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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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강,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46, 88, 256, 319, 340.
"(빌1:5-6)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는 전 시간에 첫날부터(ajpo~부터, 역전)와 시작하신(ejnavrcomai시작하다, 지배하다.)의 두 단어를 통하여 우리 인생이 180도 완전히 역전된 인생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망의 길을 걸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능력을 힙 입어서 오히려 사탄을 지배하며 살도록 놀라운 역전을 이룬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던 이 땅을 이제 우리가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한 그 분의 일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6절 맨 앞에 확신이라는 단어를 놓음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확신(peivqw)'의 의미가 놀라웠습니다. 그 날에는 사탄과의 전쟁은 종식되고, 하나님께 의존한 참 안식이 주어질 것이며, 하나님과의 화해(평화)는 영원할 것이며, 하나님이 동의하신 이 일에 납득하고 항복한 자들이 가지는 것이 확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완성되는 날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 곧 마지막 심판의 날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피조물 모두에게 시작하신 '착한 일' 즉 '구속사역의 은혜'를 완성하시는 날입니다. 바울은 어디서도 그 날이 언제일지 또는 그가 죽기 전에 그날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실제적인 문제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1:21).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수다를 떨거나 떠벌이지 않으면서도 재림에 대한 그의 소망은 그의 삶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분명히 오십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사실은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이 복된 소망에서 오는 실제적인 기쁨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재림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 묘한 것은 이단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일정표까지 짜놓고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용해 사기를 쳤다고 해서 그 날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사탄의 고등사기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교훈은 신약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에는 초림과 재림의 분명한 구별이 어렵지만 신약에 와서는 초림과 재림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재림에 관한 교훈은 신약에 무려 약 318회나 언급돼있습니다. 그것은 재림이 그만큼 분명하고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종말은 희망이요, 소망이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재림은 공포요, 절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를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령시대 등으로 구분하여 구약시대에는 하나님만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만이, 성령시대에는 성령님만이 역사하신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요즘 발생한 신세대주의는 예수님이 2,000년대에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토인비가 "종교는 2,000년 단위로 변한다." 말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재림론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며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한 바른 종말론의 이해가 중요합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있었던 시한부 종말론의 우두머리였던 이장림 씨는 사기를 친 돈으로 자기가 말한 재림의 날, 몇 년 후의 적금까지 든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은 사기꾼들에게나 있는 것으로"하 치부해 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저 수양이나 쌓으려고 예수를 믿습니까?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믿기는 합니까?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이 죽음의 문제가 왜 이리도 무시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종말은 있는가?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요한은 "(계 22:20)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화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종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영원한 현재만 존재하는 새 나라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매주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언제일지는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도 알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24:36).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확신하기에 저는 요즘 좀 슬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발 주일 낮에 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눈·비 오는 날 저녁은 더 안타깝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에 오시면 빈자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혹시 자리를 자주 비우는 분들이 주님께 창피나 안 당할지 염려스러워서입니다. 아무 때나 오셔도 좋을 만큼 모두가 제자리를 지켜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삶의 명제 가운데 하나가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죽을 날을 아는 자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최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마치 이생이 천년만년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고 먹어라 마셔라 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손안의 일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그 주님을 맞을 것인가 하는 준비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를 믿고 가는 영생의 길과, 그를 거부하고 가는 영벌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되어 있는 시간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으로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길로, 그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벌의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히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영생을 위한 생명의 길을 아름답게 전진해 나가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는 말씀을 통해 그 심판 날에 하나님은 사탄에 대한 심판을 종결짓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영광된 영화의 절정을 이루어 그분의 구원섭리의 완성하실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모든 인류에 대한 심판의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학생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험날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놀아야 합니까? 물론 그런 학생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 학생입니다. "하나님, 시험이 있습니다. 나 100점을 받게 해주시고 내 라이벌 되는 칠성이는 90점을 받게 해주십시오. 시험 준비 끝" 그러면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생의 책임이고 영광입니다. 그것은 기도할 문제가 아니라 머리 싸매고 남보다 더 많이 책상에 앉아서 땀을 흘려야 라이벌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준비를 했습니까? 저는 미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 이렇게 했습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읽으면서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 정리해서 예상문제를 만듭니다. 그리고는 친한 친구들과 "야 뭐가 나올 것 같냐?"며 정보교환을 합니다. 그리고 라이벌로 여겨지는 친구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은 한 개 슬쩍 빼버리는 겁니다. 정말 부끄럽지만 회개하는 맘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여하튼 그 정보교환을 통해서 다시 추리고 정리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우는 것입니다.
