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함께하는 팀 사역을 어느 시기에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시기를 정확하게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은 앞으로 제자훈련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적정 시기를 놓치고 지나가면 목회자가 그 짐을 다 지게 되어 다치기 쉬운 반면, 그 시기를 너무 일찍 결정하면 제자훈련이 쉽고 적당하게 흘러가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팀 사역을 결정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제자훈련이 사역의 고비가 되는 시점에 와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변에 제자훈련 하는 교회들을 보면, 그런대로 시기를 잘 결정해서 팀 사역의 타이밍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가장 지혜로운 선택, 팀 사역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이런 문제에 대해 동기부여 하는 선배나 동료도 주변에 없었고, 나도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가는 한 길만 쳐다보고 뛰기 바빴지, 주변을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팀 사역에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몸이 병들어 지쳐 쓰러져 갈 때까지 가서야 제자훈련의 팀 사역을 결정할 수 있었다.
1978년부터 혼자서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시작해 인도해 오다가 1985년도에 교회를 건축하고 들어가니 교인 수가 3,000명이 넘어버렸다. 도저히 혼자서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순장반 등을 다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사역훈련만 해도 처음에는 한 반만 하다가 3반 이상 되니 담임목사 혼자 훈련 사역을 전부 감당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돼버렸다.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한 후 얼마 안 됐을 때, 마침 좋은 부교역자들이 들어와서 떠받쳐주었기에 제자훈련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훈련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역을 부교역자에게 나눠준 후에 생겼다. 제자훈련을 넘겨주고 나니 내 가슴이 너무 아프고, 내 자신이 미련을 못 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이야말로 나에게는 영적으로 젖줄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자반은 내 자신이 은혜 받고, 기뻐하고, 목회자로서 힘을 얻고, 행복해했던 근원지였다. 모든 소스가 제자훈련 반을 통해서 공급되었으니까 말 그대로 영적 젖줄이었다. 그것을 몽땅 부교역자들에게 떼줘야 했으니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렇게 제자훈련을 다 나눠줬는데도 사역훈련과 순장반, 교역자 훈련 등 내가 짊어져야 할 사역들이 가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할 걸 알면서도, 떼어주고 나서도 미련을 못 버려 한동안 남모르게 진통하고 고민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제자훈련 하는 반이 있으면, 그 반의 문밖에 서서 문틈으로 제자훈련 하는 모습을 엿듣고 서있는 멍청한 짓까지 했다.
그런데 1, 2년 지나고 보니 그것이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평신도 훈련생들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이 다 맡아 지쳐서 절절 매면서 하는 것보다는 부교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제자훈련반을 맡으니까 생기가 넘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현상들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1989년도에 내가 탈진해서 완전히 쓰러지게 되었다. 1년 동안 쉬게 됐는데, 쉬고 나서 돌아왔을 때는 이제 진짜 중요한 결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사역훈련까지 넘겨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제자훈련도 떼어줬는데 사역훈련을 또 떼어줘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만약 사역훈련을 내 건강에 따라서 한 반만 하면, 나머지 두세 개 반은 누가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됐다. 그렇게 되면 훈련생들이 불만을 가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떼어주려면 완전히 다 떼어줘야 했다.
혼자서 도저히 감당 못할 때, 팀 사역을 하라
결국은 1991년부터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은 내 손에서 완전히 떠나갔다. 그 대신 나는 새로운 과제를 맡게 됐다. 그것은 부교역자들이 내 손발처럼 움직여 마치 내가 제자훈련을 인도하는 것처럼 제자훈련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영적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었다. 제자훈련 팀 동역자로서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계속 나누는 게 나의 중요한 미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팀 사역은 은퇴할 때까지 13년 동안 계속 유지되어 왔다.
