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의 호기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본문입니다.
율법적 인간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가, 은혜의 잣대로 풀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TV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지난해 전주에서 정의 구현 사제단의 시국선언 발언으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어떤 노 신부가 나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들이 해야 할 일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를 넘어선 사랑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이념으로 갈라져서 누가 옳으냐를 따지는 것으로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종이 두 장을 붙어보려고 하십시오. 딱 맞춰서 붙여지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한쪽이 포개져야 합니다.
정의라는 두 장의 종이가 정확하게 맞춰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덮어야 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천이 정의롭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정의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덮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의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이 무척 흥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을 만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호기심은 우리에게 아주 멋진 답을 찾아가게 하는 여행을 만들어 줍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에 요한복음 3장에 있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원칙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열매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죠. 니고데모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땅만 갈 뿐 씨앗을 뿌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주의에 물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모습이 믿음의 척도라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옷차림이나 행동거지 교회 직분, 기도의 표현력, 은사의 크기를 보면 믿음이 좋은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농부라고 치면 인근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와 멋진 창고, 비싼 농기구를 가진 농부였습니다. 울타리는 순백색으로 깨끗하게 칠해져 있고 땅은 말끔하게 갈아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농부라고 치면 매일같이 커피숍에서 모여 농사이론을 토론하는 농부였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비료를 뿌리는 게 좋을까? 비가 내려 축축해진 후가 좋을까? 1년마다 밭을 쉬게 하는 게 좋을까? 2년마다 쉬게 하는 게 좋을까? 작업복 차림으로 밭을 갈아야 하나? 청바지를 입어야 할까? 카우보이모자와 야구모자 중 뭘 써야 할까?
하지만 딱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농사 기술에 관한 이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건만 정작 수확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어느 갈릴리 사람의 몇 달 치 수확량이 모든 바리새인의 한 세대 수확량보다도 훨씬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질투심에 눈이 먼 그들은 이 갈릴리 사람의 방식이 옳은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미워하고 경멸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가운데 단 한 명 니고데모만은 달랐습니다. 니고데모는 미움보다 호기심이 앞섰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늘 양면성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으로 거부하든지, 아니면 호기심으로 접근하든지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늘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옆에는 늘 하나님의 능력으로 호기심으로 가득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기심은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차이에서 출발합니다.
두 사람이 가졌던 종교관이 틀렸던 것이지요.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정점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갔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3장 2절을 보면,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니 참 대단한데, 무엇을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니고데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다 큰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다시 날 수 있습니까? 그가 인간의 행위와 능력으로 볼 때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고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행위와 선행이 어느 정도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의 기준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인간들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아서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살지 못하는 인간은 늘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때로는 제풀에 꺾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선행'을 행하려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해도 우리는 선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선행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는 순간 순식간에 '자신의 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에 중독된 사람들의 위험을 많이 봅니다.
소위 '간증'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자신의 자랑만 남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를 시작한 목회자가 어느 날 자신을 보니,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영광만 남게 되죠.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영광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랑을 유지하기에 바빠지고 결국, 그렇게 유지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중독'에 빠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신실했던 사람이 돈에 넘어지든지, 이성에 넘어가는 일이 말입니다. 사실은 악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에게 무섭게 찾아오는 일이기도 하지요.
율법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지난해 참 힘든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느 가정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도저히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니 정의의 문제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때 영화를 보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소원"급작스레 장로님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그래도 20여 명이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고르다 보니 '소원'을 선택했고 참 잘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렇게 어두운 내용을 가지고 저렇게 따뜻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연기가 빛났습니다.?영화를 보고 바로 주인공 엄지원 씨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평소에 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봉사하는 마음이 참 예뻤는데, 성폭행을 당한 9살 난 딸을 가진 엄마의 아픔을 참 잘 연기 했더군요.일단 미혼모들을 돌보는 월드휴먼브리지 사역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엄지원 씨를 칭찬합니다. 작은 모임에도 소리 없이 찾아와 미혼모들을 보듬고 위로하는 마음을 말입니다.?그리고 '소원'이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군요.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아니, 제가 너무 "용서"를 쉽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성폭행으로 소장과 항문을 드러내고 평생을 똥주머니를 차고 살아가야 하는 딸을 둔 부모에게, 그리고 그 딸을 폭행하고도 너무나 뻔뻔하게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협박하는 범인을 보면서, "용서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네요.무엇보다, 용서한 그 사람 때문에 폭행당한 딸이 또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디까지 용서가 적용될 수 있는지. 영화에서 그 딸의 아버지를 참 사랑하는 친구가 이렇게 위로하더군요.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고라고 생각하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아픈 일을 어떻게 이기려고." 그 소리에 아버지가 화를 내더군요."네 자식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어. 애 엄마가 이 세상에 모든 아이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무서운 말이 이해가 된다고." 누군가에게 용서는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다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 무서운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이 참 견디기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그럼에도, 주변 사람의 사랑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아픔을 이겨나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사랑과 위로의 손길들이 참 아름답습니다.?참 눈물 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폭행을 당하고 치료를 받는 9살 난 아이의 말.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옛날처럼 돌아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변하지 않더군요. 할머니가 늘 '죽겠다, 죽겠다.' 하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영화에서도 씻을 수 없는 한 아이의 아픔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평생의 장애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다시 찾을 수 없는 과거, 그러나 사랑으로 회복되어 가는 모습. 그게 우리의 삶인 것 같습니다.?누군가를 용서하려고 애쓰기보다, 보듬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 누군가에게 일어난 아픔이 나에게도 아픔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이제 나이가 들으니 영화의 내용도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참 오랜만에 생각하게 하는 영화를 보았습니다.?어서 가서 보세요.
