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만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자기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항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도착하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아펜젤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로 인도하였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부르심을 받은 어느 날, 아펜젤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어서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되는데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젤러 선교사는 즉시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 줍니다. 그리고 소녀를 살리고 힘이 빠진 상태로 겨우 배에 매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결국 아펜젤러 선교사는 실종되고 맙니다. 40세의 짧은 생, 그는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한 생명을 건지고 지기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아낌없이 조선 땅에 바쳤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아고, 그가 세운 학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제 중. 고등학교입니다. 비록 아펜젤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했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에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는데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대 최초의 한국인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황하기도 했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아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춥고 배고픈 우리 민족을 위해 세계와 교회에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하여 수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못 다한 사역을 잘 감당한 헨리 다지 아펜젤러 선교사는 병들어 비국으로 치료차 가면서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 는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도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조차 없는 것을 늘 마음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이 맞은편에는 1950,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은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