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과.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
오늘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한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라고 함은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세례요한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 년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것을 공부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몇 세기 전부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신학적인 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데 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신약에 관한 부분을 공부하게 될 터인데 이것을 공부하게 되면 지금까지 배워왔던 여러 가지 실오라기 같은 것들이 연결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p. 102를 보라.
여기에 나오는 이 사람의 얼굴은 다윗의 얼굴이다.
이 부분은 역대기에 있는 말씀이다. 역대상을 읽어보면, 대단히 놀라운 내용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대상 1장 ∼ 9장을 보면 여기에는 이름 외에는 다른 것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역대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고나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런데 사울이 죽기 이전에 이스라엘에는 어떤 왕의 이름도 없다. 왜냐하면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창세기 2장∼11장까지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를 않다. 그리고 족장들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라든지, 시내산 사건, 그들의 광야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지를 않다. 더구나 사울 왕의 생애에 대해서도 별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역대상 11장에 보면 갑자기 다윗 왕의 생애에 관하여 아주 세밀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지난 9과에서 다윗의 시대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사무엘서에 있는 내용도 살펴보았다.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여기에는 다윗의 아름다운 치적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지만 별로 유쾌하지 못한 부분들도 여지없이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 같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를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솔로몬 시대의 사건도 그렇게 만족할 만한 그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대상에 보면 영광스러운 다윗의 통치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윗이 범죄했던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죄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를 않다. 여러분은 이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왜 이렇게 했을까?
역대기 기자의 주관심사는 성전건축과 이것을 위해서 준비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윗이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일에 전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역대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다윗의 역할이다. 그가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다윗의 역할을 강조하고 잇다.
다윗의 얼굴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상징있는 그림을 보라.
위에 있는 그림은 빵 같이 보이겠지만 사실은 빵이 아니라 제사장이 쓰는 모자를 이렇게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다윗의 역할에 대해서 역대기 기자는 특별히 강조를 하고 있다.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사람으로 역대기서는 묘사를 하고 있다. 사실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계획을 세운 사람이 다윗이다. 그리고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모았던 사람도 다윗이었다.
오른쪽 밑에 있는 그림은 수금이다. 그는 성전 예배를 위해서 성가대들을 훈련시켰고, 또 성가대들이 부를 시편을 기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짓는 모든 것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맡겼다.
그러면 왜 역대기의 기자는 다윗과 솔로몬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기록했을까?
여기서 특별히 강조한 것은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이와 같은 성전 건축은 나중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또 이와 같은 성전 건축이 일어난다.
사실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했었다. 그리고 또 이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것이 잘 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역대기 기자는 특별히 강조를 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다음에 그때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왕도 있지를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BC. 586년에 그들이 돌아왔을 때 세스바살과 스룹바벨,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열왕기하를 보게 되면 그때까지 왕은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그 동안에도 그들의 왕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죽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에는 그들에게 새로운 왕은 없었다. 후반부에 와서, 즉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와서 그들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인간 왕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고 하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짓는데 왜 그렇게 열심이었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기 때문이 그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지어야 된다고 그들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셔서 이 땅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다윗의 얼굴 밑에 있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성전 중심적인 어떤 공동체가 그 당시에 강조되어졌다.
특별히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포로 이후 시대에 대한 값진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 책들은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에스라서는 내적인 것을 강조를 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의 순종을 통한 성전 재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느헤미야서는 외적인 것을 강조를 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등의 외적인 건축에 관한 부분을 강조를 하고 있다.
역대기는 우리에게 성전이 맨 처음에 어떻게 세워졌고 왜 그것이 없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그것이 어떻게 재건되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너희가 잘못했던 것을 거울로 삼아 배우라.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은 단 한번만으로 족하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겨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들을 올바로 대해 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바벨론의 재앙을 불러오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p. 104를 보라.
