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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막을 내린 지 오랜데도 '애인' 신드롬은 남아 있다. 일개의 드라마가 국감의 도마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일이다. 불륜을 미화시키는 불륜상품이라며 "페놀보다 심각한 공해"라고 도덕감으로 무장된 어떤 의원은 '애인'을 단죄했었다. 그것은 애인에 대한 공안 정국이었다.

"애인 무죄"를 선언하고 싶은 목소리도 만만찮을 텐데 그 소리는 미미했다.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애인 무죄 선언"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대신 그들은 화면 앞에 모여들어 조용히 '애인'을 보면서 시청률을 올리는데 한 몫 했다.

'애인'에 대한 준엄한 비판은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을 가차없이 단죄하여 건전한 가정에 몰려올지도 모를 회오리를 막아보겠다는 가부장적 가정 지상주의의 발상이었다. 그렇다면 '애인'에 대한 공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남편과 아내들에게 학인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돈 벌어 오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 기혼의 남녀들이 애인을 갖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현상적 사실은 일종의 징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혼자들의 '애인 만들기'에 대한 찬, 반 양론을 묻는 작업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기혼 남성들의 45%가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해서, 기혼 여성의 62%가 남자 친구를 갖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해서 그것이 '애인'의 영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애인에 대한 동경이 '애인'의 시청률을 올렸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과거에 한칼에 불륜으로 매도되었던 일이 어째서 한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섬세하고 가슴떨리는 사랑이 되었는가에 대한 사회 구성체적 이해이다. 어째서 '불륜'이 진지한 사랑이 되어 공중파를 탈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들이 부도덕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과학적인 답이 아니다.

'닥터 지바고'를 보았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열정적인 라라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지바고는 라라를 떠나 정숙한 아내 토냐에게로 돌아온다. 전 생애를 바쳐도 아깝지 않은 열정은 잠시이고 정숙한 아내가 있는 가정은 영원해일까? 글쎄, 결국 가정을 선택하는 주인공들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랑이 한순간의 기분이라는 것은 아니다. 

전통사회나 제조업이 주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가족'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였다. 가족이 사회, 경제적인 기본 단위가 되면 사회속에서 개인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이름표를 달고 움직인다. 진사댁의 딸인지, 백정의 딸인지 그 가문이 중요했지 개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적자인지, 서자인지 신분이 먼저였고 개인은 나중이었다. 개인은, 그것이 강조되면 될 수록 절망감이고 나처함이었다.

그렇게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가족은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축인 가장과 정숙한 현모양처가 필요 조건인 가족 제도가 사회의 기본 단위인 곳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이 있었다. 그것은 '가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 제도를 배반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선택할 경우 여지껏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힐뿐더러 자신의 설자리도 없어지게 된다. 그 선택의 귀결은 평생 이마에 주홍글씨를 붙이고 살아가는 것인데 주홍글씨는 사회 속에서의 유배지 표시였다.

애인은 유죄? 무죄?
사실 드라마 '애인'의 설득력은 비대칭적인 남녀 관계를 축으로 하는 가부장적 가정의 해체와 관계가 있다. 이 드라마가 기존의 드라마와 다른 이유는 불륜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아니라 '가정이 있는 여성'의 사랑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사실 유부남과 처녀 혹은 창녀의 불륜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새로울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는 소재였다. 대체적으로 유부남과 사랑을 하는 처녀나 창녀의 사랑의 끝은 어디였나?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이 뭘까? 남자가 없는 여자는 사랑의 주체지만 남자가 있는 여자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여자는 한 번도 사랑의 주체로 드러난 적이 없다. 다만 여자는 여자를 가정의 울타리로 끌어 줄 수 있는 남자, 진짜 주인인 남자를 찾도록 요구되는 언제나 객체인 존재였다. 다른 남자가 생겼을 때 옛날 남자가 '애인'을 포기하는 것은 여자에 대한 예우라기보다 여자의 주인에 대한 예우였다.

