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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으로

응답받는 기도로

믿음 소망 사랑

기도로 물질로 손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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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19세기말 말라리아·성병환자 많았고 천연두도 매우 심각


알렌 보고서로 본 한국 의료 상황

알렌 선교사(Horace N Allen)가 1885년 4월 10일 설립한 한국의 첫 근대병원 제중원(설립 당시 명칭 광혜원)은 첫해에만 2만529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병상 수가 40여개에 불과했던 작은 병원에서 휴일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100여명이 치료를 받은 셈이다.

1886년 알렌 선교사는 한국에서 보낸 첫해 활동 내용을 담은 '한국 정부병원 1년차 보고서'를 미국의 선교본부로 보냈다. 이는 서양의 의학적 관점에서 19세기 말 한국의 질병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첫 문서로 알려졌다.

문서에는 제중원을 찾은 1만460명의 기록이 병명으로 구분돼 있다. 당시 제중원을 찾은 환자 가운데 가장 많은 환자는 학질(말라리아) 환자로 약 1000명이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4일열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매독 등 성병 역시 학질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제중원에서 첫해에 치료한 매독 환자가 1000여명이었다.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인들이 매독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점을 특이하게 여겼다.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천연두도 심각한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100명 가운데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이들이 30∼40명에 달했고,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 천연두가 발병한 아이들은 4세가 되기 전에 절반 정도가 사망했다. 옴과 머릿니 등 각종 피부병, 기생충으로 인한 질병 등으로 고생하는 환자도 많아 19세기 말 한국의 보건·위생 환경을 짐작하게 했다.

제중원 개원 첫해 800여명의 여성이 서양 의술로 치료를 받았다. 선교사들은 당시 매우 보수적이었던 구한말의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1886년 미국북장로회로부터 여성 의료선교사 앨러즈(Annie J Ellers)가 파송돼 국내에 부녀과가 신설됐고, 본격적인 여성 진료도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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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10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② 근대병원 개원


'많은 사람 구제하는 집'… 조선민중 의료 문턱 낮춰

"해야 할 업무가 끝없이 쇄도해 그만큼 책임과 초조감이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따금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 의료선교사이자 고종황제의 어의로도 활동했던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가 제중원(광혜원) 설립 한 달 뒤인 1885년 5월 12일자 일기에 기록한 내용이다. 

한국에 있어 외국 의료선교사들의 사역은 단순한 의학적 치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왕과 왕비뿐 아니라 걸인과 나환자를 비롯한 모든 계층을 상대로 한 '열린 치료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구한말 한국사회의 열악했던 보건·위생 환경은 당시 한국을 찾은 의료선교사들의 어깨를 그만큼 무겁게 했다.

1884년 9월 20일 인천 제물포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는 이듬해 제중원을 설립했고, 첫해에만 2만여명의 조선인 환자가 제중원을 찾았다. 당시 한국의 인구가 1500만여명이고, 수도 서울(한양)의 인구가 30만명으로 추산된다는 점에서 제중원은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큰 역할을 감당했다. 죄인과 환자를 가리지 않고 가까이 하고 치료했던 예수의 사랑을 계급을 초월해 모든 계층에 전달한 것이 당시의 의료선교였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1884년 6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방문했던 미국감리회 매클래이(Robert S Maclay) 목사는 방문 당시 조선 정부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고 싶다"고 청원했고, 다음달 고종은 미국인들의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 이를 단초로 미감리회와 미국장로회가 본격적인 의료·교육 선교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미장로회다. 미장로회는 같은 해 2월 한국선교 기금 모금을 시작했고, 의료선교사로 청년 의사 헤론(John W Heron)을, 복음선교사로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임명했다. 하지만 1883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던 알렌이 한국 선교사를 자청함으로써 그가 한국 최초 의료선교사가 됐다.

알렌은 입국 이후 본국으로 보낸 첫 편지에서 "현재 이 나라는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으나, 나는 공사관 소속 의사이므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당시 외국인 선교사의 선교활동이 엄격히 금지됐던 상황을 전했다. 실제 고종은 미국공사로부터 알렌의 임명을 보고받고 "알렌이 선교사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공사가 공사관 소속의 의사라고 그를 소개해 알렌은 우리나라에 머물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의료 선교가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궁중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민영익과의 일화가 큰 역할을 했다. 민영익은 1884년 12월 일어난 갑신정변에서 급진개화파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이때 알렌은 독일의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f)를 도와 석 달간 민영익을 치료해 회복시켰다. 이 사건으로 서양의술의 효과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서양의 의료선교사에 대한 태도도 서서히 변화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중원이 설립된 해 5월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6월 헤론이 입국했고, 이듬해 간호사 엘러스(Annie Ellers), 1888년 홀튼(Lillias Horton) 등 의료선교사들의 입국이 이어지며 한국에서의 의료선교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다. 제중원을 통한 서양의술의 보급은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에 심겼다.

