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
김 성일 목사(빅토빌예수마음교회 담임목사)
일부러 계획한 일정이 아니더라도 우연하게도 뜻밖의 기회가 주어지고 전혀 알지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황의 현장을 방문하여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급하게 잡혀진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미주 한인 이민역사의 중요한 도시인 중가주의 리들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여행 출발 첫날 관광가이드하시는 분의 요세미티 방문 후 돌아오는 길에 리들리를 방문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에 생소한 지명인 중가주의 리들리(Reedley)지역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당일 그 현장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활동 역사를 들으며 어떻게 아직도 이런 역사를 모르고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기록으로 알게 된 것은 리들리시는 미주한인이민역사에서 중요한 장이며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이민 선조들의 첫 정착지였으며 해외 독립자금 조성의 중심지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날 방문한 리들리시에는 1897년 한국에 세워진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14피트(4.26미터) 높이의 리들리 “독립문”을 비롯하여 한인 유적지가 3곳이 있었습니다. 2010년 11월 13일 제막식을 한 리들리의 독립문과 수많은 이민 선조들이 잠들어있는 공원묘지와 이민 선조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리들리교회였습니다.
리들리에 있는 공원묘지에는 이곳 주민들과 함께 많은 이민 선조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글로 묘비명이 기록된 것이 신기하기도 하기도 하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옛날식 한글 표기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당당하게 대한인이라고 기록된 묘비의 글을 보며 나라를 빼앗겼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묘비에 새긴 그 글들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함께 찡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이민 선조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옛 Reedley 한인교회였습니다. 한인이민자들이 주로 농사를 지으며 리들리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힘써 지원한 활동 상황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이 한인교회는 1919년 2월 한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38년 당시 리들리 지역 한인 가정이 11호이고 교인수가 5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형제상회의 김호, 김형순의 기부로 지금의 위치인 1408 J. Street에 부지를 제공하였고, 1939년 교인들이 특별 기부금(지금의 건축헌금)을 내어 건물을 신축, 3월 1일 헌당식을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바로 앞 공터는 김형순이 갈 곳 없는 노인과 노동자, 한인 유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주기 위해 건립했던 한인노동자 기숙사 및 양로원이 있던 자리라고 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타계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며 그 후손들은 LA 등 대도시로 이주하며 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어 리들리한인교회는 1978년에 멕시코계 교회에 팔려 지금까지 히스패닉 교회가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멕시칸 교회가 사용하고 있지만 이 리들리 한인교회가 내년이면 100주년이 됩니다. 교회 뒤쪽의 낡은 창고와 사택이 눈에 띄었고,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에 감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잘 먹지도 않는 감을 아마도 그 옛날 이민 선조가 심었을 것입니다. 멀고 먼 고국을 생각하며 리들리 그 어디쯤 이었을 넓고 넓은 농장에서 생산된 싱싱한 야채와 과일들을 엘에이로 싣고와서 판매를 했고 아마도 지금의 엘에이 다운타운 어디에 이런 야채들을 도매로 넘기는 새벽시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꽃 도매시장이 있고, 생선 도매시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지금도 이런 새벽 야채 도매시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야채와 생선들을 중간 상인들이 넓고 넓은 엘에이 주변 식당들로 배달을 할 것입니다. 그 당시 김형제상회(Kim Brother Co.)의 김 씨 형제들의 수입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는데 이런 부를 조국의 독립운동에 얼마나 많이 지원했는지 가히 짐작이 됩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리들리시를 방문하여 역사의 외침을 들어보시기를 강추합니다.
1900년대 초 어렵게 미국으로 오게 된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언어소통도 쉽지 않고 환경적으로 그 힘들고 고달픈 여정 속에서도 고국을 생각하며 정신적 영향과 물질적 지원 그리고 신앙의 기도를 통한 영적 후원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상태였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평생을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발자취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미국의 현재가 있게 되었으며 현재의 내가 자유롭게 이 미국 땅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1월은 추수감사절과 함께 감사의 계절입니다. 요즘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일본의 잔재의 흔적이 있다고 하여 고맙습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신앙의 선조들의 수고와 인내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현재에 이른 것처럼 착각하면서도 살기도 하지만 실상은 수많은 빚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에게와 우리가 전쟁의 위험 속에 처해있었을 때 자신들의 젊음을 아낌없이 던져준 우방 국가들에게 지고 현재의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마음 깊이 할 수 있는 말은 고맙습니다라는 말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