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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음 성경대학

Heart of Christ Bible College & Christian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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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

 

여기에 모자들이 많이 있는데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설명해 나가노라면 왜 이렇게 모자들이 많이 나와있는지를 아시게 될 것이다.

가령, 어떤 부인이 모자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여러 가지 모자를 이것 저것 고르는 가운데 1시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점원 한 사람이 이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를 골라 가지고 '이것이 아주머니에게 꼭 맞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그 여자의 머리에 살짝 얹어 보아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바로 이것이 아주머니에게 꼭 어울리는 모자입니다'라고 말하는 뜻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모자를 씌워주고 보니까 이 모자가 그 여인의 얼굴의 생김이라든지, 몸가짐이라든지 하는 것과 꼭 일치가 된다는 그런 뜻일 거다.

여기에서 모자가 이렇게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마치 모자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에 그려 놓았다.

첫째로, 학사모가 나오는데, 이 학사모를 통해서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고 아주 영특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자, 아마 이 모자는 한국에서는 경찰관이 쓰는 모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만 호주라든지, 영국과 같은 영국 계통의 나라에서는 경찰관이 이러한 모자를 쓴다.  이것은 경찰관의 경관모자이다.  이것은 높이 계시는 하나님은 꼭 경찰관과 같아서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이 못된 것을 하나, 안 하나 이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혹시 규칙을 위반했을 때는 딱지를 떼어주는 교통순경 모양으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같아서 땅위에 사는 인간들이 그저 배를 두들겨 가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그런 존재다 라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딱딱한 빵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기도 주셔야 되겠고, 또 때로는 쌈밥을 주셔야 되겠고, 또 때로는 회도 주셔야 되겠고… 이런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하나님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셔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인간에게 한 아름씩 선물을 안겨 주는 위대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같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술사들이 뒤집어 쓰는 그림, 별도 그리고, 달도 그리는 마술사의 모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위대한 마술사와 같아서 마술 지팡이만 흔들면 그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해 주는 그러한 신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나님을 마술사 취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위대한 왕과 같아서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계신 존재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에는 청교도들이 쓰는 모자가 나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늘 찡그려야 하고, 늘 불행한 표정을 해야 하고, 늘 우울한 표정을 하고 살아야 하고, 거룩하고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비참할수록 영적으로는 더 행복하고, 영적으로는 더 깊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게 하기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밑에 있는 것은 안과 의사나 의사들이 머리에 쓰는 거울이 달린 기계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조사해 가지고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없고, (가령 어디가 아프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없고) 언제나 돌보아 주는 의사와 같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하나님을 찾을 때 치과 의사를 찾을 때처럼 아플 때만 찾지 건강할 때에는 찾지 않는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기본적인 자세라는 것이다.


 

왜 그러면 이러한 여러 종류의 모자들이 나열되어 있는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주님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러한 모자를 쓰셨다.  가시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쓰셨는데, 그 가시면류관은 가시가 바깥으로 삐쭉삐쭉 내 돋은 그러한 모자였다.  그러니까 이 가시면류관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어 가지고 오른쪽에 그림이 나와 있는데, 이것이 앞으로 계속해서 그 누구를 상징하게 되는 그림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인상 깊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징을 사용했는데, 그 상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어떤 심리학자가 책을 썼는데 87%의 사람들이 무엇을 깨닫게 될 때에 눈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된다고 한다.  오직 귀를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은 9%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회사에서는 햄버거 하나를 팔기 위해서 30만 달러 라고 하는 막대한 광고비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시각을 자극하고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광고비를 써라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에서 상징적인 그림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까만 그림이 있고, 거기에는 화살이 보인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상징으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여기에 빨간 화살표가 밖으로 늘 나가는, 외향적인 화살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까만 것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나가는 것은 언제나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고 언제나 밖으로, 외향적인 사랑을 표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화살표 같이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그런 하나님은 기독교적으로 아주 소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냐? 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한 이 시점에서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어떠한 일을 하시느냐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왼쪽에 있는 그림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말함과 동시에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를 아울러서 말씀하는 계명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그 손은 이웃으로 연결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과 맥이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두 가지를 분리할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을 시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야고보서 3:9-10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고보서 3:9절에 나오는 '찬송'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축복'이라는 단어인 '바라크'(좋은 뜻의 말을 한다)를 쓴다.  이 단어는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바라크한다'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께 찬양한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크한다'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축복하신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야고보 3:9-10을 히브리 말로 번역한다면, "한 입으로 하나님께 바라크 하고 돌아서면 사람에게 바라크해야 되겠는데, 하나님께는 좋은 말을 하면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들에게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좋은 말을 자주하면 별 수 없이 복이 된다.  그러나 나쁜 말을 자주하면 별 수 없이 저주가 된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설명은 P. 27의 3번에 기록되어 있다.

