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성경의 배경
그림 :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는 망원경, 천문대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아마도 멀고 먼 저 별 나라에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싶다. 가령, 미술가, 예술가로 말하면 그들 나름대로의 자유분방한 생각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하는데 있는 듯 싶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네모진 것들이 많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여기에 나타난 것은 광활한 우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달이 보인다. 인간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놀라운 우주의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크냐고 했을 때, 몇 가지 통계적인 것을 말씀드린다면, 미국의 우주 항공사가 지구의 둘레를 돌 때는 1시간에 18,000마일의 속도로 회전한다. 1968년도에 미국의 우주 항공사가 이러한 속도로 여행을 했다. 그러니까 1시간에 25,000마일의 속도로 우주를 돌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우주 항공사는 1시간에 40,000㎞의 속도로 적도를 돌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우주의 어느 곳에 여행을 할려고 하든지 간에 광속의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1시간에 한 번씩 이러한 속도로 돈다면 적도를 돌 수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은 1/72이라는 속도로 빛이 우주를 도는 속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우주의 어느 구석에 가려고 하든지 적어도 그만한 속도가 아니면 갈 수가 없다. 우리가 은하계를 가려고 할 때에는 1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 도저히 거기에까지 갈 수가 없다. 우리의 갈 수 있는 우주의 극한에까지 갈려면 140억년이 걸려야만 거기에 갈 수 있다고 천문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말을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우주를 만드셨느냐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육체에 관한 한 가지 통계를 말씀드리면, 우리 속에 있는 내장이나 창자나 혈관과 같은 것을 꺼집어 내어 가지고 한 줄로 쭉 잇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길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이 세계를 2바퀴 반을 돌고도 남는 놀라운 통계가 나온다.
한 가지 우리가 더 생각해 볼 것은, 우리 인간에게 심장이 있다. 그 심장은 끊임없이 펌프질을 한다. 그런데 그 심장이 하루에 몇 번을 펌퍼질을 하는지 아시는가? 놀라지 말라. 우리 인간의 심장은 하루에 10만번 펌프질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기자는 우리는 참으로 놀랍고도 놀랍게 빗음을 받았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와 같이 무엇을 만든다고 했을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든 것과 대조해 보았을 때 그야말로 쓰레기에 불과하고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랍고도 광막한 우주를 만드셨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사는 조그마한 우주의 계획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러면 우주의 이 반구를 왜 여기에 표시했느냐?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극동(근동)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성경의 모든 역사가 시작됐고 출발했기 때문에 반구를 이렇게 표시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무대가 가설되어 있고, 거기에는 관람의 좌석들이 쭉 들어서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알 듯이 옥외 극장, 야외 극장을 위에서 찍은 것이다.
우리가 만원경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족적이라고 할까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주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들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우주를 볼 때에도 그러합니다만, 성경을 통해서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발자취와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여기에 원형 극장이 또 나온다.
우리가 성극(聖劇)이라고 할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룩한 각본이 있는 책,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극은 두 가지 면으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첫 번째로 왼쪽에 있는 그림은 시내산의 상징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서운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구름이 나타나 있다.
가운데 있는 둥그스럼한 그림이 무엇이냐? 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문 같기도 하고, 창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것이 무슨 그림이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는 언약의 표로서 계명을 주셨는데 바로 그것을 여기에서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에 시내산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언약을 주신 것이다 라고 하는데 국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애굽 나라에서 구원해낸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선언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세하게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과 또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어떠한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선행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다.
시내산을 상징하는 그림을 중심으로 해서 점선으로 둥그런 원을 그리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당신의 주변에 모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한 나라, 한 가족과 더불어, 가족들의 집단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 라고 말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말 할 때에 어떤 개인적인 관계만을 갖는 기독교는 없고, 모든 기독교라는 것은 더불어 함께 관계를 맺는 그러한 성격을 띠는 기독교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 가운데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 정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에게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정상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대강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성경에 의하면 거기에 장막을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물론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그 장막 안에 머물러 계심으로 인간과의 대화를 지속하셨다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될 때에 멀고 먼 어떤 곳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 뵐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중앙의 장막에 계실 때에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선민들이 모여서 경배를 드렸다.
신약에 내려와서 이것이 적용이 될 때 똑같은 원리를 적용하게 되는데, 요한복음 1장 14절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 나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서 말씀은 물론 예수님을 말하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그가 오시어서 우리 사이에 장막을 치셨다는 말로 되어 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광야의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그 가운데 계셔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교제를 가지셨듯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 도성인신을 하셔서, 예수님이 되셔서 모든 사람 가운데 장막을 치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과 그 가족들을 그 주변에 모으시고 저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는 거다.
구약시대에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셨을 때에는 왜 주셨느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계명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계명을 따름으로서 하나님을 본받게 하려고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렇게 계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내가 이렇게 선민 이스라엘과 대하였으니 너희도 여기에서 본을 받아서 이렇게 서로 서로를 대하여라"는 말씀을 하시자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적용된 원리 원칙은 신약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 원칙인고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원리 원칙은 똑같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되 행위로 구원받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셨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실패를 했음으로 해서 신약에 이르러 가지고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새로운 길을 여셨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고 성경에 있는 원리 원칙을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은혜로 일관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원리 원칙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 앞으로 전개되는 강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흘러 왔느냐 하는 것을 간단하게 표시한 그림이다.
여기에 구름이 보이는 것은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최초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최초의 순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직접 개입을 하시고 지금가지 우리와 동행하여 오시고 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총체적으로 개입이 되셨습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의 선민의 역사 가운데 개입이 되셨고,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신 그 33년 동안이라는 생애에 구체적으로 개입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든 생애와 업적과 교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구약에 일어난 '빨간선'으로 된 사건을 확실히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예수님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구약의 역사를 잘 이해를 하게 될 때에는 모든 역사의 비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우리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서 가지시는 그분의 의도와 그분의 거룩한 뜻을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옛날에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아니다.
