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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은혜에 참여하는 교제.

 

 

13, 278, 361, 369.

 

 

(1:4-8)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우리는 전 시간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말씀 중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에서 '사모하다'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모하다'(ejpi- poqevw)(ejpi~~위에, 가까이에, 근처에)(poqevw동경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모한다는 것은 상대를 동경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과 싸움을 하게 됐을 때 상대가 자기 아버지를 데리고 오면 우리는 무조건 도망을 가던지 우선 울고부터 봤습니다. 아버지를 데리고 온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버지가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중환자라고 해도 우선 도망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사역에 동참할 때 우리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심어주신 하나님이 증인으로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영원한 내 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내가 싸움을 잘하는지 못하시는지 지켜보려고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시려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일깨우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정부, 입법, 사법부의 수장들이 나와서 우리를 응원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복음을 위한 우리의 사역은 성삼위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또 믿는다면 우리는 정당한 그리스도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여기 '증인'(mavrtu")이라는 말에서 떠오른 생각이 창세기 9:1217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 무지개를 택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비의 표적 곧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한 번이라도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무지개를 보면서 그 약속을 떠올려 본 일은 있었지만 그 하나님을 찬양해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게 참으로 얼굴을 붉힐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씀만으로 이미 존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손잡고 가는 길인데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면 사랑해보는 것입니다. 그 악당에게 당한 일이 한 두 번도 아닌데, 교회에게 입힌 손해가 너무도 큰데, 손해 볼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 데 그 악당을 용서하는 게, 그것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니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셨다면 그 뒤에 무지개 같은 복이 숨겨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갖기가 소원이라면, 그분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그것이 정말 소원하고 갈망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눈 딱 감고 순종해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강원도 산골 그것도 해발 700고지에 살다보니 겨울이 되면 가장 먼저 걱정이 되는 것이 난방비입니다. 물론 심야전기니까 설정온도를 높이기만 하면 추위야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문제는 만만치 않은 난방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이미 허락해주신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가동하지 않고 창고에 처박아 두는 것입니까? 난방비 걱정 없는 무조건 공짜에 쓰면 쓸수록 부풀려지는 사랑입니다. 저는 난방비 때문에 작년에 고물난로를 15만원에 샀는데 설치비를 300만원을 달라고 해서 직접 설치했습니다. 난로를 설치했다고 해서 방안의 온도가 저절로 올라가는 일은 없습니다. 방안의 온도를 높이려면 난로에 불을 때주어야 합니다. 손해도 억울함이야 있겠지만 참고 내가 먼저 내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웃의 차가운 냉기도 서서히 가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하며 내가 먼저 너그러워지고,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합니다. 상대를 비판하기보다 이해해 주며, 실수를 헐뜯기보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내 유익보다 상대의 필요를 먼저 채워줘야 합니다. 남이 내게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온도를 높여 이웃과의 냉기를 녹여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미워하고 험담한다면 그것은 난로 불 대신 차가운 겨울바람을 불러들이는 꼴입니다. '비난이나 미움'은 마음의 겨울바람입니다. 성도는 이웃의 허물과 부족들을 사랑으로 덮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대부분의 허물들은 사랑의 열기에 녹아내려 감춰지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성도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해도 내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할 때 진정 우리는 은혜에 참여한 사모의 정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틀림없이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확신을 갖고 순종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닮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나라는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적이 있다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 증거를 밖으로 내보이려면 우리는 우리를 대적해오는 자들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장을 사모해야 합니다. 얼음을 녹이는 방법은 찬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상대가 밉다고 겨울바람을 동원하다보면 상대보다 내거 먼저 얼어 죽습니다. 제가 해봐서 잘 압니다. 내가 불어대는 냉기에다 상대의 무자비한 냉기까지 더해지면 내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내 돈을 떼먹은 악당은 잘 사는 데 나는 떼인 돈 때문에 몸살을 하고, 그 악당을 미워하다가 내 심령이 먼저 병드는 것입니다. 돈 떼이고. 병 얻고, 사람 잃고, 돈 잃고 그리스도의 사랑까지 잃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신앙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한 실리적인 차원에서도 순종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못 박을 무리들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자원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 용서와 사랑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이미 심겨진 자들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키기만 하면 사랑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자유와 평안을 영혼 깊이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평생을 살다 보면 미워하고 이를 갈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미워하고 이를 갈지 마시고 사랑과 용서를 훈련해야합니다. 우리 안의 미움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불로 녹여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서 미워하고, 미워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가장 불행해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미움은 덫과 같아서 언제든 자기부터 걸고넘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집인데 그 거룩한 집에 어찌 더러운 증오나 미움을 담고 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염치없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배운다면 우선은 성도들 사이의 모든 단절의 벽부터 빠르게 무너질 것입니다. 성도가 미움을 가장 빠르게 없애는 지름길은 내 안의 그리스도의 심장을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1-11을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들이라는 체포령을 내렸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런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로 작정하고 그 여인을 잡아 예수님 앞에 꿀리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며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율법에서는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며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자신들이 깔아 놓은 음흉한 술책에 예수님이 걸려들었다고 고소해했을 것입니다. 만약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가르친 사랑의 교훈에 모순된 사람이라고 몰아 부치면 되고,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유대에서는 총독만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처형을 명한다면 로마법을 어긴 정치범으로 몰아 부치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녀를 용서하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율법의 파괴자라고 정죄하면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계산한 그들은 예수님이라도 자신들의 함정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간파하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은 의로운 것이지만 그 율법을 따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권리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어찌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과 같이 악하게 행동하느냐는 그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었습니다. 함정을 파고 기회를 찾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지혜의 말씀 앞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은 자신의 고유권한임에도 불구하고 간음한 여인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하시면서 이 여인을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배웠습니다(5:46).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이것이 은혜에 참여한 교제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의 마음속에서 언제 어디서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키고 살았습니다. 나를 억울하게 한 악당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셔야 합니다. 악당의 마음이 치유되고 그 악당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가 나를 향해 다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킬 때까지 그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이지 할 수 없다고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박목사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웃지 마셔야 합니다. 