신명기로 돌아가 본다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쉐마라고 하는 히브리말로 시작되는 그러한 말씀이 신명기 6장 4절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먼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고, 두 번째 또 나오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 1계명이 나왔으니까 제 2계명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누구든지 논리적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두 번째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올 뿐이고, 사실은 하나로 되어 있다.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에서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면, 유대 사람 자기네 동족에 대해서 말하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분은 유대주의라고 하는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 오셨다.  물론 유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대가 만일 이 한 하나님에게 소속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대도 유대 사람의 한 사람이 되어야 되고 여기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자기의 이웃이라는 것은 유대 사람이 이웃이지, 이방 사람은 유대 사람이 생각하는 이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웃을 섬길 때, 유대 사람들이 이웃을 섬겨야 하고 먹여야 하지만 그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은 유대 사람이 아닌지라 사실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함께 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것은 유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전혀 다른 생각을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는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결국은 따지고 보면 하나의 계명이다 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 3-B에 나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을 하나로 합치셨다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을 들은 유대 사람들은 그 말에 굉장히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때가 되어 메시야가 오면 모든 이방인들을 말살하게 될 것이라고 저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웃을 이것저것 따져서 가리는 것을 철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봉사와 섬김을 베풀어야 하느냐 하는 그 한계성까지도 주님은 없애 버리셨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에 나온다. 우리가 아는 데로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라고 하실 때 자기는 정말 이런 모든 것을 다 했다 라고 예수님께 대답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사람은 죄가 무엇이고 회개가 무엇인지를 진정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또 이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될 터인데 이 사람의 생각 가운데는 무엇인가 선을 쌓고, 무엇인가 적선을 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구원에 대해서 잘못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실물 교육을 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운데 영웅이랄까,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非 유대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리고 강도에게 피해를 받아 가지고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은 유대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서 이것이 거꾸로 되었다고 가정을 해 보자.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 사람이고, 쓰러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면 유대 사람은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그는 걷어 차 가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숨통을 끊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이웃을 생각할 때, 내가 이웃인 유대 사람에게 어느 정도까지 친절이나 사랑을 해야 하는가?  그 정도를 가지고 유대 사람들은 따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했을 때, 내가 3번 정도까지는 친절을 베풀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다음에는 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 끝에 "그러면 내가 일곱 번까지 용서를 해 줄까요?"라고 말할 때 사실 베드로는 마음껏, 그로서는 최대한 너그럽다고 생각을 해서 일곱 번을 이야기 한 거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럴 때에 일곱 번씩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하면서 도대체 이렇게 친절의 횟수를 센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그 어리석은 것을 집어치워라면서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무제한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 때에 이웃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었다는 선입관적인 생각을 싹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하셨느냐 하는 그 표준에 의해서 이웃 사람을 대하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보라.  여기 유대 사람이 쓰러져 있다.  거기에 제사장이 왔다가 지나가고, 조금 후에 레위 사람이 보고서는 먼데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유대 사람이 지나가는데 그 앞에 유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옆으로 그냥 걸어서 지나갔다.  오늘 같으면 "내가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이 사람을 돌볼 수 없다"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제사장의 생각에는 아마 그 사람이 죽었을 것 같다.  그러면 송장을 만지게 되는 것이고, 송장을 만진다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오염되는 일이니까,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내가 제사장이니 만지지 않는다는 그런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생각을 했음직도 하다.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다.

