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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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은혜와 평강의 축복.
"(빌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한 아들이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가 그 집에 가보니 그의 어머니가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동네 분들이 아들을 욕하면서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큰 편지 뭉치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열어 보니 편지마다에 큰 액수의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수표가 뭔지를 모르고 굶어죽은 것입니다. 미련하지요? 예, 정말 바보같이 미련합니다. 그런데 그게 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잊고 사는 우리 모두의 미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셨듯이 자기들을 도우시면 절대로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게 하셨을 뿐 아니라, 광야에서 매일 만나로 먹이셨으며,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보살피셨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 어디에서나 그들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을 늘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해 주시고 돌봐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치매현상은 심각한 중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온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누구보다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그것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철학자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세기전 내가 아직 어렸을 때에, 나이 드신 어른들이 러시아를 휩쓴 그 큰 재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만약 6천만 명에 달하는 우리 민족을 삼켜버린 그 파괴적인 공산혁명의 주원인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때 그분들이 말한 것과 똑같은 말로밖에는 더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곧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에게는 이 슬픈 역사를 끊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만은 이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돌려야할 경배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시키려고 주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이 인사말은 모든 서신에서 단어 하나 틀림없이 거의 같은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같은 축복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민 6:23-26). 구약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지키실지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어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지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의 빛을 들어 네게 평강을 주실지어다"라는 형식이고, 신약에서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와 선하신 뜻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진 평강의 열매들입니다. 모든 축복의 시초이며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이외에 다른 은혜와 평강은 없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했습니다. 이점에서 유의할 단어가 '그리스도로부터'의 '~로부터(ajpov)'입니다. 이 낱말은 '~에서', (가까이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장소, 시간, 관계의 여러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서', 복합어에서 항상 '분리', '출발', '중지', '완성', '역전'을 나타냅니다. '~에서 떨어져' a)분리의 의미로 b)재료, 혹은 기원의 의미로 c)원인 혹 결과의 의미로 쓰이는 비교적 복잡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나 비록 복잡하지만 제게는 묵상을 거듭할수록 신비롭고 은혜가 넘치는 단어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볼수록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이토록 신비롭도록 성경 전체의 내용에 맞도록 짜여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어의 의미들을 퍼즐을 즐기듯이 제가 받은 은혜와 평강의 의미에 부합하도록 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은혜와 평강의 기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분리되어 멀리 떨어지게 되어 죄는 중지되고 은혜가 넘치는 새로운 삶으로의 출발을 시작해서 완성을 향해 달리는 역전의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리한 해석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만하면 제가 이 낱말에 감추인 보화 같은 진리를 조금은 캐내었다고 자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동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저는 여기서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아주 작은 단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 단어 하나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농축시켜 담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하심을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재미에 빠져서 요즘 들어 밤에도 또 새벽에도 수없이 잠을 설치곤 한답니다. 눈이 아파서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이 은혜 때문에 중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울의 모든 서신들만이라도 훑어볼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떼를 쓰고도 싶지만 욕심인 것 같아 그 모든 것 다 하나님의 뜻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여하튼 본문 2절은 하나님의 영적 축복의 질서이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정적 선언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축복들을 교회에 전하며 주는 오직 하나뿐인 생명의 통로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은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씨를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그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기 전에 즉 약속과 할례와 믿음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몸소 찾아오셔서 은혜 가운데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시고 영원한 언약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실력이나 조건이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고 사소한 일에까지 자신과 동행하도록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애굽의 노예에서 이스라엘을 무조건 대가없이 건져내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사실을 모세는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15:13)"라 증언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인물 노아, 다윗, 솔로몬, 엘리야, 모세와 바울이나 베드로 선지자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부름의 은혜가 없이 하나님께 나아 온 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부르셔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손수 찾아오셔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여셨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하나님을 