사랑의교회 평신도들로부터 "나는 누구의 제자반입니다. 누구 목사님한테 제자훈련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데 성도들 사이에는 마치 옥한흠 목사에게서 제자훈련을 받은 것과 같은 의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질의식이었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이 성공한 밑바탕에는 동질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지도자가 바뀌어도, 담임목사가 손을 떼도 전혀 변질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이 팀 사역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서 담임목사사역의 부담이 점점 늘어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또는 지역상 성장이 잘 안 되는 곳에서 담임목사의 힘이 남아도는데 부교역자와 팀 사역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교역자로 하여금 게으름을 피우게 만드는 구실이 될 수 있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는 부교역자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부교역자가 자주 바뀌면 제자훈련을 준비시킬 시간과 여유가 없다. 준비가 안 된 부교역자에게 제자훈련을 맡기면 잡초만 날 뿐이다.
부교역자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라
솔직히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팀 사역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를 못 미더워하고, 실수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 구석에는 그런 부분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제자훈련을 해도 완전하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살도록 끌어가는 작업인데, 거기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도자도 예외는 아니다. 다 같이 빚어지고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완전성을 서로가 인정해줘야 한다.
또 성령께서는 지도자의 완전한 것을 가지고도 일하시지만 불완전성을 가지고도 일하시고, 지도자의 실패를 가지고도 일하시는 등 생각 밖의 놀라운 일을 하실 때도 있다. 이런 것을 다 인정하고 나면 어려움이 없다. 제자훈련 지도자도 시간과 함께, 경험과 함께, 실패와 함께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지, 금방 몇 마디 말을 들었다고 완전하게 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교역자가 성장하고 성숙할 때까지 담임목사는 기다려줘야 한다.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한다.
사랑의교회의 경우, 부교역자들이 보통 6~10년이나 길게는 20년 이상 같이 사역을 하니까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사랑의교회에서 오래 사역한 부교역자들한테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한 10년 제자훈련 하니까 옥한흠 목사님의 심정을 알겠습니다"라는 말이다. 제자훈련이 뭔지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만큼 제자훈련 지도자 양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것이 팀 사역이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런데 팀 사역에 있어 문제는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해서 걱정하는 부분도 있고, 담임목사의 성격 자체가 남을 잘 믿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는 데 있다. 또 어떤 지도자는 이상한 기질이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남에게 절대 위임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제자훈련 팀 사역을 하는 데 장애요소들이다.
과거 일본에 200명 정도 모이는 교회가 몇 년간 제자훈련을 잘해서 정착되었고, 평신도들도 사역의 준비가 잘되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평신도들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담임목사가 제자훈련만 시키고 평신도들에게 사역을 위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지도자는 평신도들이 힘을 규합해 자신에게 반대하지 않을까 약간 겁이 났고, 사람을 못 믿어하는 기질이 있었던 것이다.
부부끼리도 아내를 절대 못 믿어서 통장을 안 맡기는 남편이 있다. 그건 병이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그런 좋지 못한 습관까지도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목회자의 그런 습관이 변화되지 않고 제자훈련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면 성격, 심지어는 습관까지도 바뀌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주님을 목표로 두고 주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자기 자신이 느끼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팀 사역을 제대로 하려면 사람을 믿어줘야 한다. 심지어 실패를 해도 믿어줘야 한다. 한 번의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한 번 실패했다고 그만두게 해서는 절대 사람을 키울 수가 없다.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들이 10년, 20년 같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기다려주고 믿어줬기 때문이지, 그들이 실패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한테 욕도 많이 먹고, 눈물도 흘린 부교역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호되게 다룬 것이지, 정죄하기 위해서 호되게 다룬 것이 아니다. 기다려주면, 그 사람이 30살 때는 상상도 못했던 놀라운 영적 잠재력이 35살에 나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팀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떨 때는 평신도 훈련생들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사람을 키워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항상 그런 원칙을 갖고 있었다.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하면서 "저 사람은 순장 못 시키겠다" "성격이 저래서는 사람 다치겠다"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동서남북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규모의 교회에 사람이 갑자기 모이면 신앙 경력이 짧은 사람에게 다락방 순장을 맡길 때도 있다. 그때 담임목사로서는 진짜 불안하기 짝이 없다. 마치 엄마가 뭔지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애를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럴 때마다 난 이 원칙을 고수했다. "훈련생들을 희생하더라도 저 사람을 키워야겠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 제자반의 훈련생들이 부교역자로 인해 영적으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흩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를 각오하고 맡겼더니 진짜 순장이 거기에서 나왔던 경험도 있었다. 내가 기대를 안 했던 사람이 진짜 순장이 되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우리 권사들 중에도 몇 명 있는데, 지금 그들은 평신도 목자로서 정말 사역을 멋있게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팀 사역을 할 때는 그런 결단을 가지고 제자훈련을 맡기는 게 일종의 모험이다. 교인들은 1년을 각오하고 제자훈련에 지원하는데, 지도자가 서툴러서 1년을 허송세월 한다고 생각하면 못 견디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그런 것도 염두에 두고 판단을 잘해야 한다.
