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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부활해야 할 4가지
누가복음 24장 36-43절
< 부활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하고 대단하게 보이지만 그들도 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게 생긴 것은 다 신령한 줄 압니다. 나무나 돌이 조금만 이상하게 생겨도 절을 합니다. 사람도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면 더 신령한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조상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 모습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잘 나타내줍니다.
어떤 흉악한 사형수는 사형을 받으러 가다가 발을 헛디디자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어이쿠! 놀래서 죽는 줄 알았네!" 이 세상에 강철 영혼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진리는 다가오지 않고 자신이 약한 줄 알아야 진리는 다가옵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 믿음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다락방 문을 꼭 잠그고 극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36절). 부활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부활의 믿음을 얻습니까? 부활의 믿음을 얻으려면 그 전에 십자가를 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가치도 없고 진짜 부활도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을 망치는 유혹입니다. 마찬가지로 헌신과 섬김이 없이 영성이 깊어지고 능력이 생기고 영안이 열린다는 것도 영혼을 망치려는 사단의 간계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교회는 놔두고 월요일에 큐티 집회를 가고, 화요일에 영성 집회를 가고, 수요일에 간증 집회를 가고, 목요일에 찬양 집회를 가고, 금요일에 평신도 성경대학에 가고, 토요일에 기도 세미나에 갑니다. 그러면 영안이 열리고 영성이 깊어질까요? 그렇게 집회에 많이 참석해도 섬기는 교회에서 새벽기도 한 번 안 하고 걸레질이나 설거지 한 번 안 하면 영성이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영성과 능력과 평안이 없습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욕심과 질투와 불안과 짜증만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먼저 수고의 짐을 기쁘게 지려고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만 확고하면 부활의 믿음도 얻게 되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누구도 그의 평안을 빼앗지 못합니다.
둘째,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실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군요!"라고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합니다(37절). 그 모습을 보고 "믿음도 없는 못난 제자들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한때는 다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다윗도 두려워서 미친 척 쇼를 벌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일본 형사가 닥치자 처음에는 도망가려고 몸을 숨기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이 완벽한 존재였다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더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은 누구나 약하기에 남보고 "믿음도 없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이 없으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사람이 믿음을 잃고 낙심에 빠지면 판단력을 잃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조금만 어려움에 빠지면 믿음을 잃고 낙심에 빠져 탄식합니다. "나는 안 돼!" 왜 안 됩니까?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실패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소심함과 두려움과 불신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찬란한 꿈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보고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분별력을 잃지 마십시오. 그처럼 불안과 두려움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부활을 확신시키려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38-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상심한 제자들의 착시 현상으로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며 손과 발을 보여주셔도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겼습니다(41절). 그래서 주님은 먹을 것을 찾으셨고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그들 앞에서 그 생선을 잡수셨습니다(42-43절).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란 실물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거짓은 대개 드러납니다. 머리 좋은 정치인의 보좌관들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은밀하게 받은 돈 가방도 몇 년 후에 그 사실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십시오. 완전범죄를 꾸몄던 IQ 150이상의 머리 좋은 닉슨의 보좌관들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란 대 사건을 IQ가 두 자릿수일 것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담합해 거짓으로 꾸몄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일전에 병원에 가서 수면 내시경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잠이 들까? 이대로 완전히 잠드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교회와 가족은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곧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2시간 후에 정확히 수면에서 깨어났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수면 내시경을 끝낸 후에 다시 깨어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 삶에서 부활시켜야 할 것 >
주님은 2천 년 전에 확실히 부활했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언젠가 그 부활의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부활도 있고 미래의 부활도 있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서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현재 삶에서 무엇이 부활해야 할까요?
1. 믿음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과 성공도 필요하고 자녀교육도 필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성공해도 결국 불행해집니다. 얼마 전만 해도 강남 재건축 분양권 따려고 몇 십 대 일의 경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외면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으로 얻는 세상 집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천국 집입니다.
때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부활의 믿음이 있으면 뒤집기의 명수가 되어 실패를 성공으로 뒤집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부활시킵니까? 열린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마음 문을 닫고 "어디 한번 은혜를 끼쳐 보라!"고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은혜는 사모하는 자가 받습니다.
