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과. 기도의 특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기도론'이다. 26과에서 우리는 기도의 특전과 올바른 기도의 접근, 그리고 이중적인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는 식으로 충고적인 기도를 한다. 마치 자기가 고문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이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면서 충고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그 말씀해 주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이것저것을 하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바라고 부탁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교재 p.273 위에 보면 각종 숫자가 나와 있다.
과학자들은 은하계 안에는 약 10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한다. 최신 망원경을 사용하면 적어도 그러한 은하계를 약 1억 개 이상이나 더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숫자가 이론적인 우주 공간의 그것에 비하면 10억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빛의 속도 즉 1년에 약 9조 4천 670억km로 여행할 수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은하계의 직경을 횡단하는 데는 약 10만년이 소요된다. 관측된 외계에 도달하는 데는 무려 120억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 가를 아실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을 주고받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부르는 그 언어와 마찬가지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보잘 것 없고 죄악되지만 담대함과 더불어 확신을 가지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는 않는다. 기도로써 우리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대화를 나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고, 또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아바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에 거만하고 자랑스럽게 자신을 뽐내면서 갈 입장은 아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가 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곧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확신을 주셨다. 우리가 우리의 한 행동들을 되돌아 볼 때에는 우리가 감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내 모습이 너무나도 추하고 더럽기 때문에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한 분의 이름이 떠오르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가 되시는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다는 것은 죄인된 우리들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스스로 자존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흔들어 깨우는 심정으로 기도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반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어 깨워서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림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 위에 오른쪽에 있다. 그리고 '쉐키나'라고 하는 구름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상달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상징에서 알 수 있듯이 화살표는 우리들에게 내려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의 마음을 우리에게로 열려 있다.
동그란 것은 죄를 상징한다. 사실 인간의 기도는 완벽하지 않다.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한다. 이기주의적인 기도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죄인이다. 이처럼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범죄를 하였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림에 보면 가운데 종으로써 왕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종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해져서 하나님께 상달이 된다.
그림에서 예수님께서 가운데 계십니마만 여기에 십자가를 하나 그려 넣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의 죄 문제가 용서되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죄 문제가 해결된 입장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든 것은 기도를 할 때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상징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엎드려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힘을 주시도록 기도를 했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수많은 물질적인 문제로 기도하시지를 않으셨다. 성경 그 어디에서 예수님께서 물질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내용은 없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서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바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니까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향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상황을 그에게 알리는 하나의 수단으로써만 생각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이야기하시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으시려고 하시며, 또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한다.
다음의 그림(26A)이 이것을 잘 말하고 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들어주시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일치화의 권고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일치하는 입장에서 기도하라는 말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조작하고 조종해 가지고 어떠한 응답을 얻어 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하며 그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순종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종으로서의 왕이신 예수님이 나온다.
예수님의 모습이 나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상징의 내용이다.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겸손하게,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마음과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닮도록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특별히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자세로 기도를 해야 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본보기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의 모범은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도무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불평을 하게 된다. 성경에 말하기를 문을 두드리면 열어 줄 것이고, 찾으면 만나게 될 것이고, 구하면 받는다고 했는데 왜 열어주지도 않고, 나에게 쥐어 주지도 않고, 만나게 해 주지도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물론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구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하시기는 한다.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이것은 안 된다" 며 부정적인 응답을 하신다. "좀더 기다려라"며 지연하는 응답을 해 주시기도 하신다. 그런가 하면 "너의 뜻대로 하지를 말고 내 방법대로 하라"면서 변경을 요구하는 응답도 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들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마치 슈퍼마켓과 같이 생각을 한다. 우리는 슈퍼마켓에 가면 원하는 것을 다 구할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온갖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슈퍼마켓으로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가시적인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 그림 26B를 보도록 하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으로 응답하실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저 덮어놓고 원한다고 해서 이것저것을 주시는 응답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군에 입대한 한 젊은이가 해외에 있는 어느 전선에 배치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몇 알의 목화씨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군복을 만들어 입을 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목화를 잘 키워야만 할 것이다. 또 소도 몇 마리 끌고 가거라. 잠시 틈을 내어 그 고기를 요리하여 구워 먹으면 참 맛이 있을 것이다. 또 너는 군화를 만들 가죽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또 몇 가지 연장 도구들을 가져가는 것도 잊지 말아라. 좋은 총을 만들려면 이런 도구들이 꼭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전선에 배치될 때에는 싸움을 위해 가는 것이다. 그는 신속하게 적을 발견하여 효과있게 싸우는 일에 온 정신을 다 쏟아야만 할 것이다. 그는 보급품들에 관해서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사령관과 보급과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마음놓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께서는 악마와 제일선에서 접전하는 군사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계신다. 우리는 싸워야 하는데 전념해야 할 것 같으면 싸우는 군사가 먹어야 할 군수물자는 다른 군대가 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싸우고 나는 너희들이 먹을 것을 공급한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것이 필요없다. 우리는 다만 기도만 하면 된다. 기도는 수첩과도 같다. 군대에서 수첩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여러 자료들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기도는 수표와도 같다. 그런데 이 수표가 부도가 나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사령관이 되시며, 아울러서 보급과의 임무도 맡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것을 다 가지고 계신다. 여기에서 '일용한'이라는 말은 당시에 파피루스 종이에다가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적어서 여인이 '바자르'시장에 가서 그것을 사온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하루가 허락되었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뜻이다. 내일은 내일이 되면 해결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며 살아간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오직 하나님께만 바라야 하는데 탐욕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또 다른 것을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군인이 시간 시간마다 자기가 먹을 것이나 요구한답시고 싸우지를 않고 뒤를 왔다갔다하면 그 전쟁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싸우는 군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른쪽 그림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신 능력과 종되신 왕의 은혜를 힘입어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원을 힘입어서 사탄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재 p.278의 'C. 무엇을 위해, 무엇에 관해 기도할 것인가?'를 보도록 하자.
우리들이 "영적인 일들"과 물질적인 일들"에 대해 기도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 우리는 매우 명백한 일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a.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
b.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
2.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일들과 상황에 관하여 기도할 수 있다:
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물질들을 공급해 주시도록.
b.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들을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도록.
c.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들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d. 우리가 처한 다양한 상황(질병과 비극적인 일 등)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활을 본받는 자세로 처리할 수 있도록.
3.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거나 조언자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그의 은혜로운 섭리에 순응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