율법을 가지고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데 율법은 획일적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기계적입니다. 공식을 넣으면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거기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규범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규격화시키려고 합니다.
저도 그런 규격을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은혜중의 하는 몸이 아주 아팠을 때였습니다. 그 전에 저는 모든 사역의 기준이 '나'였습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틀리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제가 몸이 아프면서 '무력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던 약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보기 시작하니까, 누군가에게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단지 우리에게 임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큰 맹점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서 '다름'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정죄'합니다. 흔히 나와 같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을 따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은혜'에서는 누구에게 더 큰 관심과 용서가 필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정의'라고 부르는 것의 맹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인지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율법에서는 규율을 따르는 자라야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마다도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로 살았지만, 그에게 찾아왔던 '호기심'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그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때 기꺼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던 사람이 이제, 흉측하고 무서운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19장 39~42절 말씀을 보세요.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니고데모도 이제 복음 앞에서 자신이 이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radical이 아니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 말입니다.
복음! 그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가 만났던 주님을 통해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선하심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믿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누구든지" 중에 한 여인이 생각이 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막 5:24-26)
이 여인이야말로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상한 갈대"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12년이나 노력을 해봤지만, 더욱 힘들어졌던 여인이 주님을 만나려 했지만 주저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는 중입니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목에 자신의 방해 거리가 되리라는 생각, 무엇보다 여자로서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 게다가 피를 흘리고 있으므로 격리되어 있어야 할 불결한 여인이 사람들 틈에 껴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이 여인이 지금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고, 돈도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확신과 소망 말고는 말입니다.
혹 우리 중에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 앞에 보일 수 있는 것은 내 삶의 수치와 상처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고결하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니, 그들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여인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입니다.
돈이 많이 있어서 베풀 수 있다는 것, 많은 재능으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좋은 성품과 배경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실 거야!
그것이 어떤 구원일지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나에게 선한 일을 베푸실 좋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호기심!"
그분을 만나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호기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좋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호기심이 극에 달하는 때는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고 다급할수록 더해 갑니다.
다급할수록 우리는 더욱 기도에 힘쓰게 되고 그분과 친밀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방일수록 한 줄기 빛이 절실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도 거절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호기심이 복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니고데모가 단지 예수님을 찾아갔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만남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삶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율법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으려 했던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한 일이란 단지 "손을 뻗어서 만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때 주님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의 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바로 코앞에 있다. 언제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 단, 그분의 도우심은 그분을 찾는 자에게만 임한다. 감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자는 평생을 가도 그분의 도우심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치유의 기적 자체라기보다는 치유가 여인의 행동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작지만 용감한 행동 하나가 예수님의 은혜로운 능력을 끌어냈다.
하나님의 역할에 비해 우리의 역할은 보잘것없지만, 꼭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작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말고 믿음의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험적이고도 파격적인 믿음을 높이 사신다. 방주를 지어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병사들이 진군해야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
지팡이를 들면 지금도 바닷길이 열린다.
내 점심 도시락을 내놓으면 수천 명의 시장기가 해결된다.
혈루증에 걸린 갈릴리 여인의 마른 손이든 방글라데시 거지의 기도하는 손이든 상관없다.
누군가 옷을 만지면 예수님은 언제나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신다.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신 사건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5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 여인이 이 말을 들었을 때의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12년 동안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을 따뜻한 부르심을 말입니다. 이 말을 하고 계신 예수님의 표정과 눈빛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리고 목소리로 이 여인을 부르시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가장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것 말입니다.
누더기 같은 우리를 감싸시는 그 눈빛 말입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길을 가다 거지를 보고 적선을 하려고 주머니를 뒤집니다. 그러나 돈이 하나도 없어 멋쩍은 표정으로 거지를 보며 말합니다.
"형제님, 미안합니다. 드릴 게 하나도 없군요."
그런데 거지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말합니다. "이미 많은 것을 주셨잖아요.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죠."
오늘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그 일이 바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