이후 서양의술의 전파와 선교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893년부터 부산과 인천, 대구, 평양, 개성, 충남 공주, 경북 안동, 전북 군산, 전남 목포 등 전국에 서구식 병원의 설립이 줄을 이었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를 뛰어넘어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를 양육함으로써 한국인 스스로 한국의 의료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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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17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③ 성경 한글 번역


민중 손에 우리말 성경… 신앙 공동체·한글 대중화 이끌어 

한글성경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이자 한글 보급의 역사이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 역사 중 드물게 선교사 입국 전에 성경이 번역 보급돼 다수 민중이 개종한 특별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85년 4월이지만 이보다 3년 전에 조선 민중의 손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언어의식의 대전환을 가져왔고 사회문화 변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조선에서 성경 번역은 '파나마 운하를 하나 파는 것과 맞먹는 일'이라는 게일 선교사의 말처럼 10년 이상 걸리는 험난한 일이었다.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우리말 성경의 쌍두마차는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 존 로스(1842∼1915)의 '예수셩교젼셔'(1887)와 이수정(1842?∼1887)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1885)다. 두 성경 모두 해외에서 번역됐으며, 조선복음화의 강력한 병기가 됐다.

'예수셩교젼서'는 최초의 우리말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1882) 등을 포함시킨 신약성경으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존 로스가 이응찬 등과 번역한 작품이다.

1872년 8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로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시도하다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머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선교에 뛰어들게 된다. 성경 번역 비용은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성서공회가 지원했다. 로스 선교사는 1880년대 외국 종교 서적의 유입이 금지됐던 조선 상황에서 서상륜 이성하 백홍준 등의 권서(勸書)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성경 배포의 주역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2만권에 이르는 단편 성경과 기독교 소책자를 배포했다. 복음의 씨를 뿌린 숨은 일꾼으로 조선인의 문화수용 능력과 개신교의 주체적 출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경 보급을 통해 조선에는 이미 잠재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몇 년 앞서 성서공회는 은둔의 왕국에 들어갔고 로스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한글판 신약성서가 만들어졌다. 그 책들은 장돌뱅이와 권서들, 그리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의주와 평양에서 말씀에 의해 정결하게 된 적지 않은 신자들을 발견하였다."(털리 선교사의 'Ping Yang in Korea', 1895)

또 다른 성경인 이수정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 입국 당시 갖고 들어온 성경으로 한문에 익숙한 식자층 전도에 유용했다. 이 성경은 미국성서공회가 조선에 성서반포 사업을 공식적으로 개시한 1887년 인천제물포와 서울을 중심으로 5000권이 배포됐다.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피선교국의 번역 성경을 갖고 들어간 경우는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일로 손꼽히고 있다.

◇성경, 한자의 독점을 깨다=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을 때 선비와 지배층은 문자 혜택을 독점해 일반 민중을 우민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녀자들은 한글을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천시하는 풍조가 팽배했다. 그야말로 한자 중심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선교사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새로운 땅은 불행하게도 중국의 흔적에 완전히 뒤덮여 있다… 민요와 이야기책, 아녀자들을 위한 몇몇 소설을 제외한 모든 것은 한자로 표기되었으며 중국사상의 틀에 주조돼 있다. 조선의 언어는 원시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글로 쓰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그리피스 선교사의 'A Modern Pioneer in Korea')

한문 숭상의 몰주체적인 전통에 짓눌려 한글이 천시되던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성경으로 문자 독점을 깨기 시작했다.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선 성경과 전도문서를 읽히기 위한 한글 배우기 운동을 일으켰다.

성경은 한글의 저변 확대와 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침은 물론 사회문화 변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기독교와 한글'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한글의 부흥, 정리 및 보급에 대하여 막대한 공적을 끼친 것으로 우리가 예수교의 선교 사업을 들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사람으로서 이 한글 보급의 기독교의 위대한 공적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가지지 아니할 이도 없을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이 성경을 읽도록 해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며서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 자양분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애국 독립운동 참여, 신분제 철폐, 민주질서 확립 등 자기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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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24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④ 청년운동의 산실 YMCA


청년들에게 구습껍질 깨고 변혁과 민족비전 심어주다

송강호·김혜수 주연의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

영화의 배경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와 과거제도가 막 폐지된 조선의 한양이다. 양반이라는 이름만 걸친 호창(송강호)은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김혜수)과 우연히 마주친다. 호창은 정림에 대한 이성적 관심과 더불어 '신문물의 상징'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지면서 급기야 조선 최초의 야구단에 몸담게 된다.

