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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음 성경대학

Heart of Christ Bible College & Christian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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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기독론에 있어서 신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오늘 18과에서 부제를 '하나님은 누구시냐?'라고 덧붙일 수가 있다.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신관은 참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삼위일체론에 관한 부분은 더더구나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분명히 세 분이면서 하나라고 하고, 세 분이 동등한 본질이라고 하면서, 순서가 있다고 하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교리에 관한 질문은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인도해 본 사람이라면,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중의 하나로 느끼실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성도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교의 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 박사의 저술에서도 같은 어려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삼위일체교리만큼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라고 교회는 자백한다.  즉 사람이 능히 완전하지 못하며 이해되기 쉽게 설명하지 못할 진리이다.  유한 자는 무한 자를 이해하기 곤란하니 성부, 성자, 성령의 신기한 품위는 교회의 최대한 신학자들의 모든 연구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비로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교리가 너무도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물질계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의 유추, 물의 비 눈 얼음, 태양의 빛 열 시간, 곤충의 알 유충 나비의 유사한 예증과, 클로버의 세 잎의 예를 들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삼위일체론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합니다.  사실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敎理)는 성경전서(聖經全書)에서 가장 난해(難解)한 교리이므로 충분한 설명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三位一體敎理)는 인간이성(人間理性) 영역밖에 있으므로 사람의 지혜(知慧)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인간이 성경에 계시된 외에는 하나님의 대해서 전부(全部) 알 수 없듯이 삼위일체도 전부 알 수가 없다.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충분(充分)한 이해와 설명을 시도(試圖)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찻잔으로 큰 바다물을 되어보려는 것과 같은 어려운 신비의 교리이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도표가 있는데 이것이 그 중에 하나이다.


 

여기에 보면, 성부의 위, 성자의 위, 그리고 성령의 위가 나와 있다.  그리고 '아니시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시다'라는 말이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같지 않지만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 이시다는 거다.


 

그림에 보면, 성부 하나님은 활짝 편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적인 손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성자에 대한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전 생애는 구원적인 봉사로 일관되게 사셨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림과는 조금 변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십자가가 있음직한데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을 살펴볼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수난 금요일만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난 금요일 그 이상의 훨씬 광범위한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가지시는 의미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령은 비둘기로 표시되고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지금도 세상에 유형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처럼 역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사역들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아래 그림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손을 들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나와 있다.  사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심오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교회가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그러한 설명은 자고이래로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비를 완전하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고 다만 믿을 뿐이다.  바울의 글을 읽어보면 어떠한 신비한 신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말 대신에 이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앞에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에베소서 1장 4∼13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찬양을 드린 긴 서사시 같은 것이 나온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 볼 것 같으면 이렇게 긴 문장이 거기에는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영어에서는 이것을 6개 문장으로 잘라서 이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만 헬라말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이 성구는 삼위일체에 대한 찬송가이다.  거기에 보면, 성부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가 하면, 성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또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 끝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감탄사를 반드시 삽입했다.


 

사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설명한답시고 듣는 사람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하는 대신에, 우리가 오히려 바울과 같이 찬양하는 마음으로 유도해서 구구절절이 아멘으로 끝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그림(18A)을 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몇 가지 흥미있는 주장들을 볼 수가 있다.


 

그림 가운데에 보면 의문(?)과 더불어 대단히 혼란에 빠진 어떤 사람의 표정이 그려져 있다.  사실 이 그림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들을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그림은,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1/3씩 분할을 해서 1/3은 성부 하나님이고, 1/3은 성자 하나님, 그리고 1/3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구분을 지어서 생각하는 견해들이다.  이것은 분리를 통해서 영원을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로써 '분리해석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두 번째 그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하나의 독립적인 신으로 다루는 견해들이다.  이것을 삼신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삼위의 하나님을 각각 다른 삼신의 하나님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들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래의 두 개는 훨씬 더 위험한 견해들이다.


 

세 번째 그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같은 신이지만 그 직능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순회적으로 일을 하기는 하시지만 다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명칭만 바뀔 뿐이지 따지고 보면 한 위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시계가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때로는 성부로서, 때로는 성자로서, 때로는 성령으로서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라고 해서 시간만 바뀔 따름이지 결국은 한 하나님만이 일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으로 '양태론적 신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때에 따라서는 각각 다른 양태로 나타나서 그 양상이 다를 뿐이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고 말한다.


 

마지막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는 불행한 현상입니다만 그러한 삼위일체관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만이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으로써 신격을 온전히 갖추신 하나님이시다 라고 해석을 내리고, 그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를 낳으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창조나 교회에서 역사하실 때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능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호와 증인과, 몰몬교가 이러한 신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림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교회 주변에는 이러한 위험한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교재 173 쪽의 맨 밑의 단락을 보시기 바란다.  함께 읽어 보자.


 

삼위일체에 관한 성령의 가르침은 하나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비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삼위일체는 한정된 인간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믿고 찬송해야 할 대상이신 것이다.


 

어거스틴이 바닷가를 거닐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을 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자기 앞에 어느 어린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앉아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기 앞에 파놓은 조그마한 구멍에 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물었다.  "너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바닷물을 다 퍼서 여기 넣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어거스틴은 깨달았다.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그리고 다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본 것은 환상이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했느냐 이것이 문제지, 그것이 합리적이냐. 이치에 맞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어느 쪽이 사실이냐 그것만 문제가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오셨으면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것이 가능하냐 아니냐?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이치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무슨 상관인가?  오직 믿음으로 묻지 말고 믿어야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격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  우리에게 좀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판단이 다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자.


 

다음 그림(18B)을 보라.