비웃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인간은 한 번도 하나님을 기다리거나 찾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 우리를 잡으러 쫓아다니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먼저 은혜 가운데 여러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배우자일 수도 있고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이 은혜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평강뿐만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과 기쁨도 함께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임재를 느끼게 하실 것이며 부활의 산 소망도 함께 심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의 축복의 말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인사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인사말이 거의 모든 서신서에 글자 한자 틀림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형식적인 것으로 흘려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또 감격함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 2절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사용했던 인사말이 "안녕하십니까?"였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요즘 들어 그 인사말이 더 가슴에 와 닫는 이유는 왜 일까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자고새면 천재지변에 사건사고가 밤새 안녕한지 모를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인사말은 그 시대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로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은 형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이 시대에 진정 중요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우리의 생사와 직결되는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편지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는 낱말입니다. '은혜'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멸망 받아 마땅함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평강'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고 또 앞으로 누릴 축복의 내용들은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받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이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된 삶의 조화와 거룩 그리고 은혜로부터 오는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앙숙관계에서 화해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과 영광이 보장된 관계로 되었기에 '평강'입니다. 우리가 만든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거나 치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므로 준비할 것도, 또 요구할 것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인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회복입니다. 비록 우리가 성도라도 어떤 실패로 인해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은혜와 평강을 기억하는 한 평강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콜콜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 은혜와 평강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은혜와 평강뿐입니다. 그것은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또 그리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을 능력도 힘도 자격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악과 선 중 택일하라면 택하는 쪽은 예외 없이 악이요 어둠입니다. 구약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신약의 12제자들이 그것을 실증해 주고 있습니다. 12 제자들조차도 예수를 믿지도 않았고, 그가 자기들에게 생명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살아생전에 한다는 짓이 감투 가지고 싸움질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믿은 것입니까? 예수가 죽고 부활하고 성령을 받은 다음부터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믿게 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빛을 보게 했고 죽음에서 멀리 달아나게 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종에서 자유케 했고 장님 된 우리를 치유했습니다. 내가 잘나서 예수를 선택한 것도, 믿은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이들 말로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름철 밤에 모닥불을 피워 보셨습니까?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불나비들이 날아들어 계속 타죽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타죽으면서도 계속 날아듭니다. 왜냐하면 밝은 쪽으로 근육이 수축이 돼서 저절로 불쪽으로 방향이 잡힌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은 누구도 예외 없이 어두움 쪽으로 근육이 수축이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 쪽으로 숨습니다. 빛이 오면 절대로 빛 쪽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빛 쪽으로 나오는 것은 성도된 우리만의 특권입니다. 생명의 길은 우리만이 압니다. 세상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만이 한 생명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세상의 이정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만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한 것도 아니고 잘나서 된 것도 아닙니다. 와보니 빛이었습니다. 마치 아기가 자기가 원해서 출생한 것이 아니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중생했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요구한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원하여 죽게 하심으로 얻어진 평강입니다. 그래서 선물이고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죽어 주심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나의 빛이요 나의 생명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하는 기적이 우리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는 누구와 화평했습니까? 세상과 화평했습니다. 누구와 원수였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이제는요? 뒤집어졌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세상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마10: 34-38)."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세상과 짝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릴 공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과 원수가 됐기 때문에 다시 짝하자고 무차별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짝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감사의 조건이지 결코 불평할 조건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씨름을 하려니까 불평이 나오고 낙망이 나오고 싸움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성도로 하여금 어떤 재난이나 환난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쉼입니다. 그 평안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평안이요, 사자굴 속에서라도 두려움 없이 편히 잠들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와 선하신 뜻,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진 모든 축복된 열매와 그 결과들입니다.