실제로 존재했던 황성YMCA 야구단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는 한국 근대화 여정에 있어서 YMCA의 존재와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구(1905년)와 스케이트(1908년), 배구(1916년) 등 주요 현대 스포츠 종목을 처음 들여왔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 계몽, 독립운동 및 청년·민중 운동이 시작된 곳이 바로 한국YMCA였다.

"우리는 매일 거리를 쏘다니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본다. 그들은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자극만 있으면 가장 유망한 청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4월, 헐버트 선교사가 자신이 펴내고 있던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에 쓴 글의 일부다. 그로부터 6개월 뒤 한국의 첫 기독청년회 단체인 '황성기독교청년회(황성YMCA)'가 창립됐다. 서울 인사동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도서실, 기도실 겸용 교실 등을 갖춘 임시 건물을 갖췄다. 황성YMCA의 초창기 모습은 당시 연동교회 담임이었던 게일 목사의 글에서 그려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YMCA를 통해 우리의 소원이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류층의 자녀들, 상인들의 자제들, 선비나 양반의 자녀들이 모여와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황성YMCA가 역점을 둔 사업은 교육이었다. 사농공상의 편견과 그릇된 관념을 깨고 공업과 상업교육을 실시했다. 뜨개질과 도자기 굽기부터 비누 만들기, 목공, 철공 등 다양한 실업 교육을 실시했다. 1904년 시작된 주3일 야학의 수강생은 처음엔 150여명이었으나 4년 뒤에는 10배가 넘는 1800명에 이르렀다. 수시로 열리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등단, 언제나 초만원을 이뤘다.

교육사업은 민중 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가며 복음전도회, 외국인 연사초청 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1925년대에 들어서면서 YMCA는 서서히 농촌으로 눈을 돌린다. 소비조합, 신용협동조합, 야학, 양돈, 양계, 농업, 행정 등의 교육을 통해 농민들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단결을 도모한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농촌사업 조직을 마친 촌락은 188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이수한 이는 4856명에 달했다.

한국YMC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가 있다. 월남 이상재다. YMCA를 비폭력 단체이자 민주주의 단체이며, 실천 교육의 단체로 만드는 데 헌신한 리더로 평가받는다. 조선YMCA연합회 회장 출신의 윤치호는 YMCA를 국제적 화합의 무대에 서게 만든 주인공이다.

1914년 결성된 한국YMCA 전국연맹(한국Y·이사장 안재웅 목사)은 전국 65개 지회 10만 회원, 2200여명의 활동가를 보유한 국내 최대 기독시민사회 단체로 성장했다. 내년 4월 창립 100주년을 앞둔 한국Y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모체로서 제2의 출발을 준비 중이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초창기 YMCA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변혁의식과 민족의 비전을 심어주는 시대의 선각자 역할을 담당했다"면서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지금 이 시대에 YMCA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또 한번 헌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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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31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⑤ 원산·평양 대부흥 운동


회개→부흥→영적갱신… 한국사회 윤리의식 크게 끌어 올렸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 같은 달 2일 시작된 신년부흥 사경회가 13일째를 맞았다. 황해도와 평안도 등 각지에서 모여든 1500여 성도가 통성기도를 드린 뒤 길선주 목사가 강단에 올랐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는 1년 전 죽은 친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돈을 훔쳤습니다." 길 목사는 1년 전 죽음을 앞둔 친구로부터 셈을 할 줄 모르는 아내를 위해 재산을 대신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00달러 정도의 돈을 훔쳤다고 고백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날 저녁 600여명이 새벽 2시까지 남아 회개 기도를 이어갔고 20여명이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부흥으로 일컬어지는 1907년 평양대부흥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6월까지 평양 지역에서만 3만명이 회심했다. 길 목사는 1908년 압록강 순회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평양의 뜨거운 감격을 전국 교회와 나눌 수 있는 전도운동을 구상했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서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며 결신 카드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은 1만3000명이었다. 그해 9월 서울의 감리교회에서만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평양대부흥의 도화선은 원산부흥운동이었다. 로버트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890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 원산에서 의료와 전도활동을 펼쳤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 집회에 강사로 참석해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백인이라는 인종적 우월감, 의사라는 교만함, 성령 충만하지 못함으로 아무런 사역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며 회개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장인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당시 한국 성도들은 하디의 회개를 통해 처음으로 죄의 확신과 회개가 실제 경험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디의 회개 직후 양반 출신인 진천수라는 청년이 회중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는 "나는 병든 아내를 미워했고,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며 "아내가 병들어 죽은 후에는 이를 수습하느라 친구와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없어 아내를 저주했다"고 죄를 고백했다. 진실한 죄의 고백은 큰 울림을 남겼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열린 교파별 연합기도회, 1906년 8월 평양선교사 사경회 등 곳곳에서 회개가 잇따랐다.

