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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마음 성경대학

Heart of Christ Bible College & Christian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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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요구

 

13과는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연대순으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겸손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중심되는 구절은 10장 45절이다.

그림 가운데 왼쪽에 있는 부분을 보라.

공관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것은 종려주일에 한 번 가셨다고만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닷세가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갈릴리에서부터 윗쪽 두로 지역으로 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고치신 기록이 나온다.  물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건너편에 계신 기록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여기에서 '데가'라는 말은 10이고, '볼리'는 도시라는 말로써 데가볼리는 열 개의 성읍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데가볼리라는 곳에 가신 기록도 나온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마침내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신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마가복음 10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요단강 쪽으로 가셨다.  그리고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내용은 오직 한 장만 할애를 하고 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마가복음과 똑같은 지리적인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지리적인데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고친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도 그 여인이 갈릴리에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장소의 이름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갈릴리의 어느 곳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밑에 있는 남쪽의 예루살렘은 원수들의 땅, 원수들의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왕으로써 임명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세례를 상징하는 물방울 그림이 나오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나온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시고, 또한 종이 되신다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왕이시면서도 종이라고 하는 이러한 개념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대했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주님이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지를 않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오늘날의 메시아는 크리스마스 때에 오는 산타클로스와 같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마가복음을 계속해서 보면, 밑에 있는 그림과 같이 아주 재미있는 사건들이 전개되어져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갈릴리 지역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를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시기는 하셨지만 구체적으로 '내가 누구다'라고 하는 것을 밝혀주시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내가 누구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암시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되면 모르긴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죽임을 당하셨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는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폭동을 진압할 수 있는 로마 사람들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한 때 유대인들의 열심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그 당시 로마 당국은 2,0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어서 나는 너희들이 생각했던 그런 식의 지상적인 메시아가 아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어떤 위협이 되는 그런 인물의 예수님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의 위협이 되는 인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인물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5리를 가려고 요구하거든 5리를 더 가서 10리를 같이 가라고 하셨다.

이제 좀더 자세한 것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고 있지를 않다.  그런 반면에 마가복음은 뭐라고 시작을 하고 있는가?  성경을 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는 이스라엘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이라는 말로 시작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때부터 처음으로 하나님이 복음을 주시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  마가가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전에 있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있던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다.  가리워졌던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사죄하는 복음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여기에 있는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신다고 하는 그 소식을 이때부터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원수인 로마로부터 그들을 독립시켜주는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로마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외국 사람들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그런 메시아를 기대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들이 바로 원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너희들의 죄로부터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견해였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요단강 건너편에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다고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베다니가 두 군데 있는데,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베다니에서 그가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출애굽의 의미가 있다.  세례를 통한 새 출애굽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속사에는 출애굽의 역사가 새롭게 재연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세례 요한이 등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세례 요한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준비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비유대인인 이방인들만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로 개종을 하려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이 말 속에는 유대인들인 너희들이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언제든지 자기 이후에 메시아가 오실 것을 말했다.

마가복음 1장 9절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요단강 건너편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지으셨기에 사죄함을 받는 사죄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있었느냐? 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못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제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세례에서 시작이 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계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건너편에 오셔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지난 1과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했을 때, 2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왕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종이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솔직히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광야에 가셔서 사탄에게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게 되면 여러 가지 반복되는 것이 나온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광야 생활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시험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고 마가복음 1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막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그런데 영어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에게서 시험받았다고 하는 세 단어만 나온다.  마태복음을 보게 되면 4장 1∼11절까지 무려 11절이나 예수님의 시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누가복음에 보면 4장 1∼13절까지 13절이나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불과 세 단어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다음에 사탄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하는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왜 안 나올까?  이유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은 예수님의 생애에 계속해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마가복음 전체가 예수님의 시험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사탄과의 전쟁사라고 할 수가 있다.

이제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과 어떻게 싸웠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사탄과 싸웠다.  다른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시험에 관한 것을 읽게 되면 이 내용을 좀더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다음에 두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께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고 하면서 시험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의 걸음을 걸으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세 번째로 사탄은 시험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왕국은 사탄이 말하는 그런 식의 왕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가복음 전체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종으로서의 걸음을 계속해서 걸어가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사탄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원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원했다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사탄이 예수님을 제거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탄이 원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이다.  사실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멀지않아 그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일을 극구 말리면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종으로서의 길을 걸어가시는데 방해가 되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못하도록 하는 그 사람은 누구나 사탄이라고 하는 거다.

역사적인 아이러니, 역사적인 역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정복하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아주 놀라운 역설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나 실제로 못에 박혀진 것은 사탄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습니다만 그러나 거기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사탄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굉장히 기뻐하고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잘못되게 오해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  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셨다.  그래서 아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성취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셨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왕이면서 종이신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원하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우리 교회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종으로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계속해서 그림을 보라.

지팡이 주변에 뱀이 있다.

