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과. 이단들 ― 옛날과 오늘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재목의 글과 같이 이단들에 대해서 이다.
많은 경우, 기독 신자들은 '이단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이다. "그들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등의 큰 잣대 몇 개를 들먹이며, 소위 '사랑논리'를 편다. 그러다가 자신의 가족이나, 친인척 또는 가까운 이웃이 이단문제에 직접 관련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이단문제 기준에 변화가 생긴다. 심지어 "성경에 일점 일획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철저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단문제의 심각성을 "당해봐야 안다"고 말할 정도다.
과거와 단순 비교해 볼 때 오늘의 이단문제는 신학적(또는 교리적) 깊이를 요하고 있다. 즉, 과거에는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재림예수다" 등의 원색적인 주장을 하는 류(類)가 많았다면, 오늘에는 "성경공부를 해보자"며 접근해 이설(異說)을 은근히 전염시키는 류(類)가 많아졌음을 볼 수 있다. 또 그런 단체가 오늘에는 큰 활동성을 보이고 있다. 소위 지식인층의 욕구에 적절히 부응했기 때문이다. 이런 단체는 일반적으로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00교회'라는 식의 흔한 교회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이라고 해서 원색적인 주장을 하는 단체가 발을 못 붙이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산업화, 정보화 시대인 오늘에 오히려 복잡한 교리가 설파되는 단체보다 단순명료한 교리가 있는 단체를 찾으려는 심리도 있다. 그래서 과거와 같은 식의 단체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10여 년 후쯤에는 더욱 원색적인 주장들이 난무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오늘날에는 모든 이단 및 이단성 단체들이 다양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그들은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위한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며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단문제는 '특별한 사역'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이단문제가 특별한 단체나 사람의 몫이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교회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단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이단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규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단들은 허황되고 간사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함으로써 더욱 더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그 가운데 몇 세기 동안 교회를 가장 심각하게 어지럽혔던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이 그림은 영지주의의 사상이 무엇이냐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그림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어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100% 영적인 존재다" 라고 주장한다.
밑에 있는 반원은 지구를 말한다.
중간에 있는 달처럼 생긴 것은 헬라어로 아이온(aeons)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영이신 하나님은 물질인 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아이온을 여러 개 만드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각기 떨어진 거리에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이 물질 세계인 이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아이온 위에 면류관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권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경에 보면, 권세 잡은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러한 권세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이 인간의 몸을 만들었고, 세상 물질을 만들었다고 주장을 한다.
따라서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소위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영이시고 가장 멀리 떨어진 신성을 가진 어떤 아이온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성을 가진 어떤 조각들이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의 몸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인간의 무지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영적인 지식을 가져야 다시 본래의 그가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신적인 빛, 신적인 지식을 인간이 가지게 될 때에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 사상의 핵심이다.
이들은 이러한 영지적인 사상의 구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먼저 p. 298에 있는 그림 29A를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림 29를 보완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그림 29A를 보라.
이 그림은 소위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기독론이다.
그들은 예수님은 아주 선한 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게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이전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인간 예수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하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신적인 빛인 지혜를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후광을 보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하늘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영지주의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으로 그러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은 과연 누구이시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그들은 인간 예수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기독교의 속죄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결국 신은 죽을 수 없고 죽는 것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의 무지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에 대해서는 전혀 강조를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에 사랑이라든지 서로가 섬기는 삶에 대해서도 강조하지 않는다.
그림 29A를 설명하면 이렇다.
아이온을 통해서 인간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그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지혜가 들어왔는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지혜가 나갔는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인간 예수가 죽었다고 그들은 주장을 한다.
이들이 기독교의 모든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지주의의 성립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눈으로 확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헬라세계에서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경향이 많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런데 이것도 헬라 세계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영지주의이다.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세례 받기 전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지혜가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떠나갔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당면한 문제 가운데 이들의 영지주의적인 잔재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잔재물 가운데 하나가 여호와의 증인과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대부분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림 29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 주셨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신적인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다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본래 있었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그러면 결국 우리의 육체는 무엇 하는데 사용되어지는가?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느날 먼지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에 우리의 육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저 먹고 마시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가르쳐 왔다. 우리의 육체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영적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구원파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들은 한번 구원받았으면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을 한다. 왜냐하면 한번 회개하여 구원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회개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는 빈껍데기인 육체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기도문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구원을 이루는 회개는 한번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나는 거룩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성화'라는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이루는 회개는 한번으로 끝나지만, 성화를 이루는 회개는 내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두 가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반율법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자들이다.
오른쪽 하단에 있는 그림은 여러 가지 계명으로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율법주의, 혹은 염세주의자, 내지는 금력주의자들이다.
왼쪽 하단에 있는 그림은 반율법주의, 혹은 쾌락주의자들이다. 특별히 사도행전 17장 18절에 나오는 에비구레오가 반율법주의자에 속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많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단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단이란 인간의 논리와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썩은 둥지에서 피어난 것이 공산주의와 이단들이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나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속역사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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