초대 교회 때 믿음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십자가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그 끔찍한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는가?" 당시 십자가는 중죄인을 발가벗겨서 매달아 놓고 처형하는 도구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 안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구약의 수많은 제사법과 예언 등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플랜이자 사랑의 실체를 가르쳐주려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말이 아닌 자기희생의 정도로 가늠됩니다. 상대를 의인으로 만들려고 내가 죄인이 되고 상대를 빛나게 하려고 내가 바보처럼 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소멸시키는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면 어디선가 반드시 부활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2. 첫 사랑
마가복음 16장 7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도망간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사람이냐! 어려울 때 다 도망가느냐? 그렇게 믿음도 없었느냐?"고 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첫 사랑을 나누고 거룩한 새 나라의 비전을 주신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첫 사랑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일어서란 뜻입니다.
제가 처음 인천에서 분당으로 이사와 월세 집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상황은 암담했습니다. 통장은 바닥났고 살던 집은 조만간 비워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 기독교 선교연맹의 배경이 전혀 없었기에 배경이 있는 목회자들이 부러웠지만 지나고 보니까 배경이 없었기에 첫 사랑은 더욱 깊었습니다.
그처럼 오래 기억될 첫 사랑을 가지려면 사랑의 기회를 잘 포착하십시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리아는 결혼비용으로 쓰려고 푼푼이 모은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냥 향유만 부어도 될 텐데 왜 굳이 옥합까지 깨뜨렸습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헌신의 기회를 잘 포착했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아름다운 얘기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파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값비싼 향품과 향유를 드려 장사를 지냈습니다. 비슷한 것을 드렸지만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드렸으면 얼마나 그 드림의 의미가 더 컸겠습니까? 같은 물질을 드려도 필요할 때 드리면 넉넉할 때 드리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고 주님께 오래 기억됩니다.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잘 잡으십시오. 필요할 때 헌신하면 첫 사랑의 추억이 생깁니다. 그 첫 사랑의 추억이 영혼과 신앙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소중한 기초석이 됩니다.
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이 침체해지고 소망이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첫 사랑의 기억이 믿음과 소망을 회복시키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을 펼칠 기회를 잘 포착해서 사랑의 헌신을 하면 깊은 첫 사랑이 생기고 그 사랑이 그의 영혼과 믿음을 오래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3. 인간성
살다 보면 어떤 때는 자기로부터 아주 못 된 인간성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자책이 됩니까? 왜 사람의 인간성이 침몰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리고 나누고 섬기는 '드나베의 삶'의 훈련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공짜지만 구원 받은 인생은 공짜 인생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룻이 보여준 사랑과 땀과 헌신을 외면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믿음으로!"라고 큰소리만 치면 얼마나 하나님도 싫겠습니까?
어느 날, 한 청년이 필리핀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고 선교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표만 달랑 사서 예고도 없이 그 필리핀 선교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님은 그 믿음이 뜨거운(?) 형제를 돌보느라고 상당히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로 나가길 원하면 여러 훈련 과정을 거쳐서 잘 준비하고 나가야지 그렇게 맘대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남의 짐을 져주려고 하지 않고 남에게 짐을 지우고 폐를 끼치면서 혼자 믿음이 좋은 줄 아는 무임승차 인생이 되면 안 됩니다.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습니다. 거저 받을 수 있어도 대가를 치르려는 삶이 복된 삶이고 더 나아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표현을 힘써 하는 삶이 품위 있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그의 믿음은 대가를 치를 줄 아는 품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헷 지역에서 죽었습니다(창 23장). 매장지가 필요할 때 아브라함을 존경했던 헷 족속이 가장 좋은 묘실을 맘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과 은혜가 감사했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을 그냥 받지 않고 대가를 치렀습니다. 땅 주인인 에브론이 거듭 안 받겠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거듭 주었습니다. 얼마나 품위가 넘치는 믿음입니까? 그래서 믿지 않는 헷 족속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경외심을 표했습니다.
거저 받을 수 있어도 대가를 치르고 받으면 품위도 생기고 품격도 높아집니다. 이제 복된 성도로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최소한만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구원의 은혜를 비롯해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적선하듯이 최소한의 것만 드리려고 하지 말고 몸과 마음 전체를 드리십시오. 비록 일부만 드려도 전체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릴 때 대가를 치를 줄 아는 품격 높은 삶과 인간성이 부활될 것입니다.
