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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음 성경대학

Heart of Christ Bible College & Christian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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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과. 성경의 핵심: 율법과 복음

 

21과는 '구원론'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이 단원에서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율법과 복음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그림(21)을 보도록 하자.


 

여기 가운데 있는 사람은 일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는 여러 가지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죄에 대해서는 잘 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하는 죄의 본질이라든지 사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죄의 본능은 이렇게 많은데, 그러면 영원히 죽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그가 여기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잇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즉, 왼쪽에 있는 것처럼 공로를 통해서, 그러니까 선을 행하는 행위나 계명을 지키는 것 등을 통해서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그에게 해답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왼쪽에 있는 그림을 바라본다.  그래서 자기들이 성취한 여러 가지 선행이나 업적을 통해서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잘못된 생각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서 에덴 동산에 거하게 하셨다.  만약에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너희들이 율법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가정을 해 보자.  그와 같은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벌써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만들 때에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살도록 하셨던 것이다.


 

영어 단어 가운데 율법은 구원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직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율법만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은 율법을 그대로 다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을 다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우리의 행위가 전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구원에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믿음으로 충성되게 살았느냐 하는 행위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다음으로 p. 210에 있는 그림(21A)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개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는 전혀 새로운 단어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벌써 이미 사용하고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죄의 개념도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맨 위에 그림에 보면 과녁이 나오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왼쪽에 있는 그림대로 봉사하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고 오른쪽에 있는 그림처럼 죄의 권세에 살고 있다.


 

2번의 그림, '잔디 위를 걷지 마시오'라는 것은 걸어가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죄악된 상태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잘못을 언급하는데 통상적으로 사용된다.


 

3번의 그림, '선을 넘어가지 마시오'라는 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을 넘어간다.  밑에 있는 것은 조그만 벌레들인데, 이 벌레들이 조금씩 조금씩 갈아먹으면서 넘어가듯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법을 조금씩 조금씩 깨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을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3번의 죄는 2번의 죄보다는 중한 죄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4번은 '반역'이라는 말이다.  1∼4에 있는 모든 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죄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의 뜻을 의미하고 있다.  반역이라는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며 무시한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p.212의 그림(21B)을 보도록 하자.


 

왼쪽에 있는 그림은 죄의 온도계이다.  맨 밑에 있는 그림은 죄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고, 위로 막대가 그려져 있는 것은 온도계이다.


 

이 그림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맨 위에 잇는 그림은 마치 마피아, 갱단과 같은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마피아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주 나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과 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과녁을 향해서 총을 쏘는 것같이 악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말한다.


 

다음에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이것이 죄인가를 의심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부자가 되고,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가 중요하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돈을 벌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이다.  성경은 돈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것은 아주 신기해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더욱 좋아지고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데, 사람들은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보다 풍성한 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머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은 나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괜찮다고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돈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느냐,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하느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 쓰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우리가 돈을 조종하며 살아야지 돈이 우리를 지배하며 조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자신만을 위하여 즐기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려는데 있다.  사람들은 모든 물건이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물건이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탐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죄악이다.


 

세 번째 그림을 보라.  많은 사람들은 세 번째 그림과 같은 것은 하나도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손에 쥬스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실 것을 들고서 편안한 쇼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지금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5살이 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대략 5,000 시간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다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5살이 될 때까지는 약 15,000시간 정도를 텔레비전을 보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지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 교육자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적합하도록 교육과정을 짜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텔레비전 자체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개중에 어떤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교육적으로도 유익한 것들도 있다.  문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는 것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소모한다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단순히 남에게 해를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보다 더 유용하게, 우리의 생명을 보다 더 유용하게 바쳐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를 불렀다.


 

지옥에 어떤 사람이 가느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간다.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  그렇다고 그가 어떠한 선한 일을 행한 것도 없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든가?


 

그러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텔레비전 유해론, 내지는 무익론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생활에 텔레비전 문화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우리의 생활의 리듬을 깨트리거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빼앗기게 된다면 텔레비전은 악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악이 될 수 있는 '필요악'이다.


 

p.214에 있는 그림(21C)을 보라.


 

여기에 있는 그림은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다.  이 그림은 이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왼쪽 1번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큰 구덩이가 있어서 이것 때문에 큰 간격이 생긴 것을 본다.  그가 하나님과의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한다.  그래서 2번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는 3번 그림에서와 같이 자기가 행한 여러 가지 선한 일들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서 세 개 반 정도를 행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기가 한 일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선하게 보여진다.  이제 문제는 그렇다면 내가 행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에게 문제가 되어진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있는 간격을 연결시켜주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될 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한다.


 

p.216에 있는 그림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방금 살펴본 것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1번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 있는 큰 간격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열심히 선을 행하여 나 자신의 능력으로 건너가겠다"고 생각을 한다.  여기에 있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라.  그리고 그의 머리 주변에 있는 후광과 천사의 날개를 보라.  그는 지금 자신감에 차 있으며, 스스로를 아주 대견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능력으로 이 다리를 건너가고자 했을 때 결국은 그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교통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꿀려고 한다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극복되어지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놓으신 십자가의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떤 나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그의 품 안에 안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놓아주신 길이다.  여기에서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제 p.218에 있는 그림(21E)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이 그림은 아주 중요한 요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신뢰할 것은 두 개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  소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사실은 무엇인가를 붙들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하도록 하자.