이사야 35장 5∼6절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교재에 보면 성경 구절에 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예언을 보게 되면, 메시아가 오게 될 때에는 장님이 보게 될 것이고, 벙어리가 말하게 될 것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나온다.  여러분이 잘 알 듯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러한 일을 하신 그분이야말로 메시아다 라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구약에 예언되어진 메시아의 역할을 하셨습니다만 '내가 누구다'는 것을 그들에게 공포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보고서 추측하라고 하신다.

물이 있고, 하얀 달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시면서 폭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폭풍을 잔잔케 하실 수가 있고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폭풍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걸어가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증거해 준 것이다.

사탄의 얼굴이 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탄과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사탄이 예수님과 대항해서 싸우게 될 때에 사탄은 언제나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탄은 무서워했다.

무덤과 해골의 그림을 볼 수가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죽은 사람을 만지면 그 자신도 부정해 진다고 생각했다.  여러분이 알 듯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그때에 손으로 만져서 그를 살렸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소위 율법적인 관념을 전부 무시해 버리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고 고치신 것을 보게 된다.  그 당시에 터부시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무시해 버리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죽은 자를 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처럼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그가 바로 메시아인 것을 보여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왔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성전이라고 마태, 마가복음에 보면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볼 수가 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본 사람이 바리새인을 찾아갔다.  왜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을까?  이유는,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고 하는 이 사건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메시아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회의를 하기 위해서 소집을 했다고 했다.  예수님이든, 우리든, 둘 중에 한 편은 결국 망해야 된다고 그들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이 마지막 결론을 내린 것은 예수가 죽어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다만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나사로도 체포를 해서 죽일려고 생각을 했다.  그들은 예수님은 물론이고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로까지도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 마가복음의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마가복음 1장 14∼15절을 보자.

막 1:14-15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제 때가 찼다.  더 이상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그것이 언제 시작될 것이냐고 질문을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설명을 바로 이해하지를 못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삶의 전체적인 태도를 바꾸어라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임했다.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모았다.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먼저 입학원서부터 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냥 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즉시', '즉시'라고 하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마가복음에 '즉시'라는 말이 41번이나 나오고 있다.  이것은 바로 긴박성을 뜻하는 말이다.  너희들이 시간이 없다는 거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가지


 

고 가버나움 회장에 가셔서 가르치셨다.  수많은 사람들을 거기에 모아서 말씀을 증거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관들과는 전혀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면, A라는 랍비가 이렇게 말하고, B라는 랍비는 저렇게 말하고,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권위없는 가르침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는 아무도 인용하지 않고 그냥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마가복음에 보면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권위'라는 단어이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들의 모든 것에 관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이 터부시했던 모든 것에 대한 권위를 주님은 가지셨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증거의 권위도 말씀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 외에 누가 이러한 권위를 가지셨겠는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주장했던 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그런 분이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든 것을 대체하시면서 무엇을 주장하셨는가?  예수님 자신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가 성도로서 교제를 가질 때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한 분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구체적으로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당신이 누구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메시아인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지 내가 누구라는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메시아라 하는 사람이 왔다고 하는 것을 로마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예수님이 원치 않았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로마 당국이 개입을 해서 예수님을 죽였을 것이다.

마가복음 2장 13∼14절을 보면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을 보게 된다.

막 2:13-14  ☞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 나오는 이 사람은 바로 세리라는 사람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그 당시에 죄인으로 생각했던 세리에게 예수님이 가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굉장히 미워했다.  그들은 세리에 대하여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반역자로 생각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문둥병자와 세리 등 죄인들이었다.  그 다음 내용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함께 잡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당시 유대 당국자들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이런 죄인들하고 식사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고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러한 식사 교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이사야서의 예언을 보게 되면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다고 하는 사건에 보여 주고자 하는 의미는 벌써 메시아 시대는 임했고, 메시아가 바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천국이 잔치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누가 왕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들에게 알맞는,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식의 메시아를 원하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옛 포도주는 다 없이 하시고 새로운 포도주를 만드시는,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메시아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지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습을 예수님은 그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밭을 지나가다가 곡식을 갈아서 먹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 랍비들의 견해에 의하면 노동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행위에 대해서 굉장히 놀랐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관한 권위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안식일에 관한 권위는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그런 권위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치셨다.  당시에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들에게 하루 더 기다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보여 주신 것은 외적인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함께 모여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공모했다.

그런 후 조금 있다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집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어 증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면서 귀신들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와 함께 사탄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일을 맡기셨다.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사탄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러분은 사탄이 아무데나 돌아다니면서 그냥 악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무조건 생각하지 말라.  이 사탄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처럼 저렇게 종의 삶을 살지 말고 내 자신을 위해서, 너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라고 유혹을 한다.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탄은 굉장히 교묘하게 인간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쫓아내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사탄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을 묶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종의 자세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폭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나온다.  그 다음에 갈릴리 옆의 부분인 바다에 간 사건이 나온다.  그리고 무덤에 살고 있는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고친 다음에 그는 예수님을 좇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데가볼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주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말씀하도록 하신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추측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마가복음을 잘 이해를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했다.

