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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18
14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육신하심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에는 은혜가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성탄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통하여서는 왜 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이 상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문제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일부분 일리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벽송 같은 프로그램이 없고, 장식을 잘 못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질적으로 오늘의 성탄이 왜 이렇게 변질되고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외부의 어떤 문화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남포동에 가보면 얼마나 화려한 성탄장식들이 꾸며져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4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데아오마이(theaomai)'로 영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 영안에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아 서, 자기 주님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플러스 인생](2013.12)이란 기독교 잡지에 어느 분이 왜 예수님이 가축들과 오물더미가 많은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 안에 태어났는가를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마구간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마구간 같은 우리 안에 오셔서, 그 중에서도 부끄럽고 못난 구유 같은 곳에 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얼마나 허물이 많습니까? 연약함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탁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끝이 없이 품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구약적 용어로는 '인자'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에 대하여 먼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찾아와 주셨고, 항상 하나님 쪽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믿는 집안에 태어난 것 이것 은혜가 아닙니까? 그 은혜가 희미하게 보이기에, 깨달아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에 우리를 통한 은혜가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성탄의 은혜가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오늘 이것을 살펴 보며 우리 삶에 적용하는 시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첫째, pros-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갈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
(1절)
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함께"(ho logos pros tou teon)라는 말은 '나란히' (meta)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다(para)'는 뜻도 아닙니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pros'는 방향성과 목적성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마주보다'의 의미입니다. 말씀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귀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고, 그 깊은 교제 속에 있었기에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요14:10) 예수님의 행동은 곧 아버지의 행동이었습니다.(5:17, 6:38)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그러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리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서 왜 마르다는 주님을 섬기려하면서 짜증이 나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반면 마리아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입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을 때 그의 열심에서 드러난 것은 오히려 강한 자아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동생을 향해 불평하고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앞에 pros 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교제와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도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움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제하여 주는 일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구제와 봉사는 주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할 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말씀과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주님께 집중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 보면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까?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과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기도 시간은 빨리 끝내고 성경 읽는 시간은 지루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누구와 오래 교제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면 그를 닮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오랫동안 면대함으로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새 정부가 들어서면 꼭 가까운 인척, 또는 가까이에 있던 중요한 인물들이 커다란 부정에 연루되는 것을 우리가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왜 이런 부정한 삶과 권력들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권력 가까이, 권력과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 지도자를 pros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시대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입니까?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가까운 관계도 없을 것입니다. 형제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지간은 같이 몸을 맞대고 삽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는 가까이 있을 지라도 마음이 멀면 구만리처럼 먼 관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마치 이와 같은 영적인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주님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주님을 통하여 내 이익만을 생각하고, 내 자아만을 살리려고 한다면 주님의 뜻과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을 향하여, 그 어떤 것 때문에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그분으로 기뻐하고, 그분과 깊이 있게 교제하고,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는 그런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향과 목적에 우리의 방향성과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의 축도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대면할 때 그곳에 축복이 있고, 평강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향할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주변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가 없습니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아만 들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주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였습니까?
두 번째, dewelling-자신을 비우고 나눌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14절)
1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14절에 그 하나님, 창조주께서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샤륵스'(sarx, flesh)입니다. 죄에 약하고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몸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특히 헬라인들은 육체는 악한 것으로, 영혼을 구속하는 하는 감옥이고, 정신이 유폐되어 있는 무덤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헬라철학들은 병적인 금욕주의나 심지어 육체를 자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성육신하였다는 내용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becoming이 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빌립보서 2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특권을 붙잡으려고,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made himself nothing 입니다. 케노시스(empty)입니다. 오히려 비우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 즉 섬기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어 낮아지심으로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누릴 수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심, 섬기려는 마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흘러넘치게 된 것입니다.
