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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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반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습니다. 잠시 후,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벌컥 화를 냈습니다. "인석들, 조용하지 못해!" 그리고 제일 떠드는 곰바우를 보자 선생님은 비장의 무기인 백묵을, 곰바우의 얼굴을 향해 발사해 명중시켰습니다. "아얏!" 가장 떠드는 놈을 혼내주려던 선생님은 백묵 공격이 성공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놈아, 넌 이 반에 뭐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곰바우는 울먹이며, "입안에...껌이요!"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곰바우는 껌 씹은 것까지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뭡니까?" 이 시간은 성도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깨우치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만도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 예수는 인간의 생명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라는 이름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성도된 우리가 믿는다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요, 성도된 우리가 평생 알아야 하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은 자기의 생명의 근원을 아는 것이고, 인간이 가질 최고의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에게 생명으로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것은 성도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더욱 강하게 붙잡고 나아가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구원을 얻는데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구원에 이르는 오직 유일한 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절대로 그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자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반역은 어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그 백성들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를 거부했습니다. 창조주가 피도물인 그의 백성들에게 왔음에도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핍박했고 그가 진리를 증거 하자 죽이려 했습니다(요 1:1-11).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사람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해 알려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죽이려했습니다. 빛이 왔으되 빛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창조주가 왔으되 영접지도 않은 우리,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러 오셨습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십니다. 창조주 되신 그 분이 우리 곁에 오셨음에도 그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 능지처참을 당해도 마땅한 우리를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은 날 위해 제물이 되어 죽으러 오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묻지도 않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사,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간섭에 감사하고, 입은 구원에 감격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아예 그리스도에게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몸을 드려 우리의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안에서'가 '~때문에, ~의하여, ~힘으로, ~함께'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이루질 수밖에 없음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에는 우리의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함께 살을 맞대고 살면서 서로를 깊이 알아 가는 것과 같이 우리 안에는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영원히 동거하시고 천국까지 동행하시기로 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어 하나님을 날마다 더욱 깊이 알아 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없고 자기 부모는 못할 것이 없는 듯이 자랑하듯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기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성령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매일 때만 비로소 자유한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때만 좌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유는 학문이나 정치, 물질 등 세상이 추구하는 그 무엇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죄로부터 온전히 해방시키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이 온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시고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은 죄의 종일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의 공급자이시며 그분이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니 당연히 그의 상속자가 됩니다. 이보다 더 큰 자랑, 더 큰 자유가 있겠습니까?
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힘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영원히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할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안에서'(ejn)라는 단어에서 귀한 보화를 얻은 그 이상의 벅찬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이룬 기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매일매일 속박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하는 노예처럼 일하고도 "내가 이 꼴인데 어떻게 구원을...?" 절망에 울고 있습니다. 자신이 뭔가를 이루어야만 구원을 얻을 것으로 착각하고, 더 열심히 구제하고 전도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이룬 것 같으면 기뻐하지만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자신은 구원이 불가능한 자라면서 절망하면서 심지어 교회를 등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기독교는 "내가 요 모양 요 꼴이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날 구원할 방법이 없어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로 덧입혀서 의롭다 인치셨습니다. 감히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아직도 내가 이 꼴인데...'라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구원을 누가 있어 막겠습니까? 아무 것으로도 못 막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으니 똥에 굴러도 시궁창에 굴러도 그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죄가 보이기 시작하니 어찌 '요 모양 요 꼴'인 내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요 모양 요 꼴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이지, 내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아니면 더 헌신하고 더 열심을 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입니다. 누구도 자기 실력이나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을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수준과 실패로 인하여 절망으로 가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도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도 처음부터 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을 믿지도 의지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고 있을 때에만 선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그 가지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을 때에만 생명을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의의 열매들도 맺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의 깊은 의미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는 꽃을 피울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지어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복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누릴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와 나뉠 수 없이 연합을 이룬 자로 그리스도 없는 영광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지고 당하고 망하면서도 섬기는 사랑과 용서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이 참 자유를 알고, 참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 안에서 참으로 주의 은혜를 감사할 때 우리 안에 생명력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창조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참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사업을 시작할 때 그 일의 중대성을 무엇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얼마를 어떻게 투자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하나님이 투자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대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죽음입니다. 우리는 그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과정 중 하나님이 치르신 이 엄청난 대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실 때,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 그 하나님의 찢어지는 가슴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그 아픔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 속에 치르신 엄청난 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그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에 감동과 감격이 넘쳐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감격하고 있습니까? 그가 치르신 희생을 잊는다면 그는 이미 탕자입니다. 바울은 그 감격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그의 서신 곳곳에서 노래가사 후렴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청난 투자를 하셨다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를 지옥이나 면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을까요? 그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머리가 누리는 영광을 몸이 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의 영광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계시록에 나와 있는 내용 말고는 더 이상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투자한 것을 미루어서 짐작은 가능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초로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에 세워질 교회라는 건물의 웅위함과 화려함, 그 영광이 어떠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느 건물 하나를 세우는데 그 기둥 하나의 기초가 별 하나 전부를 필요로 하다면 그 건물의 웅장함이나 규모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보다는 훨씬 쉬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투자 하셨습니다. 누가 있어서 그 교회의 영광됨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교회의 복됨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알려는 애씀도 없습니다.