이제 유대 사람의 전통적인 원수로 생각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국가적인 입장이나, 민족적인 편견이나, 율법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 하는 의식적인 것들을 다 잊어버렸다.  또 심지어는 내가 이런 일을 하다가 어떤 어려움에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기 생명까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강도가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서 자기를 죽이지 말라는 법이 없지를 않는가?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자기의 나귀를 제공했다.  자기가 가지고 왔던 기름을 발라 주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내어서 여관비를 치루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돌아올 때 돈이 더 많이 들면 그 나머지도 갚아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나갔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희의 이웃이냐? 하는 그 장벽을 철폐하셨다.  또 이웃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하느냐? 하는 두 번째 장벽도 다 철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제한이 없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래 오래 음미하면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솔직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 같지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종으로써 오셨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종이 되셨던 것 같이 우리도 그런 마음과 자세로 이웃과 형제를 종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똑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 그림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오른쪽에 나온다.

'나는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당신도 섬기지 않고 나는 나 자신을 섬길 뿐이다' 라고 말한다.  병 가운데 최대의 질병은 '자아 중심 병'이라고 하는 병이다.  I, ME 라고 하는 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주장은 이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 자신의 문제이다.  내 자신이 어떻게 편안하게 잘 살고, 위험스럽지 않게 사는 문제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다고 하는 그런 문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 중심 병에 걸려 사는 사람은 그에게 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신이다.  바울이 서신 가운데 정욕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육에 관한 정욕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여기에서 말한 것을 가르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는 대단히 난처한 표정을 짓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고, 또 그렇게 살아오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너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언뜻 보면, 아주 복잡하게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림이다.

동그란 것은 얼굴인데, 여기에 자세히 보면 눈, 코, 입이 보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얼굴이다.

성경은 어떠한 편파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나 나나 전인간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전인간의 각 분야를 만드셨고, 각 분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에는 우리가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면에 있어서는 인정하지를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의 상징이 위에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다.

그런데 옆에 있는 그림은 자기 스스로를 섬기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의 그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개 가운데 나는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또 어느 쪽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생각해 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해야 되겠는데 우리는 그 인생의 순서를 어긋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각종 학문을 공부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되고, 우리의 마음을 개발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더 잘 준비를 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종의 섬김의 자세로 살아감으로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공부하는 것을 포함해서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집중을 하고 있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가지고 캠퍼스를 거니게 될 때에 사람들이 "야, 저 사람은 철학 박사님이다"하고 박수 갈채를 보내는데 여기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박사님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른쪽 밑에 있는 그림에 보면, 우리가 무엇을 먹는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좀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그것이 바로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먹는데 있어서 조심을 해야 할뿐만 아니라, 항상 자기 자신의 몸을 적절한 영양 보충을 하고 잘 다듬는데 있어서도 조심해야 한다.  테니스를 한다든지 적절한 운동을 통해서 건강 관리를 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은 어떤 Mr, Miss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운동이나 체육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사실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들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속 사람에 생명력이 충만해 있느냐, 없느냐를 성경은 언제나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이 점점 성화가 됨으로 예수님의 모습과 성상을 닮아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온유하며, 오래 참고, 또 절제를 해야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이와 같이 윤리적인 조항으로 우리를 훈계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따라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보라.  그 사람, 얼마나 인격이 훌륭한 사람인가?" 라고 찬양이나 받고, 칭송이나 받으라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보다 나은 주님의 종이 되고, 또 하나님께 대하여 보다 나은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진 가운데 눈썹이 올라가고, 눈이 빨간 사람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외모가 저렇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의 속도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만약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얼굴이 이러한 사람의 얼굴과 같이 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를 꺼려할 것이다.  또 우리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묻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마음이 아예 싹 가셔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바라시는 의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감으로 하나님의 보다 나은 종이 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만, 말을 바꾸어 한다면 모든 의지라고 할 수가 있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냐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저울 같은 것을 머리 꼭대기에 달아 가지고 어느 것이 옳느냐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할 때 우리는 어떤 때에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 하는 것을 가려내기가 어려워서 당황할 때가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교통 신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도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는 빨간 신호가 있는가 하면, 조심하라고 하는 노란 신호가 있고, 이제는 네가 마음대로 해라고 하는 파란 신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소유하시고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섬김으로 해서 보다 나은 성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셨다면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나는 나를 잘 보존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 도구를 잘 개발해서 보다 나은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나의 기준은 이것이어야 한다.  그가 어떤 과거나 현재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또 인간적으로 어떠한 결함이 있든지 간에 그러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일단 용서를 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한 대로 그의 부족한 것을 채워줌으로 해서 내가 하나님의 보다 나은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P. 29의 맨 끝줄이 중요한 말씀이다.  같이 읽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나의 삶의 절반쯤은 나를 위해서 살고, 나머지 절반을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살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의 삶의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고, 바친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 주심으로 해서 그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살아드리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남을 섬김에 있어서 남을 섬기는 내용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결정을 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해야 되겠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나의 임무의 내용을 작정하고 규정해 준다고 한다면 결국 나는 맹종해야 되고 그 사람이 하라고 하는데로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원하는 그런 삶이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 땅 위에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 한 가지 일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바침으로 해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시는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 사는 것이다.