원산·평양 부흥운동을 통한 죄의식의 각성과 실질적 회개는 일상생활에서도 큰 변화를 낳았다. 부흥은 개개인의 영적 갱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윤리 및 인권의식 제고와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평양대부흥 전후로 학교 설립이 급증해 1909년까지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한국교회는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음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인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술을 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던 여성들의 인권과 지위 향상에도 나섰다. 선교사들은 특히 건강한 가정을 파괴하는 축첩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남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했고,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남성들은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것이 허용됐을 뿐 아니라 이를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선교사들은 첩을 데리고 살거나 다른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것을 정욕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하나님을 바로 믿으라고 권면했다.

남성들에게는 정결을 회복하고 가정을 사랑하도록 교육했다. 당시 조선사회에는 조혼 풍습으로 인해 강제혼, 거래혼 등이 빈번했고 여성은 교육기회와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다. 한국교회는 이를 방지하고자 강제혼 금지, 남녀의 교육기회 평등, 조혼 금지 등을 주장했다.

북감리교 선교사 해리스(M C Harris)는 1908년 볼티모어에서 열린 북감리교 총회에서 "부흥운동의 여파로 수천명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면서 많은 술꾼들이 술을 과감히 끊고 도박꾼, 오입쟁이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됐다"고 보고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1903년 하디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윤리적으로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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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24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축첩·조혼금지부터 물산장려 애국계몽운동까지…


여성운동의 산실 한국YWCA

1960년 어느 봄날, 한복을 입은 여성 2000여명이 명동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 네모난 나무판자로 만든 플래카드를 하나씩 손에 쥐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축첩자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

이들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회원들이었다. 국회의원 가운데 첩을 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접한 YWCA가 집회를 열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축첩자 낙선운동'으로까지 이어진 활동은 당시 사회 이슈와 국회의원 선거를 연계했다는 점에서 한국여성운동사(史)의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여성운동의 산실 한국YWCA가 걸어온 발자취는 곧고 뚜렷하다. 지난해 4월 열린 창립 90주년 기념식에서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신뢰를 잃지 않는 모범생, 우등생 같은 단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4월, 김필례 김활란 유각경 등 3명의 여성 선각자들이 의기투합해 YWCA를 창설했다. YWCA는 설립 초기부터 사회문제부 등을 설치해 애국계몽 및 여성인권운동 등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인 이태영을 사회문제부 위원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YWCA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축첩·조혼·공창 폐지와 금주·금연운동 등이 꼽힌다. 물산장려운동 등 애국계몽운동 또한 병행했는데, YWCA의 대표적인 농촌계몽운동가였던 최용신(1909∼1935)이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으로 다뤄질 정도로 당시 활동은 활발했다.

53년부터 이어져온 한국YWCA의 가족법 개정운동도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성동본 불혼제도 폐지, 부모의 친권 공동행사, 상소제도 합리화, 이혼 및 사별 여성의 재혼금지 조항 폐지 등을 이끌어내는 데 앞장서 왔다. 그리고 2005년 국회를 통과한 호주제 폐지는 반세기 만에 이뤄낸 여성운동의 쾌거였다.

한국YWCA연합회(회장 차경애)는 현재 전국 52개 회원 YWCA와 250개 전문센터, 9만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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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20130724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성경이 나라를 흥왕케…" 일제때 복음이 희망이었다


을사늑약과 영적각성운동

1905년 대한제국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일본은 5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 친일파 대신들을 매수하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했다. 전국은 국권 상실에 따른 비통함에 잠겼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 가운데 영적 각성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을사늑약을 전후해 투옥돼 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 복음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료 죄수들에게 "예수교가 대한제국 장래의 기초"라고 역설했다. 그는 당시 신학월보에 쓴 사설에서 "예수교로 변화시키는 법이 아니면 독립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학월보는 1900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다. 독립운동가 이창실 목사도 장로교 신문인 그리스도신문에 1906년 1월 25일 사설을 싣고 "성경이 나라를 흥왕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에 전국 조직을 가동해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운동을 펼쳤고, 일제의 만행을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에 고발했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이런 배경에는 영적 대부흥운동, 대각성운동이 있었다"며 "기독교 신앙은 민족의 독립심과 주권의식을 고취시켰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는 절망은 민족의 신앙적 성숙으로 승화됐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하고, 1906년 음력설을 기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흥회를 개최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원산부흥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한 하디 선교사를 초청해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했다. 하디 선교사는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고백했다. 이 무렵 존스턴(H A Johnston) 박사는 장대현교회 주일설교에서 직접 목격한 영국 웨일스 부흥운동을 전하면서 "누가 조선의 교회를 부흥시킬 성령의 은혜를 받겠느냐"고 질문했다. 당시 장로로서 신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지체하지 않고 손을 들고 일어났다. 존스턴 박사는 장차 조선에 큰 부흥이 임할 것을 예언하면서 축복기도를 했다. 길 목사는 부흥사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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