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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년 전, 판자촌이던 이곳에 처음 자리를 틀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신문배달, 가게 점원 등 안 해 본 일이 없이 어렵게 공부하여 한의과대를 나와서는 이곳에 처음 한의원을 개원했지요. 솔직히 판자촌이던 신림동 한 귀퉁이에 자리를 틀게 된 것은 번듯한 한의원을 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안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개업자금도 부족했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철거민 판자촌이 즐비했던 신림동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그런데, 한의원을 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새벽 2시쯤 되었을까요. '쨍그렁- 우당탕탕-!'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눈을 떠보니 깨진 창문 사이로 산만한 덩치를 한 사람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야, 원장 xx 나와."
그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험한 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돈 벌었으면 내놔! 이게 전부야? 쪼다 같이 그렇게 공부해서 이것밖에 못 버냐? 쯧쯧…."
있는 돈을 다 내어주고 난 뒤, 다음날 알아보니 그는 신림동 깡패조직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후에도 다시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는 돌아갔지요. 결국 더는 이곳에 못 있을 것 같아 이사를 하기로 하고는 용산 지역의 한 집을 가계약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던 7월 어느 날,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집의 초인종이 쉴 새 없이 울려대 나가보니 유리창 밖으로 그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장맛비를 흠뻑 맞은 채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양 팔로는 갓난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말이지요.
"원장님, 이 아이 좀 살려주세요. 밤 10시부터 병원을 전전했는데 아무 차도도 없어요. 제발 이 아이 좀 살려주세요. 이아이만 살려주시면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는 경기를 일으킨 아이를 안고 이곳저곳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찾아온 듯했습니다. 나는 급히 아이를 받아 진찰실에 뉘이고는 떨리는 손으로 기도를 하면서 아이의 몸에 두 대의 침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꿈틀꿈틀, 감겨있던 아이의 눈꺼풀이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그는 눈을 뜬 아이를 보자 그 자리에서 아이를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야' 가 변해 '원장님' 으로, '원장님' 이 변해 '형님' 으로 바뀌더군요.
"형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명해주십시오"
대뜸 무릎을 꿇고는 그는 자기에게 무슨 명령이든 내리라며 재촉을 하였습니다.
"특별한 거 없네. 자네 교회 나가게."

이리하여 그의 온 가족은 교회에 다니게 됐고, 몇 달 뒤 그곳을 떠날 때에는 매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의원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이사 갈 생각을 접고는 아예 본격적으로 그곳에 자리를 잡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 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하는 터라 아파도 돈이 없어 제대로 진료를 못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곳을 더욱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오면 온통 진흙벌이 되어버리는 신림동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진가방을 들고 골목 구석구석을 찾아 나설 때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날 아이를 안고 나를 찾아왔던 그의 실루엣이 겹쳐지곤 했으니까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이곳까지 밀려온 것인지도 모를, 나의 의술을 통해 영혼이 변화 되었던…

열 명 중 일곱 명은 진료비를 내지 못했지만 나는 외상장부도 만들지 못했지요. 깡패도 변화되게 하시는 하나님인걸요. 그 속에도 사랑을 심어놓으신 하나님인걸요.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생각하니 진료비를 요구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렇게 영혼이 변화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했던 그와의 만남은 나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영혼을 바라볼 수 있게 했고, 물질이 아닌 영혼을 구하는 진짜 의술을 배워가게 했습니다. 살림집이 붙어있는 한의원 벨이 새벽 2~3시에 울려대도 피곤한 줄 모르면서 말이죠. 날마다 터오기도 전에 집을 나서 해가 저문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서기를 1년, 2년, 5년, 10년…