시험 전날까지도 외우지 못한 것들은 다시 정리해 집중공략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아침밥도 굶고 외우고 또 외우고도 그걸 잊을까봐서 시험지를 받을 때까지 중얼중얼 외우면서, 시험지를 받자마자 그 문제가 나왔으면 이름도 쓰기 전에 신나게 답안을 쓰고는 정작 자기 이름은 빼먹고는 멍청이 소리까지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무엇부터 합니까? 라이벌 칠성이가 나오면 "야, 너 그 문제 풀었냐?" "아니, 손도 못 댔어." 그러면 신나게 설명을 해줍니다. 사실은 칠성이 녀석 기죽이기가 목적입니다. 얼마나 못된 심사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제 미련을 늘어놓는 것은 우리가 세상 학문을 위해서도 그렇게 땀 흘려 준비하는데 정말 중요한 죽음을 위한 준비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우리 자신을 회개하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번 함께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한 달 후에 오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한 달 지나야 곗돈을 탄다고 하더랍니다. 이건 정말 기막힌 멍청이입니다.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에 높이 앉으셔서 양과 이리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6절을 '확신한다. 나는`````그분이 완수하실 것을' 강조해 말하는 것은 성도는 마땅히 그분의 심판을 의식하고 준비하면서 살라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잠수함에 흰 토끼를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흰 토끼는 잠수함 안에 산소가 부족하면 사람보다 7시간 먼저 죽기 때문에 사람들이 흰 토끼를 통해서 잠수함에 공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물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때와 시간을 안다면 실컷 마음대로 놀다가 그 시간에 맞추어 회개하고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대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점을 회개해야 합니다. 재림은 우리에게는 간절히 사모할 복된 소망입니다. 간절한 것만큼 우리는 거룩을 위한 싸움도 치러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닮게 되고 예수님 같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따라서 사는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박식해도 그 주인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병든 환자입니다. 자신을 진단해서 병든 곳을 찾아서 치료하려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박 목사, 넌 어떤데?"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의 완성을 위해 싸우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일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오늘 이 시각부터 당장 치러 내야하는 내 싸움입니다.
작은 쥐구멍이 큰 땜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성도로서 심판을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임박해서 회개하고 천국이나 가겠다는 삼손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삼손은 '태양(낮)', 드릴라는 '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의 만남, 그들은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지혜롭게 바라볼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실인의 서약을 깨고 밤을 사랑함으로, 독주를 마셨으며 급기야는 삭발까지 당하고 끝내 눈까지도 뽑혔습니다. 블레셋과 함께 죽음을 택한 그의 행동은 거룩한 분노이기보다 자신의 욕심과 욕정을 이기지 못한 울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어느 사사보다도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힘과 능력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사용함으로 교만하고 어리석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삼손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요? 입으로는 거창하게 '주님을 위하여!'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세상과 짝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구니 속에 과일 한 알만 썩으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모든 과일은 순식간에 썩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만났던 두 천사들이 소돔에 왔습니다. 마침 소돔 성문에 앉았던 롯은 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서 묵어가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에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4절)." 그들 모두는 정욕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절)." 남자가 남자를 상대해 성관계를 맺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악한 자들이 드라마의 내용이 되고 TV에서 버젓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쾌락이 삶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방송매체 등을 통해 성적타락의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아이를 자연생식법칙을 따라 낳는 시대는 마침내 인공수정, 시험관 아이, 복제 아이로 대량생산시대로 돌입했습니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질 비극적인 문화와 역사가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생각과 의식, 판단, 행동 그리고 그들이 만든 역사를 짐승이요, 짐승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이 만든 모든 역사는 짐승의 문화요, 짐승의 역사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스스로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계19:20).