여기에 보면, 고대 사회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영역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여러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그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수세기 동안 생존해 왔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은 아주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 시 그들은 어떠한 자유도 체험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들이 앗수르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바벨론의 통치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파사의 통치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그리이스, 헬라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그 후에 보면 프톨레미라든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통치를 받았다. 쉽게 말하면 애굽이나 시리아의 통치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BC. 63년에 와서는 마침내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때에 이런 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국민이라고 가정을 해 보라. 그렇다고 하면 여러분은 이 당시에 무엇을 소망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이런 외국으로부터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어떤 해방을 간절해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세계 5대 강국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는 구속사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류의 구원을 전개하여 가는 것이다. 사실은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본다. 즉, 북한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영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그림은 사울이 통치를 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토를 말해 준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좀더 솔직히 말하면 다윗이 통치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지 않게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다윗이 통치했던 영토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언급되어져 있다. 그리고 솔로몬이 통치해던 지역도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이렇게 큰 이스라엘의 영토가 갑자기 분열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애돔도 일어나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간다. 그리고 르호보암 때 와서는 그들이 아주 조그마한 영토를 갖게 된다. 물론 이때에는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 왕국이 있었지만 여기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를 않다.
그리고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들의 영토는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조그마한 영토였다. 그때의 영토가 길이가 약 45㎞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그런 영토였다.
그러나 그후에 마카비 시대에 와서 그들의 영토는 굉장히 확장이 되어진다. 마카비 시대는 다윗의 후손의 왕도 아니요, 다윗 계통의 왕도 아니었다. 그는 하스모니안 계통에 속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그들은 헬라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이 형태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p. 108을 보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세 성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과 포로 이후 시대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이 그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림은 헤롯의 성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성전을 지었지만 사실 요시아 이전까지는 아무 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B.C 621) 그러나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물을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절기는 반드시 성전에서만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님 때까지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성전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도 그렇고, 지난 9과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다. 이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무렵에 다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BC. 515년 이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다음에 제 2의 성전을 지었다. 그런데 제 2의 성전이 과연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제 2의 성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헤롯의 성전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지 제 2의 성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다.
B.C 19년에 헤롯 성전이 착수되었는데, 여기에서 성전 그 자체는 가운데 있는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이 성전이고 그 모습을 좀더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위의 왼쪽에 있는 그림이다. 이 성전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벽이라든지 다른 것을 쌓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완전히 완공된 것은 A.D 62년 내지는 63년에 완공되어졌다. 그리고 불과 몇 년 후인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망하고 만다.
우리는 여기에서 헤롯의 성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검은 부분, 이것만이 성전 자체이다. 그리고 왼쪽에 조그맣게 검은 부분은 지성소이다. 이곳 지성소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밖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것도 속죄일에 꼭 하루만 그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보통 때에는 성소 오른쪽에 있는 검은 부분하고 흰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 곳에 그들은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 분홍색 부분으로 되어져 있는 곳은 남자들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빨간 부분에는 여자들이 들어갈 수가 있는 곳이다. 이 주변에는 약 1m 높이의 울타리 같은 난간이 있다. 이 건물을 보면 아주 희미한 부분으로 검게 보이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난간에는 아주 이상한 말들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말들이 거기에 기록되어져 있다. "이 난간 저 너머로 건너가는 어떤 이방인도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무슨 선교를 그렇게 하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 같으면 사람들이 오도록 끌려고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를 않았다. 어떻게 비유대인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의혹을 가질 것이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 비유대인들은 절대로 이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으로 개종을 해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만의 뜰인 여기 노란 부분에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돈을 바꾸는 잡상인들이라든가, 재물을 바칠 동물들을 바치는 그 장소가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만약 이방인들이 여기에 와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난간에 들어가기 전에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경고문을 그들은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면 이 성전의 크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에 있는 이것이 318m가 된다. 오른쪽에 있는 긴 것은 약 500m가 된다. 이것은 옛날 고대 사회에 있어서 굉장히 거대한 건물이었다. 여기에 있었던 큰 기둥이 40개로 되어 있었는데, 그 기둥의 하나가 장정 세 사람이 손을 잡아야 주변을 볼 수 있을 정도의 큰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여러분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성전 밑은 지하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그래서 이 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밑의 통로로 통해서 성전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문으로 통해서 들어가게 되면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게 되면 성전의 정문이 보이도록 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갈 때에는 지하 통로를 통해서 나와야 되는데 그때에도 성전이 보인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였던 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A.D 70년경에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켰을 때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 당시에 실망했겠는가를 여러분은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에도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 다음 그림을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예수님이 오셨던 그 당시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종파에 관한 설명들이다.