 

여기에 있는 배는 하나님의 선하신 배이다.  이 배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함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 이 배 위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모두가 죄의 물결 속에 있다.  그러면 죄의 물결 속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붙들어야 되겠는가?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결국 그가 붙드는 것은 두 개의 구명대 중에 하나를 붙들어야 할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것은 인간적인 환각에 불과하다.  왼쪽에 있는 구명대는 선행의 구명대인데, 여기에 보면 화살표가 위로 향해져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갈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왼쪽에 있는 구명대를 붙잡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 자기의 어떤 선행이나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를려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요 하나의 환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른쪽에 있는 구명대는 하나님에게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화살표를 보라.  위에서 밑으로 향해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진 구명대이다.  왼쪽에 있는 구명대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오른쪽에 있는 구명대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져서 우리를 바로 이 배 위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그림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그림에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의 한계는 마치 하나님은 안전하고 편안한 배 위에만 계셔서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구명대만 던지시는 분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빠져있는 딜레마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주님 자신이 물로 뛰어들어서 우리에게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명대에 있는 우리들을 배 위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가 구명대를 타고 배 위로 올라가게 될 때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의 위험성이 있다.  그러면 이 배 위에 탄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배의 시설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다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프로그램이 어떻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다 말 것인가?  물론 배 위에서 우리를 재미있게 해 주는 그런 프로그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그림은 잃은 자에 대한 어떤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표현되어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거기에 가면 아주 편안하고 좋은 그런 장소로만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교회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남들을 구원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우리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밑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것이냐?


 

가끔 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을 해 본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허리에다가 손을 대고 서 있는가?  왜 손을 높이 들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 해답을 이렇게 내려본다.  사람이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치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도록 만드신다.  죽은 자들을 살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요점이다.  사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가 없다.


 

p.220에 있는 그림(21F)을 보도록 하자.


 

방금 살펴본 그림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더 지적하려고 한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이 그림에도 몇 가지 한계가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배가 있고, 구명대가 있고, 그것이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구명대 위에는 종으로써의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그리고 그가 무덤에서부터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구명대를 붙들고 있는 나약한 손은 이 구명대를 붙들려고 하는 인간의 손을 의미한다.


 

과거에 교회사들을 통해서 볼 때에 교부들은 구원하는 신앙이 무엇이냐?  거기에는 세 가지 3대 요소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지식이고, 둘째는 동의, 그리고 세 번째는 확신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지식이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우리가 믿는 대상이신 그 분이 어떤 분이냐?  그가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내 마음 속에서 쨍하고 느끼는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것은 인격에 대해서 의존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동의.  여기에서 동의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 분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확신은 내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 그밖에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구원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 있는 그 어떤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자체가, 내 생활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행한 어떤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나를 구원하신 그분을 붙드는 것을 말한다.  신앙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을 때 신앙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하는 신앙은 어떤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될 때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이 되는 것이고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내가 산에 들어가서 거기에 집을 짓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개인적인 어떤 신자라는 것은 없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는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갖게 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되는 것이고,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따로따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삶을 통해서 좀더 살펴보자.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날씨가 덥다든가, 아니면 어떤 일 때문에 "오늘은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 두자"라고 생각을 할는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꼭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거와는 다른 것이다.  교인들, 다른 교인들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그 교회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있다.  물론 어떤 때는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굉장히 피곤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정말로 집에서 푹 쉬고 싶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 것,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를 주고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앉아있는 그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성령 사역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성령이라는 말이 때때로 '보혜사'라는 말로 번역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보혜사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파라'와 클레토스'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 사회에서 군인들이 둘이 함께 같이 가게 될 때에는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갔다.  그렇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께서는 마치 군인처럼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가시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일을 하신다.  따라서 우리도 마치 보혜사처럼 서로서로를 함께 가면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한다.  소위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에서 굉장히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아주 비참한 결과를 교회에 가지고 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미룬다든가 회피하게 된다.  예배를 등한히 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교회에 안수집사가 있고, 운영위원이 있으니까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교회라는 곳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여 있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는 우리들을 위로하시면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  그리고는 우리를 격려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해 주신다.  그가 입술로만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표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서로 격려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해서 이것이 목사인 저를 크게 격려하고 위로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해서 우리 교회가 살아있으며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제 p.222에 있는 마지막 그림(21G)을 보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도 등급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신앙이 제일 좋고 등급이 가장 높은 사람은 목사님들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맨 밑에 있는 사람은 우리 교회의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맨 밑에 있는 사람은 "저 위에 있는 목사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밑에 있는 사람은 "나도 저 목사님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가까이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믿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때로는 절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는 등급이 없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똑같은 수준에 있다.  믿음에는 결코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구원의 방패에 불과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 있는 이 그림은 에베소서 2장 8∼10절에 있는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에베소서 2:8∼10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인하여"라고 말씀하셨지 "그 믿음을 인하여"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구별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온다.  그 다음에 신앙이 따라 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 10절에서는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했는데 보다 정확한 번역은 "봉사를 위하여"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훨씬 더 의미가 깊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에베소서 2장 8∼10절을 무시하는 경향을 볼 수가 있다.  교재 p.223에서 B의 3번에 나오는 번역은 예루살렘 번역과 새영어 바이블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번역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해서 현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든 그 본래의 뜻을 회복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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