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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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강, 시련 아래서의 감사와 기쁨. (시련을 통해 성숙해가는 성도)
383, 364, 367.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오늘은 우리가 성도로서 가지는 감사와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면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로서 인생을 살다보면 그 일을 당할 때는 정말 억울하고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것이 감사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 경우 특히 제 아버님과의 이별이 그랬습니다.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아버님을 여의고 그 시체를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지게에 져다가 동동묘지에 묻고 돌아올 때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일로 포기했던 공부를 위해 생면부지의 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 교장 선생님의 감화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선망의 직업인 교사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제가 닥친 그 악한 환경 속에서 선한 결과를 창조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수없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전혀 바라지 않는 그 수많은 시련들을 겪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갖고 제게 시련을 주셨는가를 거듭 확인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들에 자신 있게 권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편안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우여곡절 없이 평생을 순탄하게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사실 불행한 인생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 누가 만일 오랜 기간 고난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고난을 통해 그분을 일깨울 것이 있을 것이고 그분은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분은 그 시련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으로서 자신을 나태함에서 깨우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하셨다거나 더욱 성도답게 성숙시켰고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참된 감사나 기쁨은 상황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나 기쁨은 상황이나 조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느냐 못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에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환난이나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축복받은 성도만의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 역시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사나 기쁨보다는 오히려 원망과 한숨이 나올 상황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그는 채찍질을 당했고, 착고에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그 고난을 자기 자신의 상급이나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환경의 지배를 받기보다 오히려 환경을 초월해서 살았습니다. 당장은 빌립보를 위한 자신의 수고에 대한 열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눈에 빈약해 보이는 그들을 부끄러이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기억했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자기를 외면하고 있을 때, 어려움 중에도 옥에 갇힌 자기를 돕는 그들을 보면서 자식의 효도 받는 부모의 심정을 가진 것 같습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내가 기도할 때마다(4절)"에서 '~을 위하여(uJpevr)'는 '대신하여, 때문에' 등의 의미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어린 신앙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수시로 기도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들의 사랑과 필요를 알고 드리는 기도 자체가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엄마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아기와도 같았습니다. 따라서 로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순되게도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그들에 대해 거룩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중보기도를 쉴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가슴 아파했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볼 때 자기 일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제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까 선교사역을 위해 해외로 나가 있는 아들 내외와 어린 손자손녀가 자주 그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때마다 위로를 삼는 것은 그들과의 즐거운 추억이나 그들이 자라가고 있는 모습에 대한 상상과 그들에 대한 기대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대한 마음 역시 그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개척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10여 년을 그들과 계속 교제해왔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기억하고 회상하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말하며,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와 추억이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모든 환경을 뛰어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세상과 모든 환경의 지배자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지배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정당한 삶입니다. 그러한 삶에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전체상황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단순히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졌던 그들과의 모든 교제들을 하나하나 기억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과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기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연약함과 부족들이 풍성히 채워지기를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과의 거룩한 교제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더 큰 성숙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함은(poievw)' (외적사물에 대하여) '제조하다, 산출하다, 창조하다.' (상태에 대하여) '일으키다, 완수하다, 지키다, 실천하다, 활동하다.' 등의 의미를 통해 간구와 감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실감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한 간구가 이미 응답된 것으로 간주하고 감사를 미리 당겨서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창출하고 결과를 앞당겨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창조성을 가진 것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미련하게도 감사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는 주님이나 이웃이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나의 하나님'을 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편지를 감사로 시작한다고 해서, 그리고 초두에 은혜와 평강을 말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순풍에 돛단 듯 평안의 연속이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순풍에 돛을 단다거나, 꽃가마를 태워서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바울 역시 평생을 복음을 위해 수고하게 하고는 이제 말년에는 감옥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고 언제나 시위대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악한 환경을 조금도 바꾸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기도와 축복 다음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를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불평과 원망이 나와야 할 자리입니다. 예수를 안 뒤 그는 언제나 가시밭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지혜의 능력 속에 지금 자기가 놓여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환경의 지배자로 오히려 스 악한 환경을 감사했습니다. 그는 현재 처한 그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습니다. 복음은 그와 함께 갇히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날개를 달고 날았고, 침체돼 있던 빌립보교인들의 신앙은 날로 성숙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가 죽은 200년 후에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꽃피울 것을 그가 드린 기도의 결과로 미리 보여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시련을 친구로 삼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뻐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뻐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슬퍼하는 것은 불신자라도 다합니다. 그런데 슬퍼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감사와 기쁨을 말하고 있다면 그는 정신질환자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바울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감사하거나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와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욕먹고, 풍랑을 만나고, 말로 다 못할 핍박과 고통 속에서 바울은 감사와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천하보다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나 하나를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분은 나를 결코 손해되는 길로는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감사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늘 인격적인 항복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 항복이 있을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감사와 찬양의 핵심이요, 감사와 찬양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우리의 항복이기 때문입니다.