그렇게 이십여 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낡고 비좁은 전셋집에서 벗어나 난생 처음으로 아담한 집과 한의원을 지을만한 부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껏 쉰 살이 되도록 한 번도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삼촌 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고, 결혼을 한 후에도 셋방살이를 한 번도 면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 번도 나의 것이라곤 가져본 적이 없던 사람에게 자신만의 집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을 짐작하실 런지요. 하루 종일이라도 기대에 부푼 계획들을 펼쳐놓으라면 할 수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허름한 건물의 한쪽 구석에 세 들어 잇는 낡고 좁은 교회의 모습이 눈에 가시처럼 걸려 사라지질 않았지요.
"네? 하나님 뭐라구요? 아니죠? 지금 저에게 말씀하신 거 아니죠?"
여러 차례 귀를 막고 고개를 가로저어보았지만 예배 시간 내내 하나님께서 내 땅을 원하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이십여 년을 외상장부도 없이 겨우 모으고 모아 마련하게 된 집이라는 걸아시잖아요. 이제껏 한 번도 내 집을 가져본 적도 없다는 걸아시잖아요."
하지만 강하게 부정하고 고개를 저을수록 하나님의 뜻은 더욱 분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내가 채워 주리라."

그 순간 이십 년도 지난 그날 밤 온 몸이 비에 젖어 찾아왔던 그의 실루엣이 떠오르더군요. 처음 의술을 펴려 할 때. 깡패이던 그를 보내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먼저 내려놓게 하셨던 하나님. 그리하여 물질이 아닌 영혼을 구하는 의술을 펼쳐가게 하셨던 하나님. 외상장부 한번 쓰지 않았지만 밥 한번 굶게 한 적도 없었던 하나님. 결국, 나는 그 하나님의 섭리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려놓겠습니다. 저의 한의원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먼저지요.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결단을 하고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신림동 사거리 부근에 아담하고 꽤 좋은 집이 웬일인지 아주 싸게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지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에는 한의원을 개원하기에는 그야말로 더도 없이 아담하고 깨끗한 건물이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이것 밖에 없는데…
밑져야 본전이겠지 하며 있는 잔고를 다 모은 통장을 내밀었는데, 
"꼭 그만큼이네요. 그 돈으로 이런 집구하기 쉽지 않은데, 기회 잘 잡으신 겁니다."
"네? 뭐라구요? 딱 그 만큼이라구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지요. 꼭 그 만큼이라니! 꼭 우리가 가진 것만큼의 매물이 나왔다니요! 나의 것을 드릴 때 열배, 백배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시라더니, 그 하나님 앞에 나는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습니다.

그뿐인가요. 한 번은 서울시의원에 입후보하게 되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멈출 수는 없기에 '선거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선거운동자금을 성전 건축헌금으로 바치자' 하고는 모두 그린일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선거운동도 안 하고 어쩌려고 하느냐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이었지만 그동안 무료 질료를 받았던 분들과 교우들, 그리고 잘 모르던 타 교회 교인들까지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준 덕택에 나는 당당히 시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만 표라는 큰 차이로 말이지요.

만약 그때에 그 부지를 내려놓지 못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던 축복이겠지요. 만약 그때에 그 부지에 집을 짓고 한의원을 지었다면 지금 내 입에서는 '하나님' 이 아닌 이십여 년을 아끼고 모아 지은 나의 것이라고, 또한 내가 열심히 뛰고 노력해서 된 시의원이라고 떵떵거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물이 꽉 찬 잔에는 더 이상 물을 부을 수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섭리도 나와 같나봅니다. 법학을 내려놓았을 때 한의학의 길을 볼 수 있었고, 물질의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영혼을 살리는 의술을 알게 하셨고, 이십 년을 모은 재산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케 하신.

지금까지 한 번도 외상장부를 써 본 일이 없지만 지금껏 한 번도 밥을 굶은 일도 없던, 아니 밥을 굶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으로 찡그렸던 얼굴을 가지고 왔다가 웃으며 나가는 그들을 보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는 섭리.

사십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 와서 "선생님, 못 살던 시절 어쩔 수 없어 진료비를 내지 못했지요. 자꾸 마음에 걸려서 이제야 찾아왔어요." 하며 저 남쪽 끝 여수에서 부산에 찾아와 고이 접은 하얀 봉투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받는 그 코끝 찡한 감격.

오늘도 서울대로 올라가는 신림 사거리 길목의 모퉁이를 찾아 들어서는 그들의 얼굴을 난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의 빈손을 언제라도 열배, 백배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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