무덤에서 있었던 귀신들린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그가 데가볼리에 가서 증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도 헬라 사람이다.  그녀도 예수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들은 다 예수님이 주님인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유대인들만이 마치 눈이 가리워진 사람처럼 예수님을 분명히 보지를 못했다.

마가복음 7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막 7:1-2  ☞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주목하시기 바란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오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결박시켜서 죽일려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멋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적합하도록, 자기들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게임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순종하지 않았다.

마가복음 7장 19절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막 7:19  ☞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누지를 않았다.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시돈에서 여인을 도와주고 두로에서 여인을 도와 준 다음에 다시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신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머거리와 소경을 고쳐주신다.  이 사건에는 3가지의 중요한 이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듣게 했다는 것과 말못하는 벙어리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주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벙어리와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말을 몰랐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말을 하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모든 것이 잘 회복되어진 것을 볼 수가 있다.

막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의 사역을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창조자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주목하라.  그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처음에는 손짓과 몸짓으로 대화를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귀에다가 손을 대셨을 때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혀를 만지셨을 때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8장에 보면, 데가볼리에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나온다.

8장 22∼23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다.

막 8:22-23  ☞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

여기 내용을 보면,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는 눈을 뜨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하셨을 때, 두 단계를 통해서 뜨게 하셨다.  첫 단계로는 희미하게 보게 하셨다.  그 다음에는 분명하게 보도록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두 단계로 보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한 번 생각해 보라.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다.  이전까지는, 그러니까 가이사랴 빌립보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내가 누구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간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유대인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엘리야라, 세례 요한이라,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했다.

마가복음 8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이제 복음서에 보면 최초로 그가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예언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냐?  어떻게 메시아가 죽을 수 있느냐?  베드로는 이것을 비난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사탄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진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있어서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다 는 거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정말 나에게 속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들도 너희에게 속한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은 아무나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십자가를 질 수가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제자들로서는 반드시 해야할 사명이다.

마가복음 9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 15절에 있는 말씀과 굉장히 평행되는 구절이다.

출 24: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처럼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출애굽을 시켜주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시내산 위에서 그의 모습을 보여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 위에 있다가 내려가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너희들이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지막 부활이 있기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이 무엇이냐? 고 하면서 굉장한 의문을 가졌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9장 32∼33절을 보라.

막 9:32-33  ☞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두 번째로 예언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길을 걸어오면서 제자들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누가 더 높을 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종으로서 남을 섬기는 일을 하라" 가르쳤다.  그래서 여기에서 두 번째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다.

마가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마가복음 10장 32-34절을 보면, 십자가에 대한 세 번째 예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한 가장 자세한 예언이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한 말이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과연 제일 높은 것이냐? 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읽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종으로서 섬기려고 왔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들 자신이 무엇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가르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종으로서 봉사를 하느냐에 따라서 위대함이 결정된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여기에서 소경 바디메오를 고쳐주신 내용이 나온다.  이 소경은 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보지 못하는 바디메오는 보게 되었고,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실제로 소경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이야기의 전개가 전부 거꾸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제자들은 희미한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아직도 소경이 희미하게 보듯이 그들도 희미한 단계에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소경에게 두 번째 단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눈을 만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분명하게 보는 그런 단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디메오의 이야기는 아주 생생하게 묘사가 되고 있다.  눈을 완전히 뜨져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완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가를 분명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 그림을 살펴보자.

여기에 있는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난 단원에서 살펴보았다.

첫 번째 그림에서 볼 수 있는대로 왼쪽에 있는 그림은 창조에 관한 것이고, 오른쪽은 출애굽에 관한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은 바벨론에서 그들이 돌아왔을 때 여기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것을 배웠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또 하나의 다른 출애굽과 구원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구속적인 사역, 즉 출애굽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9장 31절을 찾아 보라.

눅 9:31  ☞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

여기에서 '별세'(departure, RSV)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실제로 '출애굽'(Exodus)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생활과 사역은 곧 출애굽기 3장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사탄 그리고 사망의 쇠사슬에서 구출하려고 오셨다.


 

이 그림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죄의 굴레에 묶여 있다.  그리고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은 전통과 율법에 묶여 있다.  그들은 사망의 권세 하에 있다. 그림에서 원의 화살표가 자기 중심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러한 죄로 인한 이 세상은 언제나 자기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주의다.  죄의 특징은 언제나 나를 향한 이기주의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생애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여기에 있는 이 그림은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부분에 있는 물방울은 예수님의 세례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심으로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왕 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의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종으로써의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종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하고 진실로 그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진다.  여기에서의 역설은 우리가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지려고 하면 우리는 오히려 메인 자가 되고, 메어진 사람을 살게 될 때에는 자유로운 자가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성경에 보면 역설적인 내용이 많이 있다.  생명을 버리면 얻는다고 한다.  얻기 위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우리는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이웃에게로 향하는 이타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겸손의 삶을 살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과 겸손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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