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과. 마지막 날이 이를 때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단원의 내용은 죽음 이후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 단원을 공부하면서 죽음 이후에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를 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림 22를 보시기 바란다.
이 그림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죽은 이후에 있게 될 사건을 어떻게 가르쳤으며, 또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셨는가를 비교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 시대가 이 세대의 마지막에 있게 될 것이며 죽은 자들은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심판도 받고, 부활도 하고, 영생도 얻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 이후에 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 시대가 자신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가르치셨다. 심판이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심판이나 부활이나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애 동안에 개입을 해서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해결이 되는 문제라고 말씀을 하셨다.
가령 한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불러일으키셨다고 하는 문제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문제에 대해서 그를 불러일으키시기 전에 그의 누이가 했던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르다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나야말로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이러한 내세가 전개된다든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죽은 다음에 스올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있기는 있지만 결국은 이러한 진정한 영생의 문제는 시간의 끝 날에 땅위에서 되어지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부활했을 때 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세에서의 부활이라기 보다 그 당시의 어떤 구조에 살아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땅위에서의 왕이 되실 것을 거부하시고 승천하신다든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유대 사람들은 대 혼돈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심으로 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관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사실 죽음이라고 하는 관문, 그러니까 우리 육체가 숨이 끊어진다든지, 무덤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그 사실 자체는 그렇게 유쾌한 것이 못되고 바람직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죽음 이후에 전개되는 세계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지나가는 통로요 관문이라고 하는 인식을 새롭게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징그러운 것이 아니다. 이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통과하는 문과 같아서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간 다음에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그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을 때 죽음이라는 것은 꽉 닫혀진 비밀이라기 보다는 창살이 거기에 뚤려있는 것들을 봄으로써 우리가 그 창살 틈 사이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이미 내다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죽음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 미리 알고 전망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한 다음에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두 손을 들어서 우리를 맞이하신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듯이 환영하는 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그때 우리를 맞아들이게 될 때에 두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오른쪽에는 양과 같이 주를 위해 충성했던 백성들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영접하실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왼쪽에 있는 것은 염소와 같은 무리들로 이들은 주님을 반대했던 불신자들인데 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그러한 절차만 남아있게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후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환영하시고 영접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죽음 이후의 문제를 분명히 깨닫고 믿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믿는 생활을 하면서 승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다.
그러면 이 시간이 끝난 다음에 우리를 영접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p.228의 그림 22A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림 아래에 손이 어긋나게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른손에 우리가 자아 중심의 죄악 가운데 살았던 범죄를 잡고 계신다. 그리고 왼손에는 은혜를 잡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에 교환하셨다. 어떻게 교환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우리의 범죄를 이렇게 맞바꾸셨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그림을 어긋나게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p.229 맨 위에 보면, {A.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의 특징}이라고 해서 거기에 보면 마태복음 25:31∼46절의 말씀이 소개가 되고 있다.
이 세상이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양손을 들어서 우리를 환영하실 것이고 모든 고통과 고난과 슬픔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성경구절을 간략하게 말씀을 한다면 이렇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재림하게 될 때에는 구름을 타시고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그때에 우리 모든 사람들이 부름을 받아 올라가게 되면 그것으로 우리들의 땅 위에서의 생애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오른쪽에는 양을, 왼쪽에는 염소로 구분하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런 말씀도 하시기 전에 벌써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보면, 긴 줄을 만들어 가지고 이 사람은 왼쪽으로, 저 사람은 오른쪽으로 서라고 하거나, 출석을 부르면서 야단법석을 뜨는 그러한 이야기가 나와 있지를 않다. 먼저 그들을 좌우로 갈라놓는 일을 하시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 갈라진 두 그룹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순서의 문제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양무리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오라"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심판의 선언이라기 보다는 환영사라고 말을 해야 옳을 것이다. '나아와', '오라'는 말은 환영사이지 심판의 어귀가 아니다. 여러분께서 만약에 교회 사택에 오셨을 때에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는 말은 어떤 재판관이 여러분에게 심판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을 환영하는 말이 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오라" 우리가 이와 같이 환영을 받는 까닭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기초로 해서 우리를 환영하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은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고 하셨다. 사실 우리가 어떤 유산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당당히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를 차지하여라"고 하셨다. "너희가 노력함으로 만들어놓은 나라를 차지하여라"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데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보면, 시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기초를 놓을 때부터, 창세 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작정하신 그대로 계획을 진행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인간들처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를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신다.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오른쪽에 모여있던 양들은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언제 잡수실 것을 드렸고, 마실 것을 드렸으며, 영접하였습니까? 언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전혀 기억에 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환영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은혜에 입각해서 환영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언급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종으로써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처럼, 땅 위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초로 해서 칭찬을 하셨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다음에 우리의 아름다운 행위가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한다. 이들은 그들의 고백과 같이 주님께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요, 나에게 한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어린 소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저는 어린 소자의 개념을 이렇게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나보다 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곧 어린 소자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행위를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다는 말이다.
