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 1-4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권력이라는 우상
어느 순간에 율법이 우리의 권력을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변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율법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누군가를 콘트롤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라는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아주 좋은 신앙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요?
율법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은 내적인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스팩'이 아닐까요?
그 사람이 지금 가진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지위를 보면서 판단하려는 것 말입니다.
복음은 이 모든 율법의 우상을 깨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이 우상이 깨어지지 않으면 은혜를 적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베드로가 막 배가 고플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먹을 것을 보니까 그가 살아왔던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참 신기한 것은 율법의 우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잡아먹으라!" 하시지만 베드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왔던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고 하는 데도 말입니다. 세 번이나 이 과정을 반복한 후에 베드로가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더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면 먹을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법이 그 안에 작용하기 시작할 때, 더는 율법에 메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고넬료와 베드로 사이에 진정한 만남이 일어나게 됩니다.
율법의 잣대로 그 사람을 차별하거나, 의심하거나, 편견으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순종하기로 했을 때, 하나님의 역사의 획을 긋게 됩니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 .
새로운 만남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처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인간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대본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셨는데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대본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안 나와요. 우리 메시아는 낙오자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고, 규율을 어기지도 않고, 우리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우리 종교에 위협을 가하지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도 않아요. 메시아는 자신의 명예를 경시하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그렇게 자주 드나들지도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메시아는 이렇게 해요.'라고 대답하셨다. 기독교를 왜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지 아는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회를 부여해 주고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에서)
나의 잣대는 권력이다!
사실 우리가 권력을 휘두르려는 이유는 좀 쉽게 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아니 내 맘대로 하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8절)
사실 이 명령만 아니면 우리는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잣대로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들, 더러운 사람들, 나와 같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어울리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 대한 충분한 나의 우월한 지위를 누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우리의 잣대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 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심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 거하셔야 하는 그분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로 구분하지 않으시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차별'이 아니라 '포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사명을 다 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유대인이고 선민으로 살아가면 죄인들을 차별할 수 있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에 보면,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인종 차별은 같은 민족이었음에도,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사마리아인을 차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꾸짖으셨지만,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빌립보서 2장 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권력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종종 마음이 상하는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마음 상할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마음 상하는 경우도 일반 성도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장로님들과의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장로님들은 함께 교회 일을 의논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 상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원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이고요.
가만히 보면 이러한 문제의 내면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나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을 가장 실망하게 하고 화가 나는 경우는 나에 대한 통제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장 화가 나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부모의 말이 늘 옳으므로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하여 화가 나나요?
아니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식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에 화가 나나요?
다른 누구에 대한 나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것, 그리고 과시하려는 것 역시 우리 속에 자리 잡은 하나의 우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야망'은 흔히 다른 사람보다 더 눈에 띄거나 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 안에 담긴 경쟁적인 요소가 나쁘다는 말입니다. 춤을 잘 추거나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더없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춤을 더 잘 추거나 더 근사해 보이는 것이 주된 바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만큼 춤을 잘 추거나 우리만큼 근사해 보이는 순간 모든 게 시시해진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이 최종적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늘 '비교우위'입니다.
강력한 지도자가 되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로' 강력한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 멋진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 늘 '최고로' 좋은 목사로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로' 좋은 목사가 되려는 것. 이 모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선하게 노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끊임없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하므로 늘 누군가 내 아래 있어야 만족하고 나보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축복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비방해야 속이 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권력이라는 우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아왔습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력이 우상화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실패를 회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다툼은 서로 질 수 없어서 일어납니다. 부부싸움의 이유도 서로 지지 않고 서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죠. 실패를 인정하지 않거나,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간들은 별별 수단을 다 쓰기 시작합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권력을 숭상하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더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사역에서 그런 것을 꿈꿨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완벽한 사도가 되어 사역을 감당하는 것, 누구에게도 단점을 보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의 단점이 완전해지지 않았고, 육신의 가시를 제거하지 못해 불안해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이제는 강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함과 이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권력이 우상 아래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교정을 거부'할 때, 위험을 직감해야 합니다.
권력숭배라는 암이 우리 몸과 마음에 퍼지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에게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늘 자신의 방법과 생각이기 때문이죠.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보세요. 그가 예언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들으려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기로 합니다.
잠언 15장 12절은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권력의 우상에서 안식으로…
오늘 본문은 어쩌면 베드로와 하나님 사이의 힘겨루기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 말입니다. 그에게 참 버겁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순종하며, 자신의 율법적 권리를 내려놓자 평안함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이 말씀이 우리 가슴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누릴 우월한 지위를 다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으로 누군가에 대하여 비난하고 수군거릴 수 있는 사건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힘을 가지면 평안하리라 생각하지만, 권력을 가지려는 욕구가 우리를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지를 압니다.
감리교단의 부끄러운 일이지만 6년째 감독 회장 선거를 놓고 싸우고 있습니다. 선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리고 교단의 개혁을 위하여" 자신이 감독 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돼도 시비를 걸고 재판을 합니다.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됩니다.
제가 페북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당신들의 권력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내려놓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다. '누구를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권력을 가지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권력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권력의 우상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윗은 시편 91편 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우리가 누리는 안식은 전능자의 그늘에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고대 사람들은 하루를 생각하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일출이 아니라 일몰과 더불어 하루가 시작됩니다. 창세기에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창 1:19)라고 말씀합니다.
참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루의 시작은 우리의 행동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식할 때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도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한낮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불안함을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가장 무력한 것 같으나 가장 강력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면 무기력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엄습하는 불안함이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함이 아닐까요? 권력이라는 문제는 또한 우리가 의지하기 원하는 '돈'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다."라는 말과 "은행에 돈이 없다."라는 말 중에 어느 쪽이 더 근심을 불러옵니까?
우리는 돈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돈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헛된 기대를 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돈을 벌면 안정적일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지금 버는 돈보다 많으면…."
잠언 18장 11절 말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여기느니라"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여길 뿐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욕구라는 것은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한 가지 말입니다.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새로운 직장'
'새집'
'새로운 애인'
결코, 얻어서 채워지거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욕망을 깨닫는 것이 어쩌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삶에서 돈이 주는 안정감이란,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을까 보다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인생에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부분이 돈에 대한 환상을 가장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좀 많아지고 풍족해지면 베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하는 상상 중에 하나가 '로또'에 당첨됐을 때 사용하려는 생각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은 최근에 실시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저소득층이 자기 수입에서 기부하는 비율이 부자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그렇습니다. 가진 게 많을수록 후하게 베풀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성경에서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리입니다(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돈' 때문이 아니라 그가 붙잡는 돈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삶에서 잃어버린 평안과 행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많이 슬프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그분의 목적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궁극적인 문제는 그가 부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제는 그가 자신의 부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그가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 대신 돈을 자기의 원동력으로 믿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또 그는 자신이 돈 대신 정말로 믿었어야 할 대상이 주는 안정감과 만족과 자유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주 래디컬한 복음의 문제입니다.
"의지의 대상을 바꾸어라!"
말씀에 순종하면 자유함의 은혜를 누려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exiting 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가 아주 radical 하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참 멋진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