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에 대한 고종황제의 허락 이후, 조선에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영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헐버트 선교사입니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는 아픔을 겪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시는 을사보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는데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세계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지만 백악관 문 앞에서 거절을 당하고 맙니다.
당시는 미, 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맺어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화' 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내던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고, 40년만인 1949년 8월, 86세의 나이로 그는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그는 한국 방문기간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던 헐버트 선교사,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러주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