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4살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선교사의 삶을 준비하며 살았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 민족에게 온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민족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신 표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도를 위해 준비했던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셨고 조선으로 그의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선교보다 언어가 더 어렵다" 는 말이 있을 만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힘든 일이었지만,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려운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마음을 아시고 언어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선교사님 중에 가장 조선말을 잘 하는 선교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번역 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잘 알다시피 그는 근대 한국 교육사업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한국에 온 다음 해인 1886년,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웠고 이어 고아학교를 창설했습니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서울의 경신고등학교가 됩니다. 또한 그는 대학 창립을 마음에 계획하고 후에 연희전문대학을 세우게 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연세대학입니다.
그리고 1887년 9월 27일, 그의 집 사랑채에서 14병이 참석하여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 예배가 바로 새문안 교회의 첫 예배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선교일화 중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총각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오셔서 28세가 되던 해 자기보다 8살 연상인 릴리아스 홀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계획하고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그가 머무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처음 보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신기해하며 머리카락을 만져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곤욕스러운 것은 밤마다 신혼 방에 구멍을 뚫고 쳐다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의주에 머물고 있을 때, 서상륜씨가 찾아와서 세례를 받을 사람이 백 여 명이나 있으니 세례를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조정에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줄 수 없다." 고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상륜씨는 물러서지 않고 "대동강 저 편은 중국 땅이기 때문에 거기서 세례를 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며 세례를 주기를 간청하였고, 결국 3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31년 동안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가 병세가 악화된 그는 1916년 4월, 요양 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됩니다. 세상을 뜨기 전, 그는 부인을 향해 "내가 저 먼 나라로 다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언더우드 선교사, 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일가는 5대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사랑을 실천하고 있는데 묻혀있는 언더우드 선교사님께서도 감동을 주지만 그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손자, 증손자의 빈 무덤 터 역시 큰 감동을 줍니다. 가족이 대를 이어 우리나라를 섬기다가 이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그들의 헌신이 감사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