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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음 성경대학

Heart of Christ Bible College & Christian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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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과. 나라가 지금

 

예수님은 메시아 시대가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다.  그의 부활은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역과 교훈은 그가 오시기 전 이스라엘에 있었던 여러 가지 견해들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와 설명을 더해 주었다.  그림 15는 이러한 몇 가지 진술을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림을 보시기 바란다.  이 그림은 남은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수요가 점점 증가되는 것을 그림에서 볼 수가 있다.  이것이 부채살 같이 범위가 넓어지다가 시내산을 겪으면서 점점 범위가 좁아져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에서 남은 자가 아주 극소수로 축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구약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던 '참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열을 겪으면서, 그리고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서 참 이스라엘의 수효는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어서도 모두가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그 수효는 아주 소수로 남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시기 1세기 전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과 그렇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엄격히 구분하기 시작을 했다.  이것은 유대 사람들이 조작으로 만든 구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엄격한 구별을 하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유대 사람들이 자기네들만이 하나님께 소속되었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사고를 통해서 나온 생각이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으로서의 주님이신데, 드디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 메시아상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의 규정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구분법이 아니라, 문제는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 하는 두 가지 구분으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이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가 중요하다.  유대교에서는 '그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아닌 자'인가를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에 그 기준을 두었다.  그러나 신약은 민족주의적인 장벽을 제거하고 그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의 구별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라든가 피부 색깔의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한 인격체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이다.


 

유대인들의 사상은 현재까지도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역사의 종말에 메시아가 올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들은 아직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날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파멸의 날이 될 것이고, 그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날이 될 것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왔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대인들의 안내원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한다.  "메시아가 장차 오시게 되면 …"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유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일컬어오던 그 메시아는 이미 오셨다.  그리고 소위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메시아 강림의 그날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요,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신 그 현재부터 새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 메시아는 오셨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시점이 현재 시점에 처하게 된다고 생각을 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사셨다 라는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어떻게 그것이 메시아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메시아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을 그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부정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기대한다던가, 우리가 원한다던가 하는 것을 꼭 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권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만을 하신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  그런가 하면 또 올 것이다.  주님께서 이미 왔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오셨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림 15A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 계약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까지의 모든 세계의 역사를 축소한 그림이다.


 

우리가 지난 단원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보면, 창세기 1∼11장까지의 것을 그림에서는 삼각형 끝이 뾰족하게 내려오는 것으로 구분을 했다.  그리고 그 아래 A라고 하는 알파벳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까만 삼각형은 옆으로 눕혀서 삽입을 한 것이다.  창세기 1∼11장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세상에 부름을 받아 나온 이야기를 도입부 형식으로 묘사하고 기록한 것이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창세기 1∼11장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한 도입부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서 사명을 부여해 가지고 한 민족을 뽑아 세우실 것에 대한 언약을 세우셨다.  여기에 볼 것 같으면 화살표가 하나님 쪽으로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인간들에게 일방적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언제나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시작을 하신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언약이다 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우신 이러한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여기에 매이게 하시고 절대로 변경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해 두는 것 같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면서 할례를 명령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체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내가 받던, 받지 않던 그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위에서 내리는 일방적으로 체결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시내산이라고 하는 무대로 모으시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시게 된다.  이 언약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인간의 의무의 언약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무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은 돌비석 2개, 십계명 돌판을 여기에다 그려 놓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돌계명에 나오는 그것을 이행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이 계명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순서를 착오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세우실 때 장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지난 과거에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했노라고 하는 과거에 대한 언급만 하셨다고 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도'라는 두 개의 낱말이 공식이 된다.  그리고 이 언약에서는 '∼하라.  그러면 ∼하리라"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온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다음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다.  여기에서 D라는 것은 David라고 하는 다윗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은 왕조에 대한 언약이다.  그림에서 이 왕관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다윗과의 언약도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같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하신 언약이다.  그러나 이 두 언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온 민족과 더불어 세우시는 언약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언약은 한 개인인 다윗과 세우신 언약이다.  두 개 언약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이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진지하게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그 민족의 운명은 나라는 망하고 그들 자신은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된 다음에 그림에서 의문부호(?)가 있듯이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러한 민족적인 수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에 대한 큰 의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되지 못했던 것은 인정한다는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우리에게 포로 생활이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떠나지 않는 의구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포로로 잡혀가게 된 다음에 수 백년 동안 유대 사람들은 소위 '유대교'라 하는 국가 종교를 만들게 된다.