 

이 그림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소유주가 되시며,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교인들 가운데 보면, 하나님의 삼위를 너무 예리하게 구분을 해서 갈라놓으려는 태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흔히 말하기를 창조를 한 주역은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구속의 사역을 한 십자가는 성자 하나님만이 하신 것이며, 성화의 작업은 성령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라고 엄격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천지 창조에 있어서나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나 인간을 성화시키는 성결의 과정에 있어서나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공동으로 사역하셨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림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소유주이시며, 공급주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찾아보자.


 

맨 위에 보면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림이 나와 있다.  그리고 밑으로 활짝 편 손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자신의 손바닥 가운데 두시되 보호하시지만, 엄지손가락과 같이 보호하는 역할도 하시면서 거기에 인간 세계를 보존하고 계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 주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그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지금도 하나님이 그것을 소유하고 계시면서 섭리하시고 조종하신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사람의 그림이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을 것과 입을 것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림에 보면, 먹는 것과 마시는 음식과 돈, 사는 집, 그리고 가축과 가족의 문제 등 일상생활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잡혀 있다는 것이다.


 

밑에 보면 아주 야윈 모습의 손이 나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풍요로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이 우리가 무슨 받을 권리가 있어서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빼앗는 것도 아니다.  마치 거지가 간절히 동냥할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저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저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서 살아간다.  따라서 이렇게 바짝 마른 손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첫째는 왼쪽의 그림에서와 같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오른쪽의 그림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러한 모든 것을 나에게도 쓰지만 이웃에게 대해서 봉사하면서 겸손히 섬기는 삶으로 살아야 한다.


 

다음 그림(18C)을 보라.


 

이 그림은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몇 개라고 할 것인가?  그것을 헤아리는 방식에 있어서는 교회나 성도에 따라서 일정하지가 않다.  영국의 성공회나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에서 이것을 다루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한다면 모세의 십계명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숫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이 몇 개다라고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계명 안에 숨어 잇는 하나님의 참 뜻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왼쪽에 있는 그림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세의 십계명에 관한 내용이다.  이 두 개의 돌비석에는 10개의 계명이 쓰여져 있다.  1∼4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기록하고 있고, 5∼10은 이웃에 대한 계명으로 구분되어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개의 계명, 즉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특별히 5계명부터는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먼저,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부모와 자녀와의 아름다운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 계명은 결국 건강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계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신체적인 보호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언급인데, 결혼을 소중히 여겨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나 자신의 결혼에 관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웃의 결혼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내 것만 소중해서 보호할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도 함께 소중하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


 

9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것은 이웃의 명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의 명성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명예를 모독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10계명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여기에서 '탐내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하나의 신으로 높이지 말 것을 명하고 계신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고 즐기려고 하는 것은 다른 신, 즉 자신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알신을 섬겼던 죄를 범하였다.  '바알'이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무엇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것은 죄다.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자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러 차례 공부를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하나로 다루셔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하나의 선상에서 취급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섬기는 하나의 표준을 정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사역을 통해서 그러한 모형을 찾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계율적인 것이 신약 성경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긴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이웃을 사랑해라.  그런데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그렇게 너희의 이웃을 사랑해라'고 사랑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요약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핵심은 이러한 모든 계명을 압축하고 요약을 하면 우리는 그 분부대로 이웃에 대해서 무릎을 꿇는 종같이 되어서 남을 섬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범주까지의 율법조항이나 분부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서 이행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그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에 발목이 잡히다보니까 전체적인 면에서 나무는 볼 줄 알지만 숲 자체를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보다 잡다한 문제를 근시안적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생을 살아오시면서 종으로 살아오신 것 외에는 어떠한 삶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종의 도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높고 높은 곳, 거기에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을 뿐이다 라고 하는 동떨어진 격리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진실로 나같은 사람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좌정해 계신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가령, 우리가 어떠한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가정을 해 보자.  그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는 것, 이것 하나만을 가지고 따져서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풍요로운 물질을 주셨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을 즐기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어떠한 풍요한 물질을 주심으로 해서 그 물질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가지고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마지막 그림(18D)을 보라.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그림이 나온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소위 화해, 내지는 화목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1의 그림은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했다든지 해서 서로 의가 상해서 서로가 불화의 관계에 놓여 있는 그림이다.  서로가 좋지 않는 관계이다.


 

이들 두 사람이 화해를 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되려고 하면 2의 그림에서와 같이 양쪽이 다 바뀌어져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화목한 관계가 된다.


 

그런데 인간 사이에는 양쪽이 다 화목을 하려고 해야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 드려야 하나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되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해를 해 온다는 쌍방간에 함께 노력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와 같은 비슷한 표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먼저 오셨다.  하나님 쪽에서 나로 하여금 부르셨다.  그리고 나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주권적으로 접근해 오셨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율법적이고 보상적인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접근해 오시고 화해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3번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듣기로 하자.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사랑이 내려올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  문제는 나 자신이 변덕을 부려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의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그림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권고하시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3번 그림에서의 보라빛 그림자가 변해서 하나님께로 응답하는 상태가 되려면 위에 있는 두 개의 그림에서처럼 자아 중심적인 것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맨 밑의 두 사람과 같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 여기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형제와 더불어 먼저 화목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권고하기를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직설적으로 말씀을 했지, 네가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에게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라고 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또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가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혹여 어떤 사람들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그것을 믿으라, 그리고 그 다음에 나아오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선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행동을 할 때에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따라 그에게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람은 이처럼 조건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벌써 우리를 용서해 주셨고, 그 용서해 주신 것을 선언만 해 주면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사랑의 하나님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믿으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가 믿었으면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답게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신다.


 

교재 179 쪽의 맨 밑에 있는 단락을 함께 읽어보자.


 

요컨대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아무런 충고도 해주고 있지 않다.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끊임없이 사랑하신다.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신 그의 사랑을 믿음으로 굳게 붙잡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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