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추상적인 하나님에 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나님이라고 생각되는 이미지(I' image de Dieu)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인 문제를 과소평가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원형은 자율적인 요소이고, 살아있는 주제로서 사람들을 휘어잡고 삶을 온통 위험에 빠뜨릴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나의 의지를 온통 사납고 맹렬하게 뒤흔들어 놓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들의 이름이며, 나의 개인적인 견해나 계획이나 의도를 뒤집어엎고, 내 삶의 길을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보편적인 틀로서의 원형과 그 안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담긴 원형상이 다르듯 하나님 지체와 하나님의 이미지 사이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원형과 원형상의 구별은 우리에게 모든 종교에서 신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기독교에서도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다르게 체험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모든 원형은 의식에 통합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생각의 형태로 나타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자기 원형 역시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할 때 의식이나 관계없이 여러 가지 작용을 하여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이미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밖에 인식될 수 없는 무의식의 자기 원형이 어느 사회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를 경우 정신 에너지는 다른 대상으로 흐르거나 정신 내면에 고여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거기에 있다.
현대 교회가 아무 의미도 없는 설교만 하거나 현대인들의 무의식적 요청과 무관한 도그마만 제시해서 현대인물이 교회를 떠나거나 고통을 받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교의는 근원적인 종교체험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아서 편집한 이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의는 사람들을 누멘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석처럼 되어 하나의 제도에 불과한 것으로 되기도 한다.
그때 교의는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되거나 전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 체험도 하지 못하게 하고, 외면 당하고 만다.
고대인들에게 종교상은 의미 있었고,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화 속에서 살았고, 신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제 많은 교의들을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리스도의 기적 역시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과 아무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일차적으로 현대사회의 지극한 합리주의나 세속주의 때문이고, 이차적으로 달라진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가장 강력한 원형과 떨어져 살면서 고통받는다.
교리는 무의식 과정이 나타내는 상징의 진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미지가 그 뿌리에서 전달되면 그것을 그의 존재의 기반을 묶어두었던 관계는 소멸되고, 메마르게된다.
그 경우 그 시원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게 된다. 이제 현대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찾아서 다시 활기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를 찾아온 환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융은 말한 적이 있다.
현대인들이 내면의 원천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고통 당하지만 현대종교는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4. 그리스도와 자기 원형
융은 자기 원형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분열 가운데서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전체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