다음 그림을 보라.
이것은 옛날 고대 근동 지방의 지정학적인 그림이다.
보시다시피 애굽 나라와 바벨론, 수리아에 대해서는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여러 이방 민족들이 주변에 있는 가운데 그의 선민을 택하셔서 그 한 가운데 이스라엘을 두셨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땅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아주 조그마한 땅 덩어리이다.
옛날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바벨론이 애굽으로 쳐들어 갈려고 한다면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을 거쳐서 쳐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애굽 나라를 쳐들어 갈 때 여러분이 알 수 있듯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소리도 없이 발뒷꿈치를 들고 조용히, 아주 얌전하게 거쳐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군인이라고 하는 것도 결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존재들이 아니다. 그리고 군대가 쳐들어 갈 때에는 식량을 빼앗고, 음료수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모든 여자들이 겁탈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그마한 이스라엘 나라가 이러한 강대국들의 밥이 되어 가지고 그 발뒷꿈치 아래 사정없이 짓밟히게 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와 같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전쟁의 정벌군들, 그들 앞에는 언제나 그들의 신들이 그 전쟁을 이끈다는 사실을 믿었다. 싸움은 신들의 싸움이고 인간의 군대라는 것은 다만 신들의 수족에 불과해서 신들의 명령을 옮길 따름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될 때에는 어떤 개념이 따르는가 하면, 패배된 나라의 신이 정복한 나라의 신에게 그 힘에 있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복을 당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복을 한 나라에 들어간 전승국의 전승군은 자기 나라의 신의 우상을 피정복 나라의 신전에 다가 당연히 갖다 모시는 것이 고대 사회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자는 것은 "우리의 신은 너희의 신들보다 강력하고 너희들은 우리 신에 지배를 받는 어줍지 않는 존재들이다" 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선민에게 벌어졌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은가?
가령, 이방 나라의 우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해서 예루살렘 신전에 다가 갖다 놓았다고 했을 때 그 백성들이 어떠한 느낌과 반응을 가졌겠느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이방 나라의 신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을 모욕을 한다 든가, 그것을 성전에서 내다 버린다고 했을 때에 그것은 사형을 의미하는 것이고, 저들은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는 거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팔자가 좋은 기독교냐? 그렇지 않으면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전쟁터의 기독교냐? 어느 것이 과연 진정한 기독교냐 하는 것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도 역시 현실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나라들의 종교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들이 가진 신들은 이름이야 어떻게 붙여졌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그들의 신관은 똑같다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시스' 라고 하는 애굽의신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에는 '이스다', 혹은 '탐루스' 라고 하는 신들을 섬겼고, 수리아와 가나안에서는 '바알'을 섬겼고, '아스다곤'을 섬겼던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공통적인 성격을 가졌느냐?
그들은 말하기를 '신들은 많이 있다'라고 했다.
여기 위에 있는 것은 여신과 남신의 상징이다. 치마를 입으면 여신이고, 바지를 입으면 남신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종교 이외의 종교들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이냐?
물론 다른 종교들이라고 해서 거기에 도덕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윤리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다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종교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인간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것이다라고 그들은 윤리 문제와 도덕 문제를 생각했다.
따라서 저들은 오른쪽에 보면, 돌비, 율법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은 자기들과 관계없는 것들이고 자기의 종교와는 무관한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보면 땅에서 자라나는 초목이라고 할까, 곡식들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쌀을 재배하고, 미국에서는 옥수수나 호주에서는 밀 같은 것을 재배하고 있다.
여기에 구름층이 있어 가지고 땅에 비가 내리게 되면 비는 땅과 흙과 혼합이 되고 거기에서 모든 어머니와 같은 대지가 곡식을 자라나게 하면 거기에서 인간이 먹을 것들이 나온다는 생각을 가진다.
전세계 도처의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모든 초목도 곡식도 자라게 할 수 없고, 각 곡식이 자라지 못하면 열매도 맺히지 못하고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은 똑같다. 그러니까 고대 사회는 비가 꼭 와야 된다.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 자랄 수 없으므로 비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그러면 비는 어떻게 해서 오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저들의 생각은 하늘에 있는 저들의 남신과 여신이 서로 성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때에 비로서 그 결과로 비가 오게 된 것이다는 결론을 지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문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뜻대로 잘 안된다, 마음대로 신들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가령, 성적으로 남신과 여신이 흥미가 없어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크나큰 근심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없다. 그러니까 성전 안에는 성(sex)을 전업으로 하는 창기가 항상 있었다. 그래서 예배자가 성전 안에 있는 창기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 사실이 하늘에 있는 남신과 여신을 자극해 가지고 성교를 가지게 하고, 또한 그 결과로 비가 내리게 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들은 농사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신을 주물럭주물럭 해 가지고 교묘하게 이용할 수가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고대 사람들은 가졌던 것이다.
바벨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98%가 우상을 섬겼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상만을 섬기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적인 문란을 가져오고, 그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인 순결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하나님을 조작할 수 없고,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할 따름이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하면, '팔을 꼬집어 내 소원을 성취한다'는 말이 서양 속담에 있습니다만, 내 소원을 하나님에게 요청해 가지고 내 소원대로 무엇을 해 내자는 생각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앉아 계셔서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해 주기 위해서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것을 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제 공부를 해 나가는 가운데 이러한 사상이 하나의 저류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의 밑바탕에 흐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