세상 곳곳에서 낙태를 비롯한 살인 사건은 닭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도 쉽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그랬습니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롯은 악한 사람들을 타일렀지만 그의 권고는 오히려 빈축만 샀습니다. 그들의 악은 결코 도덕적 훈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문제는 오직 십자가만으로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회개하여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도록 이끄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어떤 죄의 문제라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모든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멸망할 도시의 특징은 폭력의 세력이 날로 증대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폭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매를 맞고 자라는 아이, 매를 맞고 사는 아내, 이제는 매를 맞고 사는 남편들도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심지어 아내를 폭행하는 목사들도 수없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맞고 자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도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결국 폭력은 폭력을 낳는 것입니다.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계층이 부패했고, 도덕적 성적으로 타락했으며 인간을 경시했고 폭력이 그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세상풍조에 날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는 폭력물일수록 시청률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좋은 소식만을 전하는 신문을 발간했다가 일 년도 못돼서 폐간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심성이 그만큼 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었어도 그 도시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보일 잡지책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사회의 의인 열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져도 나와 내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복과 생명의 근원이 됨으로서 나로부터 생명이 다시 살아나가도록 해서 이 땅을 살려내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현대인의 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가 막힌 게 있습니다. 부부를 바꿔 성행위를 즐기는 스와핑(Swapping)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받은 일이 불과 1-2년 전인데 이제는 아예 인터넷에 광고를 내고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런 클럽들이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전문스와핑 업소가 드러내놓고 성업하고 있으며 아내나 남편만이 아니라 미혼자들의 애인 바꾸기 알선업체들까지 성업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족주의 윤리개념이 무너지고 타락한 소돔의 추악한 문화가 활개치고 있는 통탄스러운 현실입니다. 경쟁적으로 모집하는 그 사이트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하니 짐승보다 더 추악한 그 인간들의 끝이 어디겠습니까?
이런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어느 집에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농촌교회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집사님들이었습니다. 딸이 혼기가 되었는데 마침 두 곳에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미남인데 집이 가난했고 하나는 얼굴은 추남이었지만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딸을 불러 설명을 해주고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은 즉시 "살기는 인물 좋은 집에서 살고 먹기는 재물이 있는 집에서 먹을래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부모가 "얘야, 말 같은 소리를 해라." 했더니 "요즘 세상은 달라요. 부모님들은 뭘 몰라요." 하더랍니다. 우리는 왜 성경에서 부부지간의 순결을 그토록 강조하며 사람의 타락을 부부지간의 성적 타락에 비유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순백하고 순결하고, 그만큼 완전하고, 그만큼 아름답고, 그만큼 완전한 기쁨도 없습니다. 또 그만큼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일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부부지간의 성생활의 가장 큰 특성이 무엇입니까? 절대 비밀한 관계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부간의 성생활이 가장 일반적일지라도 둘만의 절대비밀 속에 깊이 감추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밀 속에 절대로 감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개되는 것이 성의 타락입니다. 그것이 공개되는 것에 비례하여 더 큰 성적 타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교육에 이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어느 극장에서의 일입니다. 마침 희극 배우가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불이 났습니다. 이것을 희극배우가 맨 먼저 발견을 했습니다. 배우는 연극을 중단하고 "불이야! 빨리 비상문으로 피하십시오."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욱 웃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우는 다급하게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희극배우의 연기로만 받아 드렸습니다. 이 관중들은 오늘날의 대다수의 군중들입니다. 성경에는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소돔성에 불심판이 있을 것을 알리고 함께 피할 것을 간곡하게 권했지만 그들도 그의 장인의 말을 희극배우의 농으로만 들어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미련을 찾아 버려야합니다. 이 경고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탈락되는 자가 없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자신이 미련한 처녀라고 생각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내가 죽는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축복 받은 소망이요 위안입니다(살전 4: 18;딛 2:13). 그러나 복음을 부정하고 예수를 부정하는 분들에게 그분은 무서운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살후1:7-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준비하셔야합니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정말 심각해져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그분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기뻐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계 19: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긴장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잠들지 말고 깨어야하기 때문이고, 교회를 다닌답시고 교회문턱만 밟고 다니다가 탈락하는 사람 축에 끼지 말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 확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행여 미련한 처녀는 아닌지 자기 신앙을 수시로 점검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습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징조로 보아 주님이 오실 날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어떤 일보다 먼저 주님 맞을 준비가 더 시급합니다. 오늘이 기회이고 은혜 받을 때입니다. 내일이 당신에게 허락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을 주님께 바치셔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경제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주 앞에서 살려고 하는 우리 때문에 우리 사회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 도전해 주셔서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완성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은 것은 우리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그분에게 데려오기를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 모든 사람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화를 완성하실 것이고 그의 나라를 영화롭게 완성하실 것리고 심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종결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영화로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루시리라(ejpitelevw 성취하다, 실행하다, 종결하다, 완수하다)가 그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고 의와 거룩으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의인 10에 들기로 결심하시고 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세에 긴장을 풀지 말고 이 시대와 역사를 책임진 성도로서 성도다운 삶을 살도록 피 흘리는 싸움을 치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을 준비하며 사시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