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윤허에 의해 의사와 언어교사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자 조선을 향한 선교사들의 반응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선교사로 반응한 젊은이는 의사였던 죤 헤론(John W. Heron) 이었다.
그는 조선에 의사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조선을 향한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테네시 종합의과대학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죤 헤론은 본교의 교수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앞길을 든든히 보장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으며 명예와 부가 보장된 그 넓은 길을 뒤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병이 득실거리는 낯선 이국땅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는 열방을 품은 주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조선선교사로 파송되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갑신정변으로 인해 나중에 파송을 받고 왔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바로 뒷배를 타고 조선 땅에 입국하게 됩니다. (1885년 6월 21일) 그리고 광혜원의 병원 원장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이곳은 서울 을 지로로 이사를 하면서 재중원이 되었습니다. 광혜원이 왕족과 양반계급을 위한 병원이었다면 재중원은 모든 천민에게까지 혜택을 주기 위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병원에서 5년간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모두 피서를 떠난 후에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다 결국 이질로 몸져눕게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일하던 조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서 그 귀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가 죽자, 고종은 성에서 10 리 떨어진 곳에 그를 묻을 땅을 주었는데 그곳이 나중에 합정동 선교사 묘지가 되었고, 그 뒤를 이어 111 명의 선교사가 그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