항복이란 말은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말은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패배에 수반되는 굴욕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패배자는 그 항복의 조건에 무엇도 말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엄과 영광이 부여되는 항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를 우리 아빠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義)를 고집 하는 한, 시련과 고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백기를 드는 것뿐입니다. 나의 고집과 자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데서부터 인생의 축복의 통로가 열리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란 나는 할 수 없사오니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달라는 우리의 항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그 기고는 이미 응답된 것입니다. 그런 기도야 말로 얼마나 신나는 기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력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매달린다면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응답하신 결과를 앞당겨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능력 있는 기도는 내가 죽고 성령이 기도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많은 시련의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때가 있으면 병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많은 일들이 내가 바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뒤틀어지는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항복하고 돌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도 여러분들이 훈련코스를 하나하나 통과하듯이 시련의 코스를 통과할 때마다 더 깊은 감사와 기쁨을 맛보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 자족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을 통해서 때와 필요를 따라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확신입니다. 그것은 이 땅의 청지기로서의 당연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당하고 있는 억울함에 대한 불평과 분노를 극복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항복해야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다면 그것은 지금이 바로 하나님과 그의 완전하신 뜻과 계획에 "저는 항복합니다."라 고백할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반응이 더디다고 해서 결코 낙망하거나 할 수 없다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그에게는 그 무엇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준비시켜서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혈기 방장한 모세를 광야로 내보내셔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모세가 의지할 유일한 분이심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핑계로 할 수 없다고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일에 대해 감당할 능력 또한 그분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능력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이나 환란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사 그 백성들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여전히 그분은 순종하는 백성들의 앞을 가로막는 장벽을 넘을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그분 앞에 항복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충성할 믿음을 갖는 한 승리는 이미 주어졌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의 권위에 대한 나의 인격적인 항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이고 신뢰입니다.
우리는 자주 작은 것은 내가 하고 큰 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나 큰 시련이든 작은 시련이든 내 실력으로 치를 싸움은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는 결혼기념일을 잊거나, 남편의 와이셔츠를 미처 챙겨놓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사에서 작고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너무 영리하고 간교해서 그 사소한 것조차 자신의 기회로 삼는 자입니다. 평소에는 버려두었다가도 아내기 시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든가, 남편이 밖에서 사장에게서 꾸중을 들은 날 등을 골라서 문제를 터뜨립니다. 작은 틈을 노려서 사건을 크게 만들어 터뜨리는 것이 사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자존심이나 존엄성을 무시하게 함으로 사건을 크게 부풀려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로 만들기도 하고 이혼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순간만 넘기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쁜 감정과 겹치기를 하면 허리케인으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지배해주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주 큰 시련을 잘 넘기고도 아주 사소한 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가의 싸움이지 결코 내 능력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서 감사와 기쁨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는 그 어떤 사탄의 강한 유혹도 그를 흔들 수 없는 것입니다. 시련이 크냐 작으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련이 크다 작다는 것은 인간인 나의 판단일 뿐입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아무리 큰 시련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큰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셔서 때로 우리들에게 시련이나 역경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2:6-7)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히12:5)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이로 보건대 징계는 자녀를 자녀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연단하심을 달게 받는 자는 복을 받지만, 거부하면 매를 자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 '성숙하는(온전히)' 자들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거친 태풍 속에서 자란 나무일수록 뿌리가 깊은 법입니다.
한 여인이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나고 완전히 뒤틀렸습니다. 이런 일이 혹 여러분 자신이나 딸에게 일어났다면···? 그녀는 그런 중에도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매일같이 자신의 삶을 파괴한 이 폭력사건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필명이 '모리라 맥러클런'인 이 여인은 자신의 형편을 조심스럽게 마리아의 예기치 못했던 임신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세상은 편안하게 살기 위해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준비하다가 그것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당연히 고민에 빠지고 반항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미친 사람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나의 계획과 마리아의 계획을 무너뜨린 사건은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끔 우리들의 삶의 평화를 깨뜨리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모리라는 예쁜 아기를 낳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편안한 삶만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진짜로 그것을 받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건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닐까요? 만일 당신이 오랫동안 '불편함'을 견디고 있다면 고난을 통해 당신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주님 주신 고통 감사하옵니다. 그것은 은혜로 주신 친구였으며, 편안한 길에서 날 벗어나게 해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그 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한 결과를 창조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방법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키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하나님을 믿고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를 예비하셨고 바로의 궁에서 가장 안전하게 키워내셨습니다.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존귀한 것은 우리에게는 영원히 함께 하시마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방패요 요새가 돼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에서 참된 평안은 상황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느냐 못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을 보면 인간은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크던 작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면 행하고 아니면 끝까지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세상의 방식이나 세상의 힘이 아닙니다. 권세나 물질로 자신의 힘으로 삼는 자는 위로나 행복보다는 오히려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롭다면 시련이나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시련은 우리의 미련과 부족을 씻어내고 거룩케 하고 하나님을 더 신뢰할 기회입니다. 우리가 꼭 명심할 것은 우리의 싸움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가의 싸움이지 결코 내 능력이나 내 실력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쉽게 이길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하여 나를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입은 자로 키워내실 것입니다. 인생 문제의 승패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인내의 싸움입니다. 이 믿음과 인내 없이 주어지는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연약을 믿음으로 채워가면서 자라 가야합니다. 죄성이 있는 부족한 인간이 온전해지는 길은 시련을 통해 성숙되어져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시련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돼있습니다. 우리의 미련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잠든 영혼을 깨우기 위해 수시로 따끔한 가시로 찔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련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존귀한 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증거이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된 시련을 감사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