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 입니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 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이미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엘렌 선교사는 8개월 간 상해와 남 경 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1884년 6월,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으로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 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 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넘어가는 12월 어느 날, 조선에서 일어난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지신 분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무력하게 쓰러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14명이나 도는 한의사들이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습니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모함. 살해하려한 개화파는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왕실의 시의가 되어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십만 냥을 전해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 입니다. 그 후 광혜원은 '재중원' 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내셨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시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길을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들로 인한 이후에 조선에 들어 온 언더우드 선교사도 알렌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