 

그림에서 구불구불하게 파도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성경적으로 이 시기는 국가·민족적인 혼란의 시기였다는 것을 상징하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국가적인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언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 국가적인 불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율법을 복종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왜 복종하려고 하느냐 하는 동기면을 따지고 볼 때,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이용한다든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빨리 이 고통에서 풀어주도록 하게 하자는 그런 저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유대 사람들은 국가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절대적인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탄생의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으리으리한 궁전에서가 아니라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림에서 보듯이 그분은 무릎을 꿇고 왕관을 쓰고 계신다.  얼마나 이상적인 모습인가.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시계를 스톱시켜 놓고 이때부터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 보면, 성찬식을 상징하는 컵과 떡이 나와 있다.  일련의 이야기 가운데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요, 너히를 위하여 찢기울 살이니'라고 성만찬 하신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성찬식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에게 소속한 사람이고, 또 그 예수님이 약속한 모든 약속에 참여한 자라는 것을 암암리에 고백을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언약, 그러니까 아브라함과의 언약, 시내산에서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 그리고 신약에 나와있는 이러한 언약과의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로 시작되었단 모든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다윗과 아브라함과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고,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은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포로 이후부터는 그 언약은 있으나 마나한 사실이 되었다.  또 포로 이후에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예인고로 하나님께서 그 후예를 버리실 리가 만무하다'는 이야기를 늘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와 같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시내산에서 우리에게 주신 옛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대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빨간 줄을 가운데로 끊어서 땅 밑으로 해서 그려진 것은 옛 언약이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은 성취가 되었고, 다윗의 언약도 성취가 되었다.  그리고 시내산의 언약은 신약으로 대치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단원 7과 p.62의 그림에서 1∼6까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은 '전문'이다.  전문은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와 같이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된다.  신약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엡 1:3)


 

2는 역사적 진술이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 보면 역사적 진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었느니라"  그러니까 역사적 진술은 '너희 구원을 위하여 내가 이미 성취한 것들은 이러 이러한 것들이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의 이러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내용은 그림에서 잘 나와 있다.  종되신 예수님께서는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시고, 아래로는 우리들을 섬기시는 그림이다.  여기에 손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관심한 표정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무관심한 인간의 종국적인 운명은 옆에 있는 무덤 어구에 있는 해골로 상징이 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므로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우리가 그림에서 보는 그대로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저 단순히 앉아서 '사실이 그렇게 되었구나'하고 지적으로 관망이나 해야 하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관망적인 자세로 있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림 3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3은 규정이다.  구약에서는 돌비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말씀, 그러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규정에 대한 내용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 번째 그림과 같은 삶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종되신 왕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무릎을 꿇고 남의 종이 되라고 하는 실천의 명령을 주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를 맺을 수 있다고 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겸손히 섬기는 종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본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예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게서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아서 그를 닮아가야 한다.


 

4는 보존과 읽기라고 말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언약의 조항들을 규칙적으로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약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들이 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언약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듯이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신약이라고 하는 새로운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4번에서는 '∼하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림 5는 증인들에 관한 내용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손을 번쩍 드신 상징적인 그림을 볼 수가 있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함께 하시되 비둘기로 나타난 성령으로 함께 함으로 '주는 우리와 함께, 우리는 주와 함께' 라는 상황이 5번에서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게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 6은 축복과 저주에 관한 내용인데, 오른쪽은 축복이요 왼쪽은 저주이다.  오른쪽은 양이고, 왼쪽은 염소의 그림이다.  구약 성경 신명기 28장에 보면, 언약을 준수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불순종할 때에는 저주가 임한다는 말씀이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팔 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라는 용어들은 역사의 마지막 날, 심판의 장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음 그림을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인간이 오해를 해서 혼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서 말해 주고 있다.  이 그림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기본적인 언약을 상징하는 표가 나와 있다.