dwelling 거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주님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낮고 천한 마구간의 인생의 자리까지 낮아져주셨기에, 함께 있어 주었기에 그곳에서 은혜가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 장막을 쳤을 때 쉐키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났던 것처럼, 그리고 시은좌에서 용서의 은혜가 나왔던 것처럼 주님의 낮아짐으로, 함께 있어 줌으로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영광중에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열 제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깁니다. 은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2-45)
주님이 성육신 하신 까닭은 giving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자신을 주시려 한 것입니다. 나누려 한 것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KBS의 감동대상을 받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은 "울지마 톤즈"라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의과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된 이후에 신부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다 뒤로 하고 아프리카 남 수단의 부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톤즈에 왔습니다. 거기에 와서 학교도 세우고 또 한센병 환자도 돌봐주고 먼데까지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여 아프리카의 슈바이쳐와 같은 그런 일을 했는데, 거기에 전기가 없기 때문에 태양발전을 하고 냉장고를 돌려서 주사액을 거기에 넣어 놓고 병도 고쳐주고 치료하는 일에 온힘을 쏟아 밤낮으로 일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건강검진을 해 보니까 간암말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분은 자기 전부를 다 남 수단 톤즈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 바다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톤즈라고 하는 그 동네에 우물도 파주고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을 공부도 시켜주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가서 병도 고쳐주어서 살 희망을 불어 넣어 주므로 톤즈 사람들의 가슴에 이태석 신부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서 악대를 만들었는데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소식을 듣고는 이태석 신부의 영정을 앞에 들고 행진해 가면서 한국말로 가르쳐 줬던 노래'사랑해 당신을' 부르면서 이태석 신부님과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 시대에 성경은 오늘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며칠 전에 저희 안사람이 "여보! 여보! 책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하며 저를 붙잡아 놓고 일장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는 것, 돈을 버는 것,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 이성 교제를 하는 것, 승진하는 것, 다 즐거운 일이지만 그 즐거움은 잠깐으로 끝나야지 오래가면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즐겁다고 더 먹으면 병이 나고, 돈을 벌수록 근심도 많아지고, 이성 관계 중 성관계도 조금만 지나쳐도 병이 나고, 통치욕이 많아지면 전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누면 기쁨이 넘치고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이웃과 나누면 기쁘고, 명예욕을 버리고 나면 기쁘고, 재물을 없는 자와 나누면 기쁘고, 후진국과 나누면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탄의 계절에 주님처럼 더 낮아지고, 더 비워지고, 내 목소리가 작아질 때 그 곳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그 은혜가 흘러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함께 거해 주고, 동행해 줄 때 은혜가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줄 때 소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자기희생, 낮아짐을 이야기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율법 화되기 쉽고, 남을 판단하기 쉽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셋째로, Reimaging Evangelism-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줄 때 은혜가 흘러가게 됩니다.(18절)
18절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설명했다는 것입니다.(interpreted) 주석했다는 것입니다 (exegete)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가슴에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품속에 있었다는 것은 가장 깊은 친밀성을 표현하는 히브리의 관용어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육신으로 계시던 날 동안에 주님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을 때 그는 주님의 가슴속에 뛰는 박동 안에 숨겨진 십자가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심정에 있는 것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한이 연로하여 거동조차 힘들게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갈 날이 가까워지자 한 번은 그 제자들이 요한 사도에게 이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 소천하실 날이 가까웠는데, 마지막으로 저희들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이에 사도 요한은 이르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말하기를, "선생님, 그 말씀은 많이 들었으니 그것 말고 뭐 다른 좋은 말씀이 없으시겠습니까?" 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같은 답변을 들은 제자들은 마지막 세 번째로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사랑 얘기는 이제까지 족히 들었으니 그것 말고 다른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세 번째 역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훈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품속에 안겨 그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심장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창녀촌으로 팔려간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순정은 있었나 봅니다. 그 여자는 어떤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어둠을 스스로의 힘으로 걷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녀촌을 탈출해 아무도 자기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도시로 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는 창녀촌에서 지낼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주일에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발품을 팔아 교회에 찾아 등록을 했습니다. 부부는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모두 집사가 되었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행복한 삶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느 집사님이 그 여자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신실해 보이는 그 여자가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쳐했습니다.
"정말 가증스러워. 어쩜 자기의 더러운 과거를 그토록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이건 당신만 알아야 해. 정말 기막힌 일이야"라며 다른 교인들에게 전해준 귓속말은 그들 부부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부는 교인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전에 그토록 친절하고 따뜻했던 교우들이 자기들만 나타나면 마치 벌레 보듯이 힐끔거리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교우가 자기들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안타까웠습니다.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아픔이지 교인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인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창녀촌보다 더 싸늘한 교회에서 그들 부부는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밤 부부는 수면제를 나눠 먹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청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부부 집사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서 담임목사님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양 떼를 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리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내가 속한 순안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내외를 품어줄 수 있을까요?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 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이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습니다. 무대 뒤 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 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습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바로 이때였다.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 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있는 이 사랑의 신학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품안이 증거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독선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알파코스는 1976년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HTB(Holy Trinity Brompton) 교회에서 찰스 만함(Charles Marnham)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영국교회 상황은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놀이문화가 확산되면서 가정이 급격히 파괴되었으며 교회는 썰물처럼 성도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사역자가 30,000여명이 있었는데 무속인은 80,000명이나 되는 영적인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교회에는 습관적으로 드나드는 노인들과 소수의 젊은이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17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0%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떠나는 젊은이들이 남긴 말을 2가지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하지 말고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지하철에서 두 명의 승객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어느 할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왜 여기서 싸우는 거야?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얼마나 창피한 이야기입니까? 이 시대 교회가 사상을 이야기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교리를 이야기 하지만 그 안에는 독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사랑의 도구가 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은혜가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글
설경욱씨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우리는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을 또 한 번 지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났는가가 중요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더 낮아지고, 함께 해주고, 나누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내 보이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 성탄을 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문
주님, 주님의 성육신의 모습을 보면서 종교적인 지근거리에는 있었지만,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깨달을 수도 볼 수도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더 많이 나를 높이려했지 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신앙의 성숙으로, 헌신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지는 율법의 도구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고, 은혜와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주의 손발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