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민영익과 6명의 사절단은 미국에 견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미국 방문단을 '견미단' 이라고 부르는데 견미단 일행은 항상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미국의 아름다움과 근대화된 모습을 관람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견미단이 기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마침 그 기차 안에 고우처 목사와 게일이라는 청년이 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고 웃으며 지나쳤지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과 고우처 목사님과 게일은 남다른 관심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그 나라에 선교사가 들어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문은 열렸으나 복음은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고 고우처 목사님은 즉시 가지고 있던 유산 2000달러를 선교부에 드리면서 조선 복음화를 위해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선교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에 계신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해서 조선에 들어가 조선 선교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청년 게일은 견미단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고 준비하여 마침내 토론토 대학 졸업 후, 토론토 대학 Y.M.C.A. 소속으로 1888년, 한국 제물포 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문인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 중 '코리언 스켓치' 라는 책을 구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는 야소교(예수교) 회보의 주필을 비롯하여 각 기독교신문에 관여했고. 예수교서회의 문서 활동을 하는 등 한국 문화에 혁혁한 공헌을 남긴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서울 연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현재의 정신여학교와 경신여학교를 설립 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로도 활동 하였습니다. 젊었을 때 기차 안에서 만난 조선인을 보면서, 조선 선교사의 꿈을 키워온 게일 선교사는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서 결국 1937년, 별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