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다.
4과는 성경의 이야기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출애굽을 통해서 시내산의 광막한 사막을 여행했다고 하는 사건이다.
창세기 1장∼11장까지는 아브라함을 도입하기 위한 하나의 서론적인 장이다 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11장까지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이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1,300여 페이지라고 하는 길고 긴 페이지를 소요하면서 기록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14페이지가 소요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이전의 14페이지가 왜 필요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왜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14페이지라고 하는 장황한 페이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제가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창세기의 다른 기사라든지 중요한 사건들을 곁길로 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이 시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결국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로 집중타를 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서론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 사실 이러한 모든 천하만물이 생겨난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과연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가지고 따져 묻는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이것도 묻고 싶다.
창세기 1장을 보면, 결국 2가지의 커다란 흐름이 거기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은 어떻게 이 우주를 만드셨고, 또 자기들은 어떻게 생겨났느냐 하는 문제를 믿고 다루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일부러 생략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반면에, 이 선민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생략하고 넘어간다.
이 문제를 P. 35의 A, B에 보면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여러 잡신들을 믿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 한 분의 하나님을 믿었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신에 대한 여러 가지 조작된 이야기들을 하면서 신들이 어떻게 작용을 했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창세기 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그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여러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읽어보시면 다 아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있어서 한 가지가 아주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자그마치 7차례나 하심으로 자기가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만족해 하셨다.
그러면 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을까? 사실 오래지 않아서 천지 창조의 이 아름다운 것이 망가지게 되겠는데, 과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겠는가 하는 책임을 규명하게 되는 문제가 나올 때에 그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교훈이다. 사실 성경은 절대로 비난을 받으실 수 없는 한 분이 계셨고, 성경 가운데서 그것이 분명해졌는데, 그 분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비난은 인간이 뒤집어 써야 하고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 의해서 이것이 강조되고 있다.
사실, 창세기 1장과 2장과의 연관성, 연결을 짓는데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따로 분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써 2개를 합해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2, 3장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기에 좋았고, 잘 만드신 그 세계가 잘못되고 망가지는 이야기가 나와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 나와있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이야기는 어떻게나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이야기해 놓았는지 그 사실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러분, 거기에 뱀이 물었던 질문을 기억하시는가?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하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귓전에도 종종 우리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양자 택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한 말을 믿어야 하겠는데, 즉 인간의 말을 믿어야 하겠는데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정말로 믿을 가치가 없는 말이 아닌가?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면, 창세기 1장이 주장했듯이 만일 하나님이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러면 악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또 악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양대 질문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2장으로부터 11장까지의 문제를 다룰 때에 좀더 이 문제를 철저하게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창세기 2장으로부터 11장까지를 하나로 묶어 놓았는데, 이것은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나와서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하나의 서론이요 준비적인 단계로 이것을 하나로 묶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우리 인간과 가지신 관계에 대하여 이 그림이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 여기 지구가 나와 있다. 또 여기에는 증표가 붙어 있다. 하나님의 도장이랄까, 하나님의 서명이 오른쪽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는 나의 소유물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에게 강력히 권고하시기를 '취급주의다'라는 말씀을 해 놓으셨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면, 이러한 진리가 망각된 채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오염시켰다고 하는 것, 산이나 강이나 바다나 대기와 같은 것들을 오염시켰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실 우리에게 하나도 우리가 가지라고, 우리가 소유자가 되라고 주신 적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게 하자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은 이 모든 피조 세계를 저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자 라고 하셨다. 땅을 주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 땅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시하라.
여기 인간에 대한 간단한 그림이 나와 있다. 거기에도 증표가 있는데 하나님의 서명이 있고 나의 소유물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여기에 볼 것 같으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육체, 이 육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빌려쓰고 있는 하나의 재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너희 육체라고 하는 재산을 쓰되 '취급주의' 조심해서 쓰라, 왜냐하면 이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다.
이 닳아빠진 세계에서 으레히 하는 말은 ' 이 몸뚱아리야 내 것이지. 내 몸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마음대로 사용하다 보니까 이와 같은 궤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에 대한 위대한 계획이 나와 있다.