그 교회의 영광에 대해 아는 만큼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된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바울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그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우리가 할 몫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된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부터 고쳐나가셔야 합니다. 서로를 종중하고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라온 배우자의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무지입니다. 반찬을 타박하기 전에,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상대의 입맛에 맞출 준비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가정의 건강을 위한 식단을 만들어가는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내가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어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상대를 느끼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의 집안을 들먹이면서 '네 집 안은 왜 그 모양이냐?'는 식의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 중임을 조금씩 깨달아 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신비로운 연합으로 묶어두신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는 그리스도도 없다고 그리스도와 우리를 묶어두셨습니다. 우리 없이는 그리스도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몸이 없는 머리, 머리 없는 몸 그 어느 것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공격하고 아내가 남편을 공격하게 되면 상처를 입는 것은 내 가정과 내 교회입니다. 몸에는 머리, 손, 발, 눈, 귀, 입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체들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피차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빈부귀천, 유·무식을 떠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고전 12:13).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세상에게 세상과 구별된 가정이 있고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구별된 삶을 본 자들로 하여금 과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의 삶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이웃, 직장 동료, 모두에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로 구별된 자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소금이 되어 썩어질 것을 막아 주어야 합니다. 함께 썩지 아니할 뿐만이 아니라 살아 생명의 빛을 발하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 된 자의 복이요 권리요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빛은 그 빛을 어두운 세상 밖으로 내어 비출 때에만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선택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거룩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는 그 거룩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을 감당하신 것과 같이, 그가 종이 되어 낮추신 것과 같이, 욕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 맞고 지고 당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예수 때문에 얼마나 무엇을 손해 보았습니까? 예수 믿으면 앓던 병도 낫는다더라. 부자가 된다더라. 약값도 필요 없다 하더라는 말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너무 어린 믿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의 시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모아져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기에 예수 때문에 맞고, 터지고, 지고 당하고 망하는 것까지도 감사해야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양식으로 자라가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룬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주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히12:1-2).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시며 내 편이시며 나와 지금 여기 함께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사자굴 속에라도 뛰어드는 삶이 우리의 삶이며 모든 것이 가능한 삶입니다. 그걸로 인해 세상이 나를 바보취급을 한다 해도 우리는 이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깨 펴고 폼 잡고 성경 옆에 끼고 걷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삶을 피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 훈련을 위해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옛 사람이 다 죽고서야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으로 하나님이시면서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라는 치욕의 자리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우리가 세울 자존심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와 풍성한 은혜를 증거 해야 할 증인들입니다. 무엇으로 증거 합니까? 입으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를 악물고 죽기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개의 자랑은 달리기를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토끼를 잡으려고 쫓아갔는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개망신이었습니다. 다른 개들이 마구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 개의 변명이 명답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토끼는 목숨을 위해서 뛰었고 나는 그저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 뛰었다는 점일세."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하고 우리의 옛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우리가 죽기로 연습해야만 하는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박힘으로 일순간에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 몫으로 남겨 놓으신 끈질긴 싸움입니다. 일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일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까지는 일생동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싸움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면 죽기로 자신을 십자가 아래 장사지내고, 죽기로 자존심을 버려야합니다. 그 일이 힘들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시면서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갈하면 마시우고, 벗었으면 입히고, 욕하면 욕먹고, 때리면 맞으라"는 말씀을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가신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힘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나를 먼저 장사지냄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의 풍성을 오고 오는 세대에 증명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복된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 복을 온전히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