 

좀 복잢한 것 같지만 이것도 선명하게 설명할 수가 있겠다.

여기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나와 있는데, 창조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구원의 계획이 나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저 위에 있는 상징이 이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다 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만드셨다.  또 사람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  여기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인간 자신을 닮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는 이 말은 우리의 육체적인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동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화살표가 외향적인 화살표로서 밖을 향하여 나가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사람의 범죄 단계가 일어나면서 죄와 더불어 죽음이 이르렀다.  그런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침입자로서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온 것이지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는 들어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보라.  여기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누가 달라졌는가?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이 순간까지 달라지신 바가 없었건만 인간 자신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밖으로 외향해서 사랑을 뿜어내시는 그러한 분이시고 변함이 없으셨는데 변한 것은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했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 가지고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은 불변의 위치에 계셨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의 최종적인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셨다.

그림에 보면 노란 빛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빛이 예수님을 안고서 왔다는 이야기이고, 가운데 있는 손을 든 사람은 예수님이고, 머리가 둥그렇고 흰줄이 있는 것은 예수님의 머리 테에 있는 성광을 상징하는 것이다.  화살표에서 말했듯이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위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이웃 사람들을 섬기는 그러한 삶을 사셨다.

이리하여 주님께서는 종으로서의 생애를 보내시다가 그 종으로서의 생애가 절정에 도달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이다.

생각해 보라.  유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무덤에 넣었을 때 저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처단하고 처치해 버렸다고 안심하고 있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처치함으로 해서 끝장을 보았다는 생각을 철저히 뒤집어 놓으셨다.  그러니까 종으로서 섬기시고 종으로서 최고의 절정인 십자가를 받으시는 주님께서는 드디어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서 우리에게 강림하시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러한 죄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이러한 죄는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지, 어디 네 죄를 용서해 줄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에 대해서 같이 토론해 보자, 이러한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골 바가지가 보이는 그러한 징그러운 것이 그대로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문으로 변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문을 가만히 보니까 여기에는 문의 창살에 틈바구니가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틈을 내어 놓으셨는데, 그 틈사이로 장차 일어날 일들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문을 열고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그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선을 자세히 보라.  여기에 선을 보면 전부 잘려져 있다.  전부 토막토막 잘려져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는 것이 아주 불안전하기 그지없고, 또 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깨어지기 쉽고 좌절하기 쉽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깨어지기 쉽고 끊어지기 쉬운 순종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의존하시고 중요시하지 않으신다.  확실한 것은 저렇게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더 의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드디어 저 창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 문을 열고 그 나라로 들어가게 된 다음에 여기 마지막 그림에서 보듯이 어떤 서운(瑞雲)이 서려있는 구름 위에서 그저 노래나 부르고 평안시하는 그런 종말이 아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한 생활이 앞으로 미래의 세계에서도 계속된다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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