저 사람을 키우면 한 번은 희생하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싶으면 훈련생을 희생하더라도 기다리지만, 저 사람은 10년 훈련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겠다 싶으면 그 사람은 팀 사역으로 부르면 안 된다. 여기에는 담임목사에게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영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 중에서도 그런 안목과 분별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자기에게 아양 떨고 아부하고 잘해주면 좋은 사람인 줄 안다. 냉정하게 사람을 분석하는 눈이 부족하다. 나는 그런 후배들 보고 사람 보는 눈 좀 달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람 보는 눈을 좀 주신 거 같다. 지금까지 실패도 있었지만, 성공이 실패보다 5%는 더 많았던 거 같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인력이 그리 여유로운 편은 아니다. 부서마다 부교역자들에게 전부 맡기고, 장년 제자훈련 위해서 특별히 전담 사역자를 둘 여유가 있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다. 솔직히 장년 제자훈련을 부교역자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을 만큼 여력 있는 교회가 별로 없다.
교인이 1,000여 명까지는 담임목사가 차고앉아서 힘이들어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고 사역이 다양화되어 1,000여 명 정도의 교인을 담임목사 혼자 일반 목회까지 다 하면서 설교하고, 제자훈련까지 다 감당하기는 힘이 부칠 것이다. 그것을 고려해서 담임목사를 보좌할 수 있는 부교역자 1, 2명을 두자고 하면 상당히 실력 있고 질이 높은 교회일 것이다. 반면 이 정도 교회 사이즈에 무슨 부교역자를 두냐고 교회 내부에서 항의한다면 문제가 좀 있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같은 목회철학을 지녀야 한다
제자훈련의 기본이나 본질은 말로 전해지는 것보다 무언으로 전해지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확률이 크다. 저 사람이 말을 저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한다기보다, 그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무언의 무언가가 하나님의 말씀과 합해져서 연결이 될 때 사람의 충고나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소명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역을 할 당시 매주 화요일 교역자 모임 시간은 아마 그런 면이 강했던 것 같다. 부교역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제자훈련에 미친 사람, 한 사람 철학 외에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저 사람은 한 영혼을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사람, 그 외 다른 교회 행정이나 행사, 교회 건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 등이 합쳐져 풍기는 무언의 뭔가가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해도 다 다르게 듣게 된다. 당시 화요일에 모이면 부교역자들 사이에 "우리가 은혜 받아야 한다" 라는 말이 단골 주제였던 것 같다. 교역자가 먼저 은혜 받아야 하고,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은혜 받은 말씀을 내놓고, 내 은혜를 그들에게 내어놓고 나누었다. 또 사랑의교회가 현실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부분들을 그 시간에 지적하고, 잘못한 부분들은 꾸중도 하고, 담임목사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미리 알려줘서 교역자들이 공감을 하도록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세세한 것들을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처럼 자신의 노트에 깨알처럼 써서 지금까지 보관하며 영적 목마름이 들 때마다 꺼내보고 하는 교역자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팀 사역을 제대로 하려면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목회 철학에 동질감을 가져야 한다. 말을 안 해도 서로가 통하는 동지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부교역자가 제자훈련을 해도 담임목사로부터 제자훈련 받은 것 같은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된다. 그래서 제자훈련 팀 사역의 성공여부는 80%가 담임목사에게 달려 있다.