오늘도 누구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이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도, 살인마, 살인자, 강도, 마약 중독자도, 정치 중독자 그 누구도 다....... 세상이 얼마나 불화합니까? 모두가 자기중심적입니다. 누구도 남과 화평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나"입니다. 모두가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의리도 없습니다, 이리 붙고 저리 붙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줄을 바꿉니다. 오직 자기의 이익을 주는 것만이 진리이고 정의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한 산 증거입니다. 정치판 돌아가는 꼴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오직 자기 배만 있습니다. 거기에 악행과 쟁투가 있습니다. 다 자기 말고는 다 종이어야 합니다. 아무도 종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섬기는 신까지도 돈으로 매수해서는 자기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당에게 돈 갖다 바치고 점치고, 그리고 굿하는 것이 그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래서 요즘은 귀신도 돈만 갖다 바치면 인간의 충실한 종이 되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통탄스러운 것은 하나님조자도 그리 대접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결정권자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요구를 들어주는 알라딘 램프의 종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이번에 우리 아들 시험 봤는데 합격시켜 주십시오.' '금년 농사 풍년 안 들면 나 교회 때려칠 겁니다.' '내가 기도했으니까, 내가 십일조 냈으니까 내 병 고쳐놓고, 갑절로 축복해 놔라.' 여기서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못합니다. 언제나 모든 결정권은 내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녀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멸망으로 밖에 갈 수가 없는 하나님과 불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서신에서권면을 하기에 앞서서 이 "은혜와 평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제파악부터 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욕망이나 꿈을 채우려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강으로 이끈다는 것을 깨우치고 싶은 것입니다. 은혜는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닙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주권을 주님께 넘김으로 오는 주님과 내가 하나 되는 평화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거나, 남을 종으로 삼기를 포기하고, 날 위해 죽어 주신 예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종이 되고 그가 섬김의 삶을 사셨던 것과 똑같이 남을 섬기고,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즐기는 그런 삶입니다. 나의 모든 것, 지혜, 힘, 능력 무엇도 내 것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씌여질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입은 은혜입니다. 그 평화의 지속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묶으셨고 성령을 우리와 동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동거하고 있습니다. 둘이 하나 되는 것 말고는 평화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주권을 넘겨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주권을 지고 산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불화했습니까? 자존심 상해서 싸우고, 손해 안 보려고 싸우고, 내 것을 지키려고 싸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싸우고 좌충우돌하지 않았습니까? 명분이야 정의를 위해서라지만 그 속내는 언제나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박살이 났고 남는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너를 죽여 자기만 살겠다니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서로 입에 게거품 물고 덤비는 것입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권을 넘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평화를 이룬 방법 그대로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억울하고 원통하고 손해가 눈에 보일지라도 한 번 꾹 참고 사랑하고 용서하면 금방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성도라면 누구라도 시도해볼만할 일입니다. 금방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는데 왜 못하겠습니까? 순간만 순종하면 되는데 왜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여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갈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과 섬기면서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맞받아치면 은혜는 감추어지고 평화는 산산조각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생면부지의 땅 평택에서 일 년 만에 아버님을 여의었습니다. 장례식 날 일가친족은 물론 아무 것도 기댈 것이 없었고 누구도 찾아와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이웃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버님의 시체를 가마니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지어다가 공동묘지에 묻고 돌아오니 두려움과 외로움에 마음이 시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니 갑부나 거지나 죽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르지 않더라구요. 다른 것,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평화한 자로 가느냐? 아니면 불화한 자로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깐 것 세상의 것들 때문에 아웅다웅 다툴 필요가 무엇입니까? 누군가 재물은 피만큼만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지시겠다는데 왜 세상 것 가지고 다투는 것입니까? 은혜를 입은 나, 버러지 같던 내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한 영광을 누릴 내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아빠,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를 믿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돈이 됐든 명예가 됐든 세상 것 가지고 아웅다웅 머리 터지게 싸울지라도 우리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세상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그 권세는 세상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는 십자가뿐입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삶입니다. 두렵겠지만, 망할 것이 빤하지만, 사람들의 조롱도 받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사는 평화의 사람인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이름뿐인 허울 좋은 울타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풍성한 유업들을 이을 상속자들인 것을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평안을 누리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자들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빠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자들임을 세상에 보여줄 기회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평화인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빠인데 왜 못하겠습니까?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세상의 도전에 십자가의 화평함으로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응답에 하나님은 평강과 더불어 사랑과 기쁨도 쏟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놀라운 은혜와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