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과. 세례와 출애굽
17과는 로마서 5장과 6장을 중심으로 내용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 단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주제로 전개되어진다.
청교도들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선상에 있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한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과거는 다만 과거일 뿐이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에는 다만 지나간 일을 마음 속에 떠올릴 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과거의 어떤 일을 기억한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옛날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불러 일으켜서 문자 그대로 기억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대 사람들이 기억한다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한다는 말을 쓸 때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을 가지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과거를 기억했다는 말을 쓸 때마다 그들이 기억했다는 그 말 가운데는 여러 가지 사연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성경을 읽어 나가야 된다. 가령, 여러분들이 출애굽 당시에 유대 사람들이 애굽에서 몇 사람이 나왔느냐고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때 다같이 나왔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을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그때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왔고, 우리가 그때 시내 광야를 헤매었고, 우리가 그때 가나안 복지에 들어왔노라고, 우리가 그때 그 일을 했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요약을 해서 말을 하면, 유대인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지금 나 자신의 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선조들에게서 일어났던 그 일이 지금 나에게서 일어나고 잇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17을 보라.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모래 시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위에 있는 그림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험난한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시간 밖에서, 즉 영원에서 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개입하셔서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시고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p. 153 가운데 보면 신명기 26장 5∼9절까지의 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것을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렇다. 이 성경 구절을 기록할 때에는 맨 처음에 자기의 선조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고… 등등 하다가 이야기를 기록해 가는 가운데 어느새 '그들'이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왔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10억 정도는 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는 다만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하고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그러한 사건이 그때에 일어났다고 말을 한다.
여기에 보면, 모래 시계 아래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때 우리에게 언약을 내리시고, 그때 출애굽을 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하면서 그때의 사건이 나에게 하신 일로, 우리들에게 하신 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지금 나 자신의 사건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이 오래 전에 기록된 사건이지만 그러나 이 성경은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이 신앙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성경은 나에게 역사하게 된다.
그러면, 에덴 동산이 창조되었을 때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가 있다. 창세기에 볼 것 같으면 두 사람 밖에 없지 않았느냐고 금방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두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거기에 있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물론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할 때에 문자적으로 우리가 다 거기에 있었다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인간의 범죄 사실과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타락상이라고 하는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전부 아담의 핏줄을 타고났음으로 해서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17A)에서 말하고 있듯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아래의 그림이 원천적으로 어디에서 출발했느냐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사형의 심판을 받았고, 그 결과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미쳤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성경에서 말할 때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 어떠한 면에 있어서도 범죄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 여러분의 죄 때문에 나는 이미 죽었던 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 영원한 삶 속에 나는 이미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지금까지 질문을 한 것은 로마서 6장 3∼4절의 내용을 가지고 잠시 생각을 해 본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현재의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바울이 세례에 관해서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에서(17B) 나오는 사람은 저와 여러분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머리에 성광이 있다. 또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의 상징이 나와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나누어 갖는 것이다 라고 왼쪽 위에 있는 예수님의 생애를 지적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범죄하지 아니하고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면 물론 저나 여러분이나 과거에 죄없이 산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이 무리한 질문이겠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의 생애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듯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무덤에 묻혔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거듭 거듭 강조하는 말이다.
바울은 강조할 때마다 언제나 붙여서 사용하는 부사구가 하나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꼭 부언하고 있다. 영어로 표현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말한다. 주님과 함께 일치가 된 입장에서 말한다 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의 것으로 분담해서 가진다는 말 전체가 세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성광을 그려 놓았는데, 왜 이것을 그려 놓았을까?
이 거룩한 빛의 테두리라는 것은 내가 마땅히 그러한 테두리를 받을만한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여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나에게 값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거룩한 성광을 주셨다는 의미에서의 성광이라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내가 어떠한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이러한 것을 주셨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거룩함의 빛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이러한 일련의 진리를 깨달은 이상 내가 애써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주신 그 자녀의 특권을 내가 깨닫고 그것을 누리고 즐긴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아 거룩하게 된 무리들에게 편지를 쓴다"라고 그들을 규정해서 썼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광을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성광을 받은 자에 합당하도록, 거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드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영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과 가지는 관계성은 구약에 나와 있는 출애굽 당시에 그 민족이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성과 같다. 성경은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한 선상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그림에(17C) 보면 쇠사슬이 있다. 이것은 바로의 지배하에서의 쇠사슬이라기 보다는 신약적으로 볼 때에 죄악의 쇠사슬에 채워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검은 그림은 율법을 말하는 것이고 하얀 그림의 해골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율법과 죽음이 우리를 쇠사슬에 얽매여 놓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종된 애굽 생활과 같은 죄악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홍해를 건너가게 하셨는데, 그것은 세례라고 하는 거룩한 예전을 통해서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하셔서 건너오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가운데 모시고 신령한 교제를 가졌듯이 신약적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령한 교제를 가지게 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화롭게 된 성도, 저와 여러분들이다.
출애굽의 선민들이 40년 광야에서 유랑 생활을 했듯이 우리도 오늘날 세상이라고 하는 거칠고 험악한 사막과도 같은 세상에서 주님을 모시고 생활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던 것처럼 마침내 우리는 죽음의 문을 지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정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죽음을 약속된 영원한 복지로 들어가는 입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로운 출애굽기 제 2탄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알게 되었듯이 신약 성경은 구약의 출애굽의 사건을 역사적인 배경으로 깔고 이야기하지만 그 배경을 신약적으로 승화해서 새롭게 변화를 받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것을 적용했다고 볼 수가 있다.
