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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라는 한 여인.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람과 사래가 살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여러 차례 이주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아브람과 사래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가나안에서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아브람과 사래가 애굽으로 들어갈 때, 이들은 일종의 난민(難民)이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가야 했다. 그들이 살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것도 매우 심한 기근이었다. 그 기근을 피해서, 생존하기 위해 아브람과 사래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니 아브람과 사래는 자연재해로 인해서 제 살던 곳을 떠나야만 했던 난민이었다.

아브람과 사래만 기근으로 고통을 당했을 리는 없고, 또 그들만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과 사래처럼 기근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을 것이고, 또 아브람과 사래처럼 애굽으로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양식을 찾아서, 살길을 찾아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사람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 그들은 모두 난민들이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을 한다. 그들이 가려는 애굽은 마냥 희망 천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배고파서 살길을 찾아 떠난 길인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를 불러 세우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아브람은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애굽 땅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들은 듯하다. 그 소문은 아브람과 사래를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불길한 소문을 들은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자신과 사래를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상했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이 아브람과 사래가 부부인 것을 알아채면, 아브람은 죽이고 사래는 살려 둘 것이 분명하다. 소문에 의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아브람은 꾀를 생각해 냈다. 앞뒤로 죽음이 막고 있는 야만적인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아브람은 사람들이 사래에게, 사람들이 물어보면, 아내가 아니고 '아브람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라고 알려 준다.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아브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사래는 전혀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바로 아브람이다.

질긴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아브람은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하면서 애굽으로 들어가려 한다. 누이동생이라고 하면, 사래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부녀도 탈취하는 판인데, 남편 없는 여자를 그냥 두겠는가? 그렇다면 아브람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면 서로 헤어질 것이 뻔하고 사래는 애굽 사람이 데려가서 제 여인으로 삼을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것을 이미 짐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브람과 사래는 애굽으로 내려간다.

이것은 당시 상황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서로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애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당신과 내가 살 길은 이 길밖에 없다." 이렇게 맘먹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부부 사이를 끊고 헤어짐을 전제하는 이별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다. 고통스러운 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람과 사래가 겪는 일이다. 하나님이 가라고 한 그 땅에 들어와서 바로 겪는 일이다. 이때 아브람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다시 하란을 떠나서 이 가나안으로 왔단 말인가? 가나안에 들어와서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기근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다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래이다. 남편이 하는 말을 들은 사래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남편을 따라 애굽에 와서,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고 오빠라고 부르고, 그러다가 남편을 떠나서 바로에게 붙들려 가야 했던 사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사래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래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궁금하다. 침묵하는 사래. 사래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경 기자는 사래를 완전히 침묵케 함으로써, 본문을 읽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처절한 심경을 짐작해 보게 한다. 선택권이 없는 사래. 그런 상황에서 침묵하는 사래. 아니, 사래를 침묵케 하는 성경 기자. 침묵할수록 애절함이 더하는데.

도대체 사래는 누구인가? 본문은 사래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창세기 12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11절을 제외하고는 성경 기자가 '사래'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는 사래라고 하는 대신, 그 여인, 그 아내, 나의 누이, 나의 아내, 그 아내, 네 아내, 네 누이, 네 아내, 그 아내로 부른다. 본문 기자가 사래를 '사래'로 표기하지 않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기하는 것은 사래가 과연 누구인지, 누구 아내인지가 불분명한 상황, 즉 사래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사래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는 아브람과 바로와의 관계에 의해서 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 뿐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불분명함은 사래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니, 사래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강압적인 상황에 처했던 것이 분명하다. 사래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그저 상황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이 자기를 아내로 부르면, 그런 줄 알고, 누이라고 하면 또 그런 줄 알고 사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부르면, 그렇게 여기고, 바로가 사래를 아브람의 아내라고 하면 또 그렇게 여기면서 사는 것이다. 사래라는 한 여인,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세상을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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