이제 왼쪽에 있는 염소의 무리에 대해서는 "저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갈 지어다"라고 호통을 치신다. 그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라고 항변을 하고 있다. 보라. 그들은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서 일일이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머리 속으로 기억하고 있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은혜롭게 가슴에 간직되지 않았다. 은혜가 이것이 실제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져 본 체험을 전혀 해 보지 못한 무리들 같다.
사실 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자들은 따지고 보면 무엇을 좀 했다고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전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정죄와 박대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남에게 딱 부러지게 무슨 악한 일을 했다기 보다는 그들은 진실로 주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주자는 데 있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 끝 날에 주님 앞에서 큰 위로도 받게 되고,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양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날을 바라보는 우리 양들은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확고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그림(22B)을 보라.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 올라가면 도대체 하늘의 광경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을 말씀드린다면 성경에는 하늘 나라의 여러 광경에 대하여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서는 다만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모든 것을 잘 마련해 놓으실 것이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장차 올라와서 너희들의 눈으로 보면 알게 될 것이다"는 의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대의 관심사들은 우리의 죄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며, 심판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며, 그리고 장래 우리가 가지게 될 영원한 생명의 보장과 확신의 문제를 주로 취급하고 계신 것 같다.
성경을 보면,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묘사하기를 "잠들었다, 잔다" 이와 같이 표현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 덕택으로 잠드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쏘는 가시는 예수님께서 그 가시를 뽑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아프고도 쓰라린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편안한 관문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포인트는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징그럽고도 엄청난 저주를 변화시키셔서 그것이 다만 하나의 기나긴 잠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잠자는 자를 깨우시는 자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내가 잠자는 것, 소위 말해서 죽는다고 하는 것,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고백하고 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이 왜 좋은가?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을 보면 하늘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좀 전에 말씀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있게 될 때에 가지게 될 영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언급해 놓았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4, 5, 7, 21, 22장에 그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그림 22B]이다. 거기에 표현된 문구는 묵시문학적 문구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그림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큰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이 여기에 나온다 그는 모든 우주의 주재자가 되신다. 그 옆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고 보좌 양편에는 사자와 소, 독수리와 사람이라고 하는 4 영물이 있다. 이 네 가지의 영물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사자가 모든 동물의 왕으로써 두렵듯이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소는 힘이 세다. 이처럼 하나님은 힘이 강하시고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독수리는 기동성이 날새듯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사람은 지혜로운 존재인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 네 영물에 눈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눈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못 보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의미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또 거기에는 24왕관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24장도들의 왕관이다. 네 영물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24장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런데 이들 24장로 둘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이 둘러 쌓여 있다. 그리고 천사의 외곽에는 또 하나의 둘레가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피조물들이다. 이러한 모든 피조물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부른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고 해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꼭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고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묵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둘러싼 무리들의 광경이 그야말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묘사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묘사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의 한 모퉁이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왼쪽 밑에 보면, 성찬의 포도주와 떡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천국에서 있게 될 잔치를 상징한다. 하늘에 있는 모든 천군 천사들과 땅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여 계시는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
여기에 나온 그림 그대로 이제 그날이 오게 되면 우리가 다 거기에 올라가서 천군 천사와 더불어 목소리를 합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찬양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