사실 경제적으로 주체이거나 경제적으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지 않고 다른 삶의 주체가 되기는 어렵다. 지금 '애인'신드롬은 일시적인 신드롬이 아니라 사회 구성체가 달라지고 있음에 대한 징후로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보 사회의 문턱에서 여성이 경제적인 주체로 드러나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윤리나 도덕이 낡고 허름해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노처녀는 행복하다

요즘 '자아 실현형'의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보다는 일을 선택하고 때로는 사랑보다 우정을 선택하기도 하는 신세대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자아 실현형 여성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 자기 일을 가지고 자기 일을 사랑할 것, 둘째, 사랑이나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자아 실현형 여성의 개념에서 탈락되는 여성들이 있다. 전업주부가 그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남편이나 아이를 돌보는 일은 사람을 기르는 일인 만큼 신경이 많이 쓰이는 중요한 일이다. 그 일은 직장에서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기술적인 일에 묻혀 살면서 매일 경쟁적인 인간관계에 치이는 일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가족관계에서 행복을 찾는 여성들을 자아실현형의 여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왜일까? 사회가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덜 필요한 정보사회에서는 섬세한 여성의 노동력이 중요한 생산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실 정서적이고 섬세하며 관계 지향적인 것은 여성의 속성이라기보다 약자의 속성이다. 상처를 낸 사람은 상대에게 어떤 상처가 났는지 무딜뿐더러 그 상처로 인해 상대가 어ㄸ허게 절망하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 쩔쩔매 보고 불행 속에서 난감해 본 사람이 눈물 나는 일에 민감한 법이다. 정보 사회에서 돈이 되는 어떤 정보가 섬세한 감정에 기대 남성을 밀어내고 '여성'을 찾는데, 여성이 선택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눈물 나는 몇천 년 역사 덕택이다.

여성이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경제 공동체로서의 가정의 의미는 희석된다. 이것은 가정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가정이 선택이 되자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이 늘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서른이 되어으면서도 혼처를 정하지 못한 여자는 괜히 초조했다. 집안에서는 다들 큰일이라고 호들갑이었다. 아무리 '눈이 높아서'라고 당당하게 선언해봐도 그 나이까지 혼자인 것은 뽑히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수치스러움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회는 달라졌다. 결혼에서의 연령 파괴를 지나 오히려 남편이 없는 노처녀들이 당당하다. '노처녀'라는 것은 일을 가졌다는 것이고 경제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무나 혼자 사나!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 초라한 사람이라는 표시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고 팔자 핀 사람이라는 표시다. 혼자 아파트 문을 밀고 들어갈 때 아무리 쓸쓸해도 그것이 창조적 고독이라고 읽는 세상, 그것이 변한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결혼;은 선택이다.

결혼이 선택이 될 수 있었을 때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평형이 깨지면 인내를 지나 이별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인내라는 이데아를 실현해야 했기에 눈물 보자기 꼭꼭 동여매면서 자신의 슬픔, 불행, 상처에는 덤덤했던 여성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묻기 시작한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가정이 과연 지킬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물론 이 물음은 경제력의 주체가 되면서 여성이 감성의 영역에서도 홀로 설 수 있게 되었음을 반영한다. 홀로 설 수 있게 된 여성들은 가정을 둘러싼 기존의 과습이나 윤리에서 억압적 성격은 없는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자 시절, 약자에게 강요되었던 관습에서 억압적인 요소를 찾아 낼 수 있게 된 이유는 그런 억압을 뚫고 나올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보면 사랑, 결혼 등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가지기 위한 필요 조건이 보인다. 그것은 여성들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다. 물론 그 기반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기반 위에서만 정서적 억압을 발견하는 일이 정서적 해방에의 길이 될 수 있다. 

제목

'애인' 신드롬은 끝나지 않았다

'애인'이 막을 내린 지 오랜데도 '애인' 신드롬은 남아 있다. 일개의 드라마가 국감의 도마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일이다. 불륜을 미화시키는 불륜상품이라며 "페놀보다 심각한 공해"라고 도덕감으로 무장된 어떤 의원은 '애인'을 단죄했었다. 그것은 애인에 대한 공안 정국이었다. "애인 무죄"를 선언하고 싶은 목소리도 만만찮을 텐데 그 소리는 미미했다.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애인 무죄 선언"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대신 그들은 화면 앞에 모여들어 조용히 '애인'을 보면서 시청률을 올리는데 한 몫 했다. '애인'에 대한 준엄한 비판은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을 가차없이 단죄하여 건전한 가정에 몰려올지도 모를 회오리를 막아보겠다는 가부장적 가정 지상주의의 발상이었다. 그렇다면 '애인'에 대한 공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남편과 아내들에게 학인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돈 벌어 오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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