4. 선교하는 삶
살면서 가장 잘 사는 비결은 죽음을 잘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까?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 당 평균 거주면적이 9평인데 한 사람 당 묘지 평수는 20평이었습니다. 무덤을 크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새 비싼 수의는 밍크코트만큼 비쌉니다. 그러나 그런 준비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은 이 땅에서 주님 뜻대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고 얼마나 성공했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장 복된 삶은 거룩한 선교와 나눔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내일의 주인공과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3분의 1을 쓸 만큼 똑똑했고 가문과 학력도 좋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감옥도 수시로 드나들었고 결혼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을 고난 중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복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활의 증인으로서 선교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왜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까? 부활의 증인으로서 선교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먼저 보이셨을까요? 여자가 입이 빠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남자들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목격해도 "그래요?"라고 한 후에 그 다음이 없어서 그 소식의 전파 속도가 느리지만 여자들 입을 통하면 그런 소식들이 훨씬 빨리 전파됩니다. 그처럼 부활의 소식을 빨리 힘써 전하는 것을 성도의 제일 사명으로 여기십시오. 이제 삶과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할 충분조건을 다 가진 줄 알고 나머지 인생을 부활의 증인으로서 열심히 선교하며 사십시오.
< 선교와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희망을 품고 물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가장 마지막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나라의 독립만 생각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고 땅 끝까지 선교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 성령 충만해야 합니까? 죄를 이기고 상처를 씻고 항상 은혜 가운데 살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해야 하지만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선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전방으로 떠나는 선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꼭 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복된 꿈은 바로 선교의 꿈입니다. 내가 보내는 물질이 선교지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애쓰는 선교사님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합니까?
재물은 잠깐 왔다가 날아가는 철새와 같습니다. 때가 되어도 그것들을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지 않으면 자신과 함께 오래 있으면서도 고통을 주고 결국 자신을 떠날 때도 고통을 줍니다. 그처럼 세상적인 성취 다음에는 공허함과 방탕함과 가정의 불행과 건강의 상실과 같은 새로운 고통이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꿈을 가지고 헌신하면 늘 행복과 보람이 넘치게 되고 어둠의 세력이 틈타지 못하고 불의와 방탕과 공허와 음란과 욕심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선교와 나눔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사십시오.
가끔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을 보면 대부분 겉으로는 웃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고난의 그림자를 읽으면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저의 선교연맹에서는 인근 국가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집회 및 회의를 하는 필드 포럼(Field forum)이란 모임이 있습니다. 그 집회에서 일주일 내내 우는 선교사님 사모님들도 많습니다. 그 눈물은 선교지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로 인한 '서러움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처가 씻어지는 '은혜의 눈물'입니다.
예전에 한 몽골 선교사님 사모님도 필드 포럼에서 일주일 내내 울었습니다. 몽고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말을 때리듯이 손으로 세차게 사람을 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동네 시장에 갈 때 종종 맞는 수치를 체험했습니다. 행색이 초라하니까 물건을 훔쳐갈 줄 알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때린 것입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는 삶이 바로 선교사의 삶입니다.
환경이 열악한 나라로 여행하면 특급 호텔에서 머물러도 며칠 이상 지내기 힘듭니다. 그런데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시설도 열악한 곳에서 몇 년을 지낸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정말 사명과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선교사 자녀들은 문화 충격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일전에 한 선교사님은 너무 먹고 싶어서 고등어자반 몇 팩을 사서 보내달라고 어렵게 부탁했습니다. 그처럼 선교사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에 후방의 성도들은 전방의 선교사님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130년 전 흑암 중에 살던 우리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선교사가 찾아와 복음과 사랑을 전함으로 희망의 빛이 비춰지면서 우리나라는 지금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랑의 빚을 갚고 어둠으로 신음하는 곳에 희망을 주려고 우리도 마땅히 선교하러 나가야 하지만 다 갈 수 없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선교사님들이 선교지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희망을 전하려는 선교사님에게 후방에서 기도와 물질을 드림으로 희망이 되어주시고 간혹 선교사님을 뵙게 되면 손 한번 꼭 붙잡아주시고 힘써 격려해주십시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선교의 명령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의 최대 목표가 선교라면 선교하는 사람은 가장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서라면 물질과 시간과 땀을 아끼지 마십시오. 인생은 짧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곧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도록 선교와 나눔의 꿈을 부활시키고 선교와 나눔에 대해서는 늘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힘써 동참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