사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에게 존경 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존경 받기 힘들다. 잠언서에서도 남의 말하는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두고 신경 쓰고 인정받으려고 노력을 하면,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살리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스스로 노력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씨름하면서 나가야 한다. 괜히 부교역자들에게 좋은 말만 들으려고 의식하면 아마 오래 못 갈 것이다. 천하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제자훈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런 의식 가지고 안 한다. 있는 대로 자기 오픈을 한다.
양의 주인은 따로 있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제자훈련 팀 사역을 잘하면 모든 면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하게 된다. 제자훈련 팀 사역의 시너지 효과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회가 건강한 체질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임목사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내 양이 아니고 다 주님의 양인데, 평신도들이 꼭 나하고만 밀착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 담임목사는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다. 양무리가 많으면 잘 아는 양도 있고, 잘 모르는 양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주인이 원하는 대로 목자의 일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성도들을 자기 양으로 착각하고 그들 모두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담임목사의 제자를 만드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소유욕이 문제다.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목회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교인을 자기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런 사람은 평생 그 정도 사이즈밖에 목회를 못한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 품이 넓어지니까 사람과의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 교인들 재적수가 4만 명쯤 됐을 것이다. 그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나서 "사랑의교회 교인입니다" 하고 말하면 전혀 이질감이 안 생긴다. 같은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뒷방영감 보듯 보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훈련 팀 사역을 통해 가능해진다.
재수를 시켜서라도 부교역자를 키워라
흔히 팀 사역이라는 단어를 좁게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에만 한정하면 그 대상이 부교역자와 사모까지는 가능하다. 은사가 있는 좋은 사모가 있으면, 제자훈련 사역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사모 때문에 제자훈련이 성공한 교회가 여럿 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가 영적으로 탁월하다고 해서 팀 사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제자훈련은 영적 자식을 낳는 일인데, 자기 자식은 자기 배로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 사역이라는 단어를 좀 더 넓게 해석해서 제자훈련의 도움이 되는 부수적인 프로그램까지 포함을 시킨다면 우수한 평신도들이 동참할 수 있다. <디사이플> 5월호 현장 이야기에 실린 영문교회처럼 일대일양육 사역이나 새가족반을 평신도들에게 맡긴다든지, 인천 은혜의교회처럼 평신도들이 앞장서서 교회 사역에 발로 뛰는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나는 제자훈련과 그런 보조적인 프로그램을 상당히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에, 팀 사역 하면 일단은 제자훈련에 한정된 팀 사역을 생각한다. 팀 사역을 잘못하면 제자훈련도 실패하게 된다. 또 제자훈련이 힘을 잃어버리면, 다른 부수 사역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꾼이 제대로 키워지지 않아서 일을 맡겨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사이즈가 작은 교회, 숫자가 늘지 않는 한정된 교회에서 팀 사역을 잘할 수 있는 부교역자를 키우는 방법으로는 부교역자에게 재수를 시키는 방법이 있다. 부교역자를 1년 동안 가만히 보니 열심히는 했는데 제자훈련을 멋도 모르고 했고, 훈련생들의 영적 변화도 보이지 않고 분위기가 맨송맨송하면 한 번 더 1년 동안 그 제자반을 훈련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부교역자가 "제가 너무 모르고 1년을 보냈습니다. 저도 은혜 받고, 여러분도 새롭게 은혜 받는 기회를 만듭시다" 하며 제자훈련을 한 번 더 하자고 훈련생들에게 말하면 손해 볼 것 하나도 없다. 실제로 과거에 그런 교회가 있었다. 제자훈련을 한 번 더 재수시켜 훈련하도록 하면 부교역자가 많은 면에서 달라질 것이다.