여기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림이 가운데 나와 있고, 그 위에는 왕관이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왕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왕이시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남녀를 창조하시고 피차에 서로 봉사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여기에, 결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아름다운 예화로써 그림이 나와 있다. 사실 우리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밑에서 남녀가 지음을 받아서 서로를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하나님 아래서 모든 인간이, 남녀의 그림인데 한 가족같이 하나가 되어서 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 손을 붙잡는다고 했는데, 단순히 손만 붙잡는다는 것은 쉽다. 사실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같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왼쪽에 있는 것, 소매 끝에 빨간 단추가 있는 것은 남자이고, 손 끝에 매뉴큐어를 빨갛게 칠한 것은 여자의 그림이다.
사실, 남녀가 손을 잡았는데 이것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한다면 이렇게 끝까지 손목을 붙잡고 살아가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이렇게 붙잡다가 나중에 싸움이 벌어져서 그냥 남녀가 서로 어울려 싸움을 하고, 또 손을 붙잡은 저희들끼리 밖에는 모른다는 것이 죄악된 이 세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섬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는 세계가 되었다고 한다면, 다음 세계는 어떠한 세계가 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 봄직하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어야 되고, 단합이 있을 거다. 사실 평화가 없고 단합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러한 것이 주어지고 자기에게 안겨진 것인데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않기 때문에 평화도 없고 일치도 없는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주의 의자에 앉아 계시도록 하는, 우리가 먼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그 보좌에 앉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도 앉을 자격이 없고, 앉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고작해야 대통령이라든지,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라든지, 그런 인간의 수반들을 가질 뿐이다. 그러한 통치자 밑에만 산다고 한다면 우리가 별로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낼 수가 없을 것 같다.
P. 313의 질문지를 보라.
토의사항이라고 하는 것, 다음 사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를 보라.
a를 읽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하겠다. 사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나오는 말씀, '먼저'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른 해석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그저 윗자리로 모셔놓는다고 하면 다른 일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라는 논리를 도출해 낸다. 소위 말하는 우선 순위의 원칙이라는 것을 수립해 가지고 하나님을 그저 우선 순위의 제일 첫 자리에 놓기만 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먼저' 라고 하는 헬라말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말이다.
누가복음 12장 31절에서는 뭐라고 했는가? 거기에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 보면, '먼저'라는 말이 빠져있다. 없다. 마태복음에는 '먼저'라는 말이 있지만, 누가복음의 같은 내용의 말에는 '먼저'라는 말이 누락되어 있거나, 일부러 빠져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무엇이 다른가? 마태복음은 유태 청중을 위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비유대 독자나 청중을 위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빠졌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고 그 다음에 제2, 제3, 제4의 것을 잇달아 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의미론적인 의미에서 유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오직'이라는 뜻으로 기록한 것이지, 무슨 순서나 우선 순위를 말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마태복음 4장 10절을 읽자.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먼저'라는 말은 '다만'이라는 말과 의미론적으로 볼 때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만 하나님을 그저 윗자리에 모셔 놓기만 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네 마음대로 해라 고 하는, 포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만을 섬겨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땅 위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진실로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그의 여파로 땅 위에 있는 사람에게 그 복을 내려 가지고 아울러서 그들도 축복을 받게 하자, 이것을 말하는 거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를 한다든지, 혼선이 빚어지게 될 때에는 교회에서 어마어마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중요하신 분이시니까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주 굉장한 주의집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끔 하나님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이 구차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되겠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또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언제나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인데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행동으로 말미암아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선한 행동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감리교/장로교 교리 차이)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라는 말에 대해서는 '오직'이라는 말로 해석하도록 지금까지 말한 것을 기억하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일생 가운데서 생활의 일부분이나 시간의 한 부분, 혹은 그에 상당한 몫을 나에게 바쳐다오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그 십자가를 통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p.313의 b부분을 읽자.
여기에서 볼 것 같으면, 지금까지 말한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교회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파이라고 하는 서양의 떡과 같이 떡의 한 조각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 전체를 바치라는 것이다.
또 교회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수백만, 수천의 돈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 일에만 국한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관하는 그 공동체에 내가 소속해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하는 일이다.
또 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다음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봉사라고 하는 것이 따라와야 한다. 예배가 먼저이고, 봉사가 따라와야 한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것을 여러분이 파악을 분명히 하셨다고 한다면 앞으로 남아있는 여러 공과들을 공부함에 있어서 이해가 훨씬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