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0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그들이 전한 메시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10과는 예언서에 관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구약에는 예언서라고 불리는 책들이 여러 권이 있다. 특히 유대인들은 현재 우리가 구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책들을 예언서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여호수아,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를 전기 예언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 말라기를 후기 예언서로 구분시키고 있다. 그들은 애가나 다니엘을 예언서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 말라기를 예언서라고 부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을 예언서 가운데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그림은 예언자와 그의 메시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지자'라는 명칭은 불러내어 말하고 임명하고 선포하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선지자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는 두 개의 구절은 출애굽기 4장 14-16절과 7장 1절이다.
출 4:14-16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이 구절들에 의하면,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며 또한 아론은 모세에게 "대언자"(선지자)가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모세는 말해야 할 것을 아론에게 말하게 되어 있었고, 또한 아론은 모세를 위하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는 종종 미래의 사건을 언급하였지만, 그의 역할은 '앞 날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말했는데,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고 선포하였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언제나 불순종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들 예언자의 말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흥미를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구약 성경의 2/3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주역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는 1/4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예언자의 활동 상황을 길이로 비교한다면 신약 성경의 상황과 맞먹을 정도이다.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언자들에 대해서 흥미를 갖지도 않을 뿐만 안라 연구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존 브라운 박사는 "우리가 예언자의 메시지를 소홀히 여김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삶 자체가 패망을 자초하게 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보면, 예언자의 모습이 나와 있고, 그가 말하는 내용이 뒤에 배경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 나온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그저 예언자를 보편적으로 말할 때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의 상상의 그림이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탄하는 모습이 나와 있다. 특별히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소위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지탄하고 있다.
그러면 그 지탄의 내용, 고발의 내용이 무엇이냐?
선지자들은 나라 안에 만연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를테면 술취함과 허랑방탕,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관계에 대한 무관심, 부정직한 생활, 그리고 타락한 재판 등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한 결과는 민족 자체의 패망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민족 전체에 하나의 혹독한 운명이 내려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위에 하나님의 상징표 2개가 나와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앗수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 그 앞에서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화살표의 방향을 볼 것 같으면, 그 시발점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시발이 되어서 그 백성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화살표에 칼이 하나씩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로서 온 천벌 같은 일이 칼과 같은 놀라운 사태가 가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 애굽과의 관계의 면을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상징하는 그림의 가운데를 칼이 지르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애굽 사람의 직접적인 대결이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짚어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름아닌 그 백성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슬픈 사실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만 했다. 특히 이사야는 3년 동안 헐벗은 몸으로 돌아다녔다.
예언자가 남북조 상방에 내린 하나님의 메시지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메시지는 그 두 나라에 대한 참으로 어머어마한 내용들이고 두렵기짝이 없는 내용들을 싣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서 양쪽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진정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홀히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한 마디로 간단히 요약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그대로 다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신 선포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요약한다면 몇 가지로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림 10A에 나와 있다.
여기에서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 그 당시에 생존하는 사람들에게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예언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그 당시에 예언자들은 자기가 살고 있던 세대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먼 훗날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라고 일컫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예언자는 그 백성들 앞에 우뚝서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고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하여 절규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상징표가 나와 있고, 그 가운데 재판관이 사용하는 의사봉이 그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의사봉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온 그림들은 예언자가 그 백성들에게 퍼부은 정죄와 예언의 내용을 요약한 것들이다.
선포의 첫 번째 내용은,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음주에 대해서 폭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심판과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들이 몸에 장신구로 휘감고 살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물품을 주문할 주문록을 살펴보면서 어떤 사치품을 주문할 것인가에 골똘히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여인이 얼굴을 온갖 보석으로 뒤덮고 손과 손가락에 사치품을 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사치에 치중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예언자 아모스는 정죄하는 말을 했는데,
아모스 4: 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그러니까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북쪽에 있는 여인들의 사치한 모습에 관하여 예언자가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코에다가 장식품을 거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어디에다가 연장을 시켜서 말했는가 하면 마치 소가 코에 끌려가듯이 너희들이 이방 나라에 그렇게 끌려갈 것이다 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세 번째, 왼쪽에 볼 것 같으면 거미줄이 가득쳐진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소홀히 여겼다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에 거미줄이 가득쳐져 있다는 사실에 주시하라.
또 하나님의 언약의 비석은 깨졌고, 인간이 양심은 말할 수 없이 짓밟히게 되었다.
네 번째, 오른쪽에 보면 입이 그려져 있고, 돈을 상징하는 달라의 표시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 성직자들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것은 특별히 전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진 선포이다. 그들은 월급에 대해서, 보수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네들이 나에게 올바른 월급을 지불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들에게 올바른 선포를 하겠다"고 말을 한 마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솔직하게 말을 한다면, "당신네들이 월급을 넉넉하게 주면 내가 말을 할 때에 당신들의 귀를 무던하게 즐겁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미가라고 하는 선지자는 모든 예언자들이 직언을 하고 하나님 앞에 바른 말을 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공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해주는 것은 싫다고 말들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목사는 모든 청중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 주는 그런 메시지를 해 주기를 원했다.