다음 그림을(17D) 보라.
여기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라. 그는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계율을 다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왼쪽의 그림이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아니 받고의 문제를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했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지어서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의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구원의 문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한다. 이미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시고 성취하게 해 주신 그것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옆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고, 그것을 그대로 살아가면서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는 그런 문제를 붙잡고 새삼스럽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왼쪽 그림은 언제나 마음속에 의심을 가득 쌓이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른쪽 그림은 지금 주님이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신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즐겁게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세례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자.
세례는 자기를 위탁하고 맡기는 예전이라는 주장이다. 마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자기를 맡기고 헌신 또는 위탁의 절차이니 만큼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 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사건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풀어 가는 해석이 있다. 전자는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인간적인 헌신의 절차라고 한다면, 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는 양자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고 하는 두 개의 해석이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인치신 이상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나의 구원을 저해하는 것이 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양자로 삼으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양자답게 살아드려야지 양자로써 살지 않고 무례한 자로 살아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우리는 깊이 있게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그림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제로의 걸작인 다윗의 석상이 여기에 나와 있다.
이 그림은 성령의 상징이요 세례의 상징이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게 되면 자주 이러한 표현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들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벗어 버려라. 그리고 입으라" 이러한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는데 옛사람이 살아남아서 어떻게 나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겠느냐? 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은 우리가 마치 옷장을 닫고 여는데 쓰는 옷을 벗고 입는 용어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사람 가운데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더러운 옷을 벗지 않는 사람이 있다. 둘째는 더러운 옷에다 더 입는 사람이 있다. 세 번째는 더러운 옷을 다 갈아입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옛 것, 낡아빠진 옛 옷을 벗어버리는 것을 싫어하고 언제나 더러운 그 옷을 입고 걸치고 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이런 예화를 들었다.
그는 세례에 대해서 말하기를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옛 사람을 물에 빠뜨려서 익사시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것을 한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를 물에 빠뜨려서 익사하게 하듯이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옛 사람이 어찌나 약아 빠졌는지 물 속에 집어넣어도 이것이 헤엄칠 줄을 알아 가지고 기어 나와서 살 구멍을 찾을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난처하다고 했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제가 살아오는 삶을 되돌아 볼 때에 옛사람이라고 하는 이름이 사방팔방으로 깡충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나를 괴롭힌다고 하는 사실을 체험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왼쪽에 보면 시꺼멓게 더러운 걸레와 같은 옛 옷이 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손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죄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고 오른쪽에 있는 하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오른 쪽 그림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의 종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화살표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으로 의의 새옷을 입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두 가지의 옷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는데, 왼손으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깨끗한 흰옷을 주시고, 오른손으로는 일하는 작업복을 주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그림은(17F) 베드로전서 2장 21절의 말씀을 기초로 그린 그림이 되겠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그림은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하는 그 자취를 설명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하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처음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기억해 보라. 글자를 잘 모르는 그 시절에 우리는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 놓은 글씨를 연습장에 완전히 옮겨 써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왼쪽의 그림과 같이 어떤 알파벳의 글씨를 기록해 갈 때 거기에 써놓은 표준적인 글씨와 똑같이 그 선 위에다가 그대로 흉내를 내어서 묘사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삶에다가 적용한다면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이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먼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지난날의 어떤 율법의 주문이나 율법의 법전을 회고하고 되돌아보면서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여러분이 아시듯이 소아시아에서 기록이 되었다. 그들은 참으로 험악한 시대를 살면서 이 편지를 기록했다. 이러한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믿지 않는 이웃은 어떻게 했느냐?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조소하고 욕지거리를 퍼붓는다든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해 가면서 신앙을 지켜야만 했다. 왼쪽 밑에 원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이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그림에서와 같이 로마 군인과 권력이 그들에게 모진 핍박과 박해를 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핍박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리를 꼭 지키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북돋워 주고 그들이 날마다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써 보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언제나 그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일에 반영해야 할 것이고, 주님이 살아가셨듯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러므로 그림에 나와있는 연필로 그려가는 모습은 예수를 어떻게 본받을 것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우리가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완전하게 그린다고 하는 것이 이 정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삶의 고백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 위해서 그려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그림으로 해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실 것이다 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님이 나를 받아 주셨다. 이미 나를 받아 주심으로 해서 그 사실에 대한 감사로 불완전하지만 이 그림을 그려간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이 그림이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성경의 심오한 가르침을 알기 쉽게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 그림을(17G) 보자.
이 그림은 회심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회개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회심과 회개,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에서 혼선을 빚는 경향이 있다. 사실 회심과 회개라고 하는 것은 피차 상호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생각을 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앞으로 쭉 걸어가다가 갑자기 180도 전환을 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위에 있는 사람은 왼쪽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자기 머리 속의 뚜껑을 열어 가지고 자아 중심적인 일체의 죄악들을 다 내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것을 머리에 받아들이는 그림이 나와 있다.
위의 그림과 같이 방향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면, 밑의 것은 마음 속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을 다 청산해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뒤바꿔 놓는다고 하는 것이 회개의 뜻이다. 회개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옛 생각들은 다 물러가고 마음 속에는 새로운 생각들로 채워지게 된다.
위의 그림에서 발걸음이 구부러진 것은 자아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렇게 만들어 주심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왜 이 말을 자꾸만 되풀이해서 하는가 하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내가 행동을 하고, 도덕적으로 역행을 함으로 의롭게 되어 보려고 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