠십 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들의 능력을 좀 넘어선 것이었다(눅 10:9 이전에는 귀신을 쫓으라는 명령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흥분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눅 10:18 이하). 그는 먼저 어둠의 세력에 대한 성공이 뜻하는 승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셨다("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곧 현실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주님의 순전한 은혜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실을 기억하자. 이것이 예수님께서 설교와 생명의 언약으로 어떻게 교육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인격에 새겨진 표시
예수님은 훈련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제자들이 배운 바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삶에 적용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에 주목하셨다. 제자들이 타성에 젖거나,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하셨다. 다시말해 필기 시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격을 형성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다. 때로 그는 역설을 이용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때로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열두 제자와 칠십 인들에게 유익한) 예수님의 비유는 이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이미지와 이야기는 논리적인 논증보다도 더욱 자연스럽게 주의를 끌고, 인격의 심층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수사학의 모든 자원을 활용하신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이해, 그들의 몸속에 새겨진 '실물'을 활용하셨다. 망대가 무너져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을 사람들이 언급하자,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상기시키는 기회로 삼으셨다. 한 과부가 성전에서 헌금함에 작은 동전을 넣는 것을 보시고는 헌금의 가치를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셨다. (아마도) 성전 건물 정면 위에 조각된 포도나무를 보셨을 때는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확언하는 기회로 삼았다. 주님은 이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삶 속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또한 훈련자이신 예수님은 과하게 말해 교육적 이중성을 갖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로 예수님은 경멸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를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셨다. 뱀같이 지혜롭도록(마 10:16) 권면하기도 하고, 심지어 창세기 3장 1절에 나오는 뱀의 성격을 나타내는 동일한 단어(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를 사용하셨다. 또한 때로는 가장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 앞에서 이방인을 멸시하는 교만한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셨다(마 15:23 이하). 예수님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된 모욕적 은유인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했고, 제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이어지는 사건인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날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가 배에서 나오도록 요구하셨다. 훈련자 예수님은 당장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으셨다. 그는 어떤 결정적인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것은 예수님은 원하시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훈련 과정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또 다른 교육 방법을 사용하셨다. 별명을 지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별명을 주실 때, 그는 하나의 교육수단으로 사용하심과 동시에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 안에 품고 계셨던 선한 뜻을 좇아, 사람의 앞날의 진리를 계시하셨다. 예수님께서 주신 훈련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 인해,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훈련자로서 자신을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길 원하는 모델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주님이 훈련하기 원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에 대해서 우리는 목자이지만, 대목자 아래에서 우리는 너희들과 더불어 양이다. 너희에 대해서 우리는 가르치는 자이지만, 유일하신 대스승 아래에서 우리는 그의 학교에서 너희와 동료 제자들이다.
- 앙리 블로쉐(Henri Blocher) - 미국 휘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