다섯 번째 그림을 볼 것 같으면, 소위 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거울을 보면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이것을 잘 보셔야 한다. 그런데 언뜻 보면 많이 기울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거기에 묘한 의미가 있다.
남의 물건을 도적질할 때에 공공연하게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면서 야금야금 아무도 모르게 남의 물건을 훔쳐간다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침대에 가서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단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한다는 짓이 사람이 짐승을 잡아먹을려고 쫓아다니듯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려고 쫓아다니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의 돈을 사기쳐 먹을 것인가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 여기에 보면 의사봉이 있고 달라 표시가 나와 있다. 이것은 재판장이라고 하는 것도 부패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법관이나 변호사에 대해서 돈으로 매수만 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법을 바꾸어서 자기에게 유리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죄악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의 상황만은 아니고,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가령, 첫 번째 내용을 살펴보면, 오늘 사회에는 음주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음주문화가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두 번째 내용을 보면 여러분들에게 떠오르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고위층 부인들의 '옷로비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오늘 많은 부인들의 사치바람이 위험에 이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건전한 쇼핑 문화가 아쉽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문제 앞에서 우리가 빨리 빠져 나와야겠는데, 빠져 나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다.
사람을 볼 때에는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류 역사를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나온 죄악들에 대해서 눈을 돌리시고 외면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직시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림들은 개개인들이 저지르는 죄악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그림은 훨씬 더 차원을 높이고 범위를 확대해서 국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범죄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왼쪽 맨 위에 보면, 요새와 같은 성곽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칼이 보인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와 개개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요새나 무기에 의존하게 된다.
왼쪽 조금 아래에 보면 비둘기가 있고, 그 비둘기를 감싸고 있는 그물이 보인다.
그래서 호세아 7장 11절에 보면,
호세아 7: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 도다."(개역성경)
호세아 7:11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줏대 없는 비둘기이다. 이집트를 보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더니, 어느새 앗시리아에게 달려간다."(표준새번역)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나라와 동맹을 맺기는 하지만 결국은 이와 같이 비둘기가 망사에 사로잡혀 있는 운명과 같은 일을 자초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군사동맹을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오른쪽 맨 위에 보면 수리아나 바벨론, 애굽 나라와 더불어 선민이 소위 군사 동맹을 맺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가운데 있는 것은 국경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탄탄하게 해 놓고 난 다음에, 국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복지 생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언자의 말을 빌려서 묘사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큰 돌을 가져다가 안전하고 튼튼한 가옥을 짓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을 가꾸고 심어서 많은 포도 생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너희가 아무리 이렇게 좋은 고대광실과 같은 집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거기에서 거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는 사실을 예언하게 된다. 넓고 넓은 포도밭에다가 포도를 심었을는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은 그 포도를 따먹고 포도즙을 만들어서 마실 수 없게 될 것이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컬으시고 분부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작태와 그러한 죄악된 삶의 작태를 뜯어 고쳐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마치 이렇게 그물을 던져서 포도로 잡아오듯이 비둘기 같은 너희들에게 그물을 던져 가지고 외국 이방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길가의 옆에 숨어 있어서 지나가는 자를 움켜 잡아먹는 표범과 같이 너희가 지나가는 길목에 지키고 기다릴 것이다 라고 저주하고 있다.
뒤에 보면 노정표라고 하는 길의 안내 표지인 돌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하시는 심판은 마치 길가에 사나운 맹수가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찢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너희들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군데 적혀 있다.
호 13: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호 13:8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호 5: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렘 50:17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뼈를 꺾도다
사 5:29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이러한 일련의 성구들이 성경 가운데는 여러 곳에 퍼져 있다.
그런데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조짐이라든가 경향들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예언자가 이와 같이 말할 때에 생각하기를 "야, 그 사람, 참으로 말을 잘한다. 그들은 마치 유랑 민족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싯귀를 들려주어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하나의 유랑 시인과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끝마다 콧방귀를 뀌면서 하는 말이 "하기야 당신들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처음부터 만날 때마다 그런 말을 해 오는 말이지만, 어디 변화된 것이 어디 있느냐? 고 조롱과 멸시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기를 "하기야 저들은 좀 특별하고 이상스러운 사람들이니까?" 라고 말을 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는가? 절대로 아무도 예루살렘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보라. 거기 성전이 있지 않는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든가?
그러나 그들에게 드디어 한 날이 오게 되었는데, 그 날에 맹렬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 위에 퍼부어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잿더미가 되고 평지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말로써만 위협한 것이 아니라 그 위협적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곽에 돌 하나도 폄 놓이지 않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