 

먼저 왼쪽의 그림을 보라.  이 사람은 1과 2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라는 전문과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하였다'고하는 역사적 진술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십계명 돌판이 있듯이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은혜로 구원받으면 되지,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안 보이고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말하곤 한다.  이 사람은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런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면 되는 것이지, 그전에 무슨 은혜다, 무엇이 어떻다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이 사람은 율법을 머리에 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어떤 반응이 없다.  이들은 언약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이들 두 종류의 사람은 은혜라는 것과 율법이라고 하는 극단을 치닫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성경에는 은혜와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은혜와 율법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취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언자나 바울이나 야고보는 은혜를 외치면서 행함이 없는 자를 규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은혜를 전혀 도외시하고 행위만을 따지는 사람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책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 2, 3, 4, 5, 6의 모두가 필요하다.  즉 은혜도 필요하고 행위도 필요하다.  이것을 다 갖추는 성도가 되어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행위만으로 구원의 증거가 나올 수 없다.  우리는 은혜와 행위를 통하여 이 둘에 대하여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증거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림 15D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좀 복잡한 것 같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 것 같다.


 

왼쪽의 그림을 보라.  이것은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11장까지의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이미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관심의 초점을 맞추셨다.  그림에서 아브라함을 향해 점점 좁혀진 삼각형이 4부분으로 구분되고 있는 것은 창세기 1장 이후에 언급되고 있는 네 차례의 죄(선악과, 살인, 노아 방주, 바벨탑 사건)와 심판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부채살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그 선민의 남은 자를 작정하시는 것은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반면에, 인류는 그 수효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점점 좁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남은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넓어지는 것은 인간의 수효는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그림에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이렇게 부채살 같이 확산되어 가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방향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처음의 화살표는 아브라함의 언약이다.  땅과 자손과 민족들에게 축복을 내리신 것이 나온다.  그리고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나오게 된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시내산에 불러모았을 때 언약을 주셨다는 상징의 그림이 나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중간에 거하시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후에는 다윗에게 언약을 내리시되 다윗을 통하여 왕통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의 사이에 있는 화살표를 보라.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의 화살표는 앞으로 뻗쳐 나가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화살표이다.  이 언약은 약속의 언약들이었다.  반면에 시내산의 언약에 있어서는 미래에 대한 언약이라기 보다는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지난날의 모든 일에 대해서 그들로 회상하게 하고 깨닫게 하려는 과거에 대한 화살표이다.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은 앞으로 행하실 일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과거에 행하셨던 바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은 화살표가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민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화살표가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에서는 화살표가 뒤를 돌아보게 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양심으로 하여금 뉘우치고 깨닫게 하자는 의도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 다음에는 선지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언제나 시내산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그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부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언약을 너희들이 진지하게 복종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저들에게 책망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백성이 하나님의 종들의 경고를 듣지 않게 되자 그들은 드디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의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의문부호(?)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면서 왜 우리들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 때에는 이러한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빛이 될 만한 백성이 되게끔 강하게 연단을 하신다.  그리고 이들이 포로로 왔다고 해서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는 희망을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유대교'라는 것이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이 되었지만 이것이 점점 확산되어 간다는 것이 그림에 나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포로 이후 시대에까지 그들은 외국 군대의 지배하에 있었다.  검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들은 이 시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게 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모든 법전을 613절로 하고, 사두개인들은 성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고 성전에 종사하게 된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집중적으로 연구를 한다.  그리고 셀롯인인 열심당은 칼을 가지고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말구유와 십자가가 나온다.  실로 메시아는 그의 택한 백성들의 중심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들은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무릎 꿇고 봉사하시는 그림을 통하여 시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언뜻 보면 복잡한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완전히 하나로 통일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가 오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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