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1장 27절, 12장 13
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13 다윗이 나단에에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두려움이 무엇일까요?
요즘은 사진을 찍는 것이 많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스마트 폰 기능이 참 좋아졌죠. 정말 멋진 광경을 찍고자 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햇볕을 마주 대하고 사진을 찍으면 어떤 광경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햇볕 앞에서 다른 모든 모양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 서게 될 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떤 것도 그분의 빛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의 범죄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윗이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살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돈을 버는 방법의 하나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방식인데요. 인터넷 시대를 살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온라인'에서 주소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메인'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지역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이름을 가지고 등록을 하면 그 사람의 소유가 되지요.
그래서 생겨난 직업이 도메인 사냥꾼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 중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주소를 미리 선점하고는 필요한 사람에게 비싼 가격으로 되파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로저스 케이든 헤드입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후임 교황의 이름이 발표되기 전에 미리 [www. Benedict XVI.com]이라는 도메인을 사서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eBay)에서 또 다른 관련 도메인 [www.Pope BenedictXVI.com]의 가격이 16,000달러를 웃돌았습니다.
가톨릭교도인 그는 그 도메인을 팔려는 의도보다는 공짜로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그에게 원하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도메인을 넘기는 대가로 말이죠.
1. 교황이 쓰던 모자 하나
2. 바티칸 호텔에서의 자유 투숙권
3. 1987년 3월 셋째 주의 일에 대한 이유 불문한 완전 사면
과연 그에게 1987년 3월 셋째 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무슨 일이기에 이유를 불문하고 사면을 받고 싶었을까요?
사실 우리는 모두 떠올리기 싫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받고 싶은 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87년 3월 셋째 주의 일들이 우리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고 놓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방 어디에도 도망칠 구멍이 없습니다.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픈 기억을 자꾸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죄책감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책감이 다 똑같은 죄책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섭게 추궁하시는 죄책감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고,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죄책감은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죠. 이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용서함을 받은 자에게 일어나는 죄책감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떨고 있었던 죄책감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는 것이었죠. 그 두려움은 다윗을 파멸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으로 이끄는 복음의 사건이 됩니다.
사무엘 하 11장 27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어쩌면 다윗에게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지은 것이 1987년 3월 셋째 주의 어떤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죄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건이 그를 그렇게 괴롭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자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그의 죄는 무섭게 그를 따라 붙었습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둘 사이의 불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기 시작하자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없이 밧세바에게 음욕을 품었고 유부녀를 유혹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없이 음모를 꾸미고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없이 우리아가 없는 곳에서 밧세바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이 모든 사건에 하나님은 철저하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윗이 꾸민 대로 죄를 덮고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무섭게 죄를 추궁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추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 '아픔'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한다면 다윗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께서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무엘 하 12장 7~9절 말씀을 보세요.
"…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무섭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아니 무섭게 그의 죄에 대하여 추궁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죄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윗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수치를 아셨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 무서운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았던 죄가 하나님 앞에 직면하는 순간,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 하 12장 13절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오늘 이 사건이 복음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아직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전, 아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무엘 하 12장에 나오죠.
어느 날 나그네가 한 부자의 저택에 들르고 부자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잔치를 위해 쓸 양을 자신의 것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양을 훔쳐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잡아 잔치를 합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에게 양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양을 잡아먹었다는 것, 그것은 양을 많이 가진 자가 하나뿐인 양을 빼앗았다는 것.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그 부자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삼하 12:5~6)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단이 손을 들어 무섭게 지적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아를 죽이고 하나뿐인 아내를 갈취한 사람 말입니다.
그는 마땅히 죽임을 당할 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1987년 3월 셋째 주의 일을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을 때 두려웠지만, 무섭게 추궁을 당했지만, 용서하셨습니다.
복음은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삶의 기준이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또 다른 두려움
하나님을 접하기 전 아니,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분이 어떤 심판을 하실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무엘 하 9장에는 두려움으로 떠는 한 비참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 왕의 손자였고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사람 므비보셋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던 유모가 도망가다 떨어뜨려 두 발을 절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로드발이라는 황량한 곳에서 숨어 살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할아버지가 다윗 왕을 죽이려 했기에, 이제 정권이 바뀌게 되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말입니다.
