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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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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조선에는 2만 명이 넘는 한센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환영하는 이 없는 그들을 포사잇과 윌슨, 서서평 같은 선교사들이 돌보았습니다. 특히 서서평 선교사는 간호학을 전공하고 32세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독일에 태어나 갓 1살 된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어머니로 불행한 시절을 보낸 분이었습니다. 서 선교사는 고아 13명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고 38명의 홀로된 여인을 거두며, 한센인 요셉을 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습니다.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를 하고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뻔한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 이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3년 6월, 일본 총독부가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펼 때 동역자들과 함께 50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했고,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 530여명이 이 행진에 동참해 결국 총독부의 두 손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웠고 이일학교를 세워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나섰습니다. 여학생들의 자활능력을 기르기 위해 수예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고, 1923년 조선간호협회 결성했습니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고, 조선 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습니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54세의 나이로 천국에 갔습니다. 서 선교사가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고 합니다. 한 장의 담요도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누었고, 시신도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가 죽자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섬김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