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답변
우리가 지난 단원에서 공부를 해서 아시겠습니다만,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우신 내용이 없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전체가 사탄과의 싸움으로 되어 있다.
그림 14-1에서 왼쪽에 있는 그림은 지난 단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해를 하실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지팡이 주변에 뱀이 있다. 우리가 이사야서나 구약의 성경을 보게 되면, 메시아가 오게 될 때에는 장님이 보게 될 것이고, 벙어리가 말하게 될 것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나온다. 여러분이 잘 알 듯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러한 일을 하신 그분이야말로 메시아다 라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물이 있고, 하얀 달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시면서 폭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폭풍을 잔잔케 하실 수가 있고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폭풍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걸어가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증거해 준 것이다.
사탄의 얼굴이 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탄과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사탄이 예수님과 대항해서 싸우게 될 때에 사탄은 언제나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탄은 무서워했다.
무덤과 해골의 그림을 볼 수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죽은 자를 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이처럼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그가 바로 메시아인 것을 보여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왔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구약에 예언되어진 메시아의 역할을 하셨습니다만 '내가 누구다'는 것을 그들에게 공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보고서 추측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구체적으로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당신이 누구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메시아인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지 내가 누구라는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메시아라 하는 사람이 왔다고 말하는 것을 예수님은 원치 않았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 22∼10장 52절에는 중요한 대목들이 소개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부분에는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가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그림에서 1, 2, 3이 나오고 십자가가 옆으로 뉘어져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에 관한 예언을 세 번에 걸쳐서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수난의 예언을 하셨는데 이것은 각각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것과 연결이 되어진다.
첫 번째 수난에 대한 예고는, 마가복음 8장 31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그때에 하셨다.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십자가의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고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수난에 대한 예고는 마가복음 9장 30∼32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의 예언을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에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암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변화를 맛본 사람만이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변화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 번째 수난에 대한 예고는 마가복음 10장 32∼34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세 번째 수난의 예언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면 십자가도 이해하지를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린양으로서의 인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알아야 그가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수난에 대한 예언은 제자들을 놀라움과 혼란 가운데로 몰아 넣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당해야할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수난의 예고 있기 직전과 직후에 예수님은 눈 먼 소경들을 보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행해 던지는 질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너는 믿음의 눈으로 얼마만큼 볼 수 있느냐?" "그대들은 그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보고 있는가? 그대들은 그가 어떤 메시아로 오셨는가를 분명히 보고 있는가? 그대들은 비록 눈을 뜨기는 했지만 여전히 소경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성경의 이러한 구조를 대하면서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고 굉장히 의미 깊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받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주일과 월요일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다음에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이 나온다.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모든 죄악으로 성전이 완전히 더렵혀진 것이다. 모든 세계 만방의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신 것처럼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여기 한 사람이 서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참 이스라엘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점점 줄어들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 한 분만이 참 이스라엘이었다. 구약에 있어서 성도가 점점 줄어들어서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그 시점에는 오직 예수님 혼자였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것이 그림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 참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종이며 왕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섬기는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너희도 그렇게 종된 자의 자세로 겸손하게 섬기면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과 죽으심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되면서 제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은 다 버리고 도망을 갔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마침내 유대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뻐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회개를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욕한 것이 나와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예수님 혼자 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바로 그 순간에는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로마인 한 사람은 거기서 신앙 고백을 했다.
유대인들은 '네가 정말 메시아라고 한다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로마인 한 사람은 그가 메시아이심을 믿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난다.
여기 십자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에는 단 한 사람만이 믿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살펴보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소경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유대인들은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을 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을 철저히 영적인 소경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서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지 못하셨다면, 그는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니면 또 다른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 새 이스라엘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수난 사건 이후에 좁아졌고 십자가에서는 오직 예수님과 이방인 백부장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왕국이 점점 커진다. 여인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당황했다.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살아나셨다. 그는 그가 말씀하신 그대로 종이시며 왕이신 메시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관은 그 당시 사람들, 그리고 오늘 교회와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 도전을 주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제 그림 14―3을 보라.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주간 한 주간에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들이다.
첫 번째 그림은, 세금 문제에 관한 질문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들의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
마가복음 12장 14절과 15절을 읽어보자.
막 12: 14-15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 질문에는 예수님을 로마인이나 유대인에게 모두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도록 꾸며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귿르에게 가이사나 하나님께 세금을 바치는 것은 '둘 중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의 문제임을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의 그림은 몸의 부활의 문제에 관한 질문이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비꼬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다. 이 내용은 마가복음 12장 18 ∼27절에 기록되어 있다. 사두개인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세 번째 그림은 율법에 관한 질문, 즉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정도의 문제에 관한 질문이다. 이것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마땅히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막 12:30, 신 6:5), 도대체 사람의 이웃이 누구이며 그를 얼마만큼 섬겨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밀접하게 결부시키셨다. 두 계명은 실제로 하나이며 그 누구도 분리시킬 수가 없다고 하셨다.
마지막 그림은,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다윗의 후손이냐?' 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질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야 대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던진 예수님의 질문이다. 그들은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에 대해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오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이상의 분이시다. 그는 다윗의 주가 되실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다윗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p.130에 나와있는 그림을 보라.
여기에 나와있는 그림은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났던 사건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건에 비유를 해서 우리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단원에서 출애굽에 관한 사건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었고, 그림도 보아왔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때까지의 노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거기에다가 그림 14A를 올려놓는다고 한다면 아주 비슷한 그림이 형성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동네에서 탄생하셨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원수들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바로는 이스라엘을 말살하려고 하는 시도를 했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다음에는 마치 새로운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을 말살하려고 헤롯이 시도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의미에서 애굽에 내려가셨다 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기 된 것이다. 여기에는 지형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신학적으로 이야기를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이 물을 건넜다고 비유할 수가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이 황막한 생활을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셔서 기도하시고 시련을 겪으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이끌어 가셔서 거기에서 만나주셨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백성을 축복산으로 인도하셔서 팔복을 전파하셨던 것을 알게 된다.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 중간에 계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영혼의 영적인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 사이에 함께 계셔서 세사이라는 광막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요단강물을 건너가게 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강을 건너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아직도 임마누엘이시고, 그의 택함 받은 모든 백성의 중앙에 계심으로 우리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마지막 그림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율법적인 규칙이라든지, 그러한 계율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는 무리들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왼쪽 높이에 있는 그림과 같이 승리의 주님이시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를 섬기시는 종으로서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오른쪽 아래 그림에서 무릎 꿇고 계시는 모습에서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깨닫게 된 것과 같이 구역의 사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간에 알게 되었다.
P.132의 웰즈가 그의 저서에서 한 말을 읽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