부교역자들과 신뢰관계를 쌓으라
마지막으로 팀 사역을 좋은 분위기에서 하려면 담임목사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아야 한다. 담임목사 앞에서는 아부하면서도 뒤에 가서는 욕을 한다면 어렵다. 지도자는 정말 어렵고 힘든 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를 선배로서 상관으로서 지도자로서 신뢰하고 따르기를 원한다면 인격과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원활한 팀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
부교역자 눈에 담임목사가 항상 양적 성장에만 눈이 멀어 닦달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거나 자기 자랑이 너무 심하고, 아부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충고하는 사람은 미워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게 되면 신뢰받기 힘들다. 특별히 제자훈련 목회자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전심을 쏟아야 하는데, 교회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접받기 좋아하면 더욱더 신뢰받기 힘들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팀 사역이 돌아가겠지만,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한 배를 타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의식으로 교회를 섬기기는 어렵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부교역자들이 나를 믿어주고, 열심히 제자훈련 사역에 힘써줬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팀 사역을 통해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의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교역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부산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다. 그는 초창기 나의 손발이 되어 주며 수고를 많이 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의 터를 닦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강명옥 전도사, 김명호 목사 같은 사람도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을 제 궤도에 올려놓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그 외 함께 사역했던 부교역자들 중 숫자는 다 셀 수 없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일산 충정교회 옥성석 목사 등 지금은 모두 성공적인 목회를 하며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들이 됐다. 그들은 10년 가까이 교회를 섬기면서 오늘의 사랑의교회가 있기까지 제 몫을 다한 사람들이다.
한 영혼 철학을 놓치지 마라
교회가 성장하여 제자훈련 팀 사역을 하다 보면 담임목사가 한 영혼 철학을 놓치기가 쉽다. 그게 정상이고 상식이다. 그래서 제자훈련 지도자는 잘못하면 위선자가 되기 쉽다. 이 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점검해야 할 자기 양심의 문제다.
바울 서신서들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 수가 꽤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니지만 바울의 제자들을 통해 개척된 골로새교회는 꽤 큰 규모로서 교인들이 수천 명, 수만 명 될지도 모르는 사이즈이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아파하는 일체감을 보인다.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그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경우는 짧은 기간 교회를 개척만 하고 떠났는데, 바울이 그들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래서 바울이 너무 과장하거나 거짓말하고 있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실제로 그랬다.
오늘날 어떤 목회자가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말한 것처럼 각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을 쏟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바울이 말하는 중요한 목회자로서의 양심적인 고백이 있다. 만 명을 앞에 놓고도 한 사람을 주목하듯 내 마음을 그 한 사람에게 쏟으며 설교할 수 있고, 사역을 할 수 있다면 그 지도자는 한 사람 목회철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천 명을 천 명으로 보는 사람과 천 명을 한 영혼 한 영혼으로 보는 사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집중하는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식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다. 나는 그 점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왔다. 저 앞에 보이는 이름도 모르는 한 영혼이 중요하며, 한 영혼을 보는 눈으로 전체를 보는 양심적인 눈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자훈련은 진행형이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똑같이 평생 계속되어야 할 진행형 사역이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노니"라고 한 것처럼 그 해산의 수고는 끝이 없는 수고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인 것이다.
나가는 말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큰 축복을 누렸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침체를 겪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그랬다. 실패했다. 바울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교인을 놓고,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다한다"고 말한 것은 제자훈련이 단기간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전체를 놓고 평생 해야 하는 것임을 말한다. 팀 사역도 평생 진행형이니, 멀리 내다보고 팀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