먼저 바리새인들을 보시기 바란다. 마카비 당시, 아마도 B.C 17년경쯤 해서 바리새인들이 출현하지 않았나 추정이 된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다음 그림에 나올 때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가장 강조를 했던 것은 율법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시켜주는 줄에다가 생각했다.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종교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조상의 구전을 포함한 율법들을 매우 상세한 조목에 이르기까지 준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과 실천은 무미건조한 형식주의를 낳게 하였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시작도 마카비 시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성전과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의식, 이 두 가지를 강조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에 관한 소망을 가졌으나 사두개인들은 메시아에 관한 소망은 가지고 있지를 않았다. 이들은 대두분이 부요한 농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새인들에 비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었다.
그리고 셀롯인들, 열심당원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들은 생각하기를 무기로 무장을 해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나 외국의 세력들을 다 물리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A.D 6년경에 시작되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혁명 조직으로 비밀 결사대였다. 이들에게는 '시카리우스'라는 하나의 별명이 붙여졌는데, 그것은 이들이 가슴속에나 주머니에 작은 식칼과 같은 칼을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배신자나 민족의 반역자 등을 만나게 되면 그냥 그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이들은 A.D 70년 로마에 대항해서 싸울 때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A.D 73년 마사다 전투에서 전몰할 때까지 그들은 싸웠다.
다음으로 서기관들인데, 이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그 율법을 해석하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 이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여기에 보면 성전에 관한 평면도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투구와 검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북서쪽에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안토니아 요새가 있다. 그 당시 로마의 총독이 예루살렘에 오게 되면 안토니아 성에 와서 기거를 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잡혀갔을 때에도 바로 여기에 잡혀왔던 것이다.
오른쪽 위에 보면 세 개의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탱해온 신앙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먼저,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는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강조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더 이상은 없다고 주장을 했다.
그 다음은 '민족주의'다. 유대인들은 민족주의를 굉장히 강조를 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오직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속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으로 개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율법'이다. 그들은 율법을 한 분 하나님과 유대인들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줄로 보았다. 바울이 와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주장을 했을 때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메시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람산까지는 약 1㎞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다. 요즘에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감람산에는 엄청나게 많은 무덤들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제일 먼저 여기 감람산에 오실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때에 부활하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제일 먼저 감람산에 외시게 되니까 제일 먼저 부활하려면 여기에 무덤을 두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거기에 무덤을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것은 왼쪽의 이 벽이 남아 있다. 그들은 이것은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와서 늘 기도를 하면서 메시아의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여러 절기들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적인 중요한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절기들이다. 예를 들면,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다. 그 외에 청천 청결을 기념해서 지켰던 하누카와 에스더에 기록된 부림절, 안식일이 있다.
여기 밑에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하겠다.
첫 번째 부분에 있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부분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구전과 율법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메시아 왕국은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그들이 메시아가 오게 될 때 무슨 천국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대 땅 거기에서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여기 화살표에서 볼 수 있듯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세계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사방 각처로부터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기 전에 죽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아가 오기 전에 죽었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다 죽음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그림은 무덤을 말하는 그림인데, 이것은 그들이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상징해 주는 그림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특별히 랍비들은 주장하기를 그들이 땅에 묻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를 한다.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여기 그림 위에 보면 1, 2, 3, 4, 5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모세 5경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을 다 믿었던 것이 아니라 모세 5경만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 오경과 함께 의식을 강조했다.