저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핑계를 찾지 마시고 악당이 변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하고 섬기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내게 먼저 한없는 평강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게 저의 산경험입니다. 이러한 교제야말로 내가 그 악당을 나의 친구로 바꿀 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심을 하나님께 모으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일에 내가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는 증거이고 자라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교회가 그런 살아있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쉽게 술술 풀리기보다는 선을 악으로 대응해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더욱 꼬여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다는 것이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수없이 넘어지는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합니다. 악당은 내가 짐작도 못한 것들로 나를 약올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물리적으로 피로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약 오르고 참아줄 수 없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을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베풀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상대가 나의 선에 악으로 반응해올지라도 사랑의 온도를 높이셔야 합니다. 바울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를 깨우치시려고 하나님은 그 악당 바울을 수많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시켜서 개조시킨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조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깨진 관계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치유하고 회복해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덮어두고 싶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당신이 먼저 다가가 용서하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삶이고 원수까지라도 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원수를 품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킬 때 우리는 한없는 자유함과 그리스도를 닮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성도는 악당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입은 자인 것을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누구처럼 정의 칼을 휘둘러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자신에게 심겨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동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애통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흘리는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자신의 모습으로 증명해내야 합니다. 이를 행하라고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애끊는 마음으로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은혜를 나누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에서부터 지극히 비천한 성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죄인이요, 모두가 같이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자라는 진리야말로 참으로 성도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은혜까지 입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믿음의 결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재앙이 거듭될수록 바로의 마음은 날로 더 강퍅해져 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열 번이나 바로의 왕궁을 드나들면서 바로를 설득했던 모세의 인내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 왕궁에 들어가 바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꼬여만 갔습니다. 바로의 위협과 회유와 그가 제시하는 타협안들로 인해 갈등도 많았을 것입니다. 출애굽 될 듯싶으면 바로는 또다시 변심하기를 거듭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편들기보다는 오히려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자들임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아직은 어리고 무지해서 걸핏하면 '먹을 것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목마르다.'는 심지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데모까지 했지만 모세는 그들을 오래 참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저라면 아마도 시궁창에라도 쳐 박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기에 오래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 고비 고비마다 변한 것은 바로도 애굽도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모세는 점점 더 온유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모세가 보여준 이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앞의 모든 사건과 일들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모두 나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모할 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놓여진 것들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리를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약 올리고 모욕을 해오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그와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가자면 동으로 가자'며 언제나 내 일에 무조건 발을 거는 말썽꾸러기나, 사사건건 나를 물고 늘어지는 그런 악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변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그 악당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며 나는 그 악당이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그 악당을 변화시키시기까지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주는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먼저 변화시키고 나서야 나를 통해 그 악당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바로 이 훈련을 통과하고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칭송을 듣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미워하는 자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와 사귀어야 하며 당신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함께 하나님을 사모할 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 그를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부부까리도 재산관리를 따로 하는 요즘 세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미친 소리라고 비웃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모하는 그리움으로 사랑을 나누어야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쳤거나 배신했던 사람이라도 다시 형제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김으로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가정은 홀어머니 밑에서 남매가 명문대학을 나온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딸을 편애해서 늘 딸집에 거하면서 외손자와 손녀를 키우는 일을 비롯하여 그 집안의 굳은 일은 늘 도맡아 해주셨습니다. 며느리가 애를 키우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들집과는 자연히 알게 모르게 앙금이 생겼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든 어머니는 신장에 이상이 생겨 인공신장을 옆구리에 차고 다녀야 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아들 몫이니 아들보고 모셔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서울 큰 교회에서 인정받는 권사입니다. 아들 집사 내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딸이 모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그의 누나가 어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1억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딸은 그 돈으로 자기 집 옆에 어머니의 집을 얻어 드렸으나 끝내 외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들 남매는 서로가 뿜어내는 냉기로 서로를 얼어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화해는커녕 갈등의 골만 더 깊이 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면 그 무덤이 자기 무덤이 된는 법입니다. 내가 악을 뿜어내면 그 악의 피해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입게 됩니다. 내가 먼저 내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가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자만 있고 섬김을 받으려는 자는 없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섬기고, 사장이 직원을 섬기고 서로가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요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돼서도 집에 가서는 며느리를 들볶는 시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며느리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남편,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아내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면서 또 서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먼저 희생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오래지 않아서 당신은 자신이 상대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변화에 새삼스럽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상대와 좋은 친구가 되어 있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상대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형제인 것을 실감하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은혜에 참여한 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변화로부터 아름다운 교제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사랑의 불을 지핌으로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교제에 참여하시는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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