그의 두려움이 큰 만큼이나 다윗의 은혜가 놀라웠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잘못과 멸망으로 말미암아 심판의 두려움이 있었으나 다윗은 은혜를 생각하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사무엘하 9장 1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은혜는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므비보셋에게 찾아왔습니다. 로드발은 황량한 곳이었고, 두 발을 절고 있는 므비보셋에게는 더는 추락할 수 없는 나락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그에게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윗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무엘하 9장 11절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다윗 왕과 같이 앉은 식탁에서 식탁보가 므비보셋의 수치를 가려주었습니다. 이제 아들을 삼아 준 아버지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찬양이 생각나네요.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 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이제 우리에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우리를 떨게 했던 두려움을 향해 담대하게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과 신분을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겨놓고 싸운다!"
죄를 직면한다는 것은 분명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지지 않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피하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이에게 찾아옵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가 '야곱'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맘에 걸리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야곱은 사기꾼입니다. 형을 속였고,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인 몹시 나쁜 사람입니다. 그가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갔고, 거기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얻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산을 늘리려고 장인을 속여 좋은 가축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도망간 인물입니다.
그는 참 비열한 인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얍복강가에서 말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결국 인과응보의 위기를 맞게 되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형을 만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본래부터 싸움에 능했던 형을 만난다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건 일일지 모르죠.
야곱은 끝까지 비열합니다. 자신의 가족과 가축을 먼저 형에게 보내고 자신은 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곳에서 문제 가운데 도망한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싸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의 그는 문제를 피해 도망 다니고, 문제를 이기려고 사기를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얍복'은 '씨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문제 가운데 씨름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과거와 실수 때문에 문제에 직면했던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맞서 씨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에 맞서 씨름하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다시 사용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죄를 짓고 괴로워하던 때, 그는 침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과 대면하여 씨름합니다.
삼손도 나실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한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사명을 잊고 머리카락이 잘려 비참함 가운데 있을 때, 씨름하며 마지막 수치를 회복합니다.
엘리야도 그의 성공적 사역 다음에 찾아오는 낙심 가운데 광야에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힘을 얻고 다시 사역지로 돌아갑니다.
베드로 역시 닭이 울 기전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수치 속에서 눈물을 흘렸고, 다시 주님을 만나 사역지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늘 어두운 과거의 경험과 죄는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도망칠 것인가, 씨름할 것인가?"
도망을 간다는 것은 당장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할지 모릅니다. 아니 문제를 잊어버렸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우리를 늘 괴롭히게 되어있습니다.
씨름한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수치를 다시 들여다본다는 것이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씨름하며 하나님을 붙들 때, 훤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씨름하고 나서 그의 형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희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씨름하며 입은 상처로 다리를 절면서 가야 했습니다. 다리를 디딜 때마다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절망의 고통이 아니라, 문제를 맞서서 이긴 통쾌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고통이 다 같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 고통을 느끼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명백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의롭게 살아가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지금의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해결해야 하는 것은 해결해야 합니다.
고난은 '의'와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의를 드러내는 아주 강력한 도구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할 때 두려움은 더는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을 가져다주죠.
두려움이 무엇인가요?
결혼하지 못한 미혼남녀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내 삶에 최선일까?'
왜 이런 두려움이 올까요? 최선의 것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험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 시험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것으로 인생이 끝이 난다면 그 죄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죄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죄 때문에 찾아오는 두려움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경험한 두려움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왜 실패할 때마다 그렇게 두려워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2장 13절을 보세요.
"다윗이 나단에에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떨었으나, 이제 그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는 그의 죄로 말미암아 죄를 가슴에 품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이 축복이라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될 것이고 찬송이 될 것입니다.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은 극복되고 이겨야 할 대상입니다. 두려움은 결코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죄를 이기는 래디컬한 복음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죄를 직면할 때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한 일은 우리가 무시하거나 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갈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능력의 칼을 뽑지 않았을 뿐입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휘두를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