여기에 ×표를 해 놓은 것은 사두개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메시아가 오게 될 때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고 그것으로 끝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공부하기 전에 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하는 그들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요약해서 살펴보자.
p. 114를 보라.
여기 가운데 있는 동그란 부분은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메시아가 오게 되면 오든 것의 중심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건물이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건물이 형태들이다. 보면, 종려나무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평온함과 행복함, 좋은 환경을 상징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 파란 잎사귀가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넉넉하게 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포도와 밀이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포도주가 아주 넉넉해서 넘쳐흐를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이것에 관한 것은 아모스 9장 13절에 보면 나와 있다.
아모스 9장 13절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그들이 이처럼 메시아가 오게 되면 포도주가 많이 넘쳐흐를 것이라는 기대를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베풀었던 이적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포도주를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본래 예수님께서 만드신 물 자체는 유대인들이 손발을 씻기 위해 결레식을 행할 때 사용되는 그런 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결레식 때 사용하는 물을 사용해서 풍성하고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유대를 중심으로 해서 왕국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가장 중심은 예루살렘이라고 그들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들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당시의 예루살렘은 원수들의 도시로 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여러분들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렇게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을 먹였으니까 그가 메시아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거절하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메시가 시대가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들의 개념을 무너뜨리셨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 6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물 위를 걸어가신 이적을 베푸셨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바다와 폭풍을 지배하신다고 믿었다. 예수님께서 폭풍이 일어나는 바다 위를 걸으셨으니 그가 바로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냐 하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믿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만나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대화가 나온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하느냐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주기를 간구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를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를 거쳐서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을 때, 그때에는 만나가 그쳤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땅에서 맺혀지는 여러 곡물들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랍비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다시 하늘로부터 만나가 떨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먹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끝 부분에 보게 되면 메시아가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셔서 먹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가 잘 기록되어져 있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그들이 기대했던 바로 그 만나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들이 기대했던 그 만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에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들이 원했던 그런 메시아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했던 인간의 배를 채워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의 심령을 채워주는 메시아였던 것이다.
여기 밑에 가운데 그림을 보면, 양과 사자, 소와 뱀이 나온다.
그런데 예언서를 읽게 되면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져서 메시아가 오게 될 때 그 때에는 이런 야생동물들이 아주 순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구절들이 나오게 된다.
위에 있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메시아는 지혜를 가지고 선하게 통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불은 지혜와 의를 상징해 주는 그림이다. 그리고 왕관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그가 아주 지혜롭고 의롭게 통치한다는 그림이다. 그는 그들에게 율법을 순종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이러한 왕은 와서 이방인들을 결코 맞아들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그가 과연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기를 하나님의 용사인 다윗의 후손으로서 오는 왕이 바로 이런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왼쪽 밑에 있는 그림)
그들은 또 기대하기를 하나님께서 구름 속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나서 외국의 압제 하에서부터 단 번에 그들을 건져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와서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A.D 50년경에 '솔로몬의 시편'이라고 하는 책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외경에 속하는 책이고 구역 성경에서 말하는 시편은 아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솔로몬의 시라고 하는 외경이다.
거기 17장과 18장에 보면 아주 생생한 기록이 나온다. 솔로몬의 시 17장과 18장에 보면 메시아가 나타나서 모든 이방인들을 칼로 단번에 죽일 것이라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메시아 시대가 오면 이방인들은 한 사람도 용납이 안 되고, 오직 유대인들만이 여기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과연 누가 여기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왼쪽 그림에서 율법 속에 있는 사람이 들어가 있는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 밖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한 몇몇 사람들은 들어갈 수가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도 유대인들의 종노릇 밖에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아무리 선해도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임을 당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또 어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방인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발악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일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마지막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없애려고 발악을 할 때,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이방인들을 다 죽일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에스겔 38장과 39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