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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머니 이야기


삼상 2:18-21

 
저는 80년대 부산의 달동네에서 야학 선생을 했습니다. 고무공장에 다니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노동자들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당시 달동네에서 바라본 현실은 빈민 부모는 빈민 아동을 낳고, 빈민 아동은 다시 빈민 부모가 되는 악순환을 반복이었습니다. 저들 스스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쇠사슬과 같은 억압이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돌했던 20대에 혼자서는 힘들었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야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비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교육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고, 자신을 보게 하는 교육이 있을 때 자신의 한계와 환경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2001년 첫 목회지인 문경 폐광지역을 갔을 때에도 공부방을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다. 제 눈에 비친 농촌과 폐광촌은 문화와 교육의 사각지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한 대학으로부터 컴퓨터 10대를 기증 받아 온라인 강의와 오프라인 학습을 함께 시작하고, 마을도서관을 마련하여 아동 청소년 도서만 만권정도 구비해 놓았습니다. 이때 서둘러서 공부방을 시작한 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교육부 장관이 한 좌담회에 나와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교육 환경과 재정이 뒷받침 되지 않는 시골이나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인물이 나오기 힘들다는 어투였습니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던 교육시대는 지나갔습니다."이 말이 제 마음 속에 숨겨져 있던 오기를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제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가 보라!"는 이상한 저항감이 꿈틀거렸습니다. "인물은 하늘이 내는 법인데, 좋은 환경, 좋은 부모 밑에서만 인물이 나오나" 그래서 처음으로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요즘은 돈에 의존하는 교육이 더 심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교육하고 있는 부모들은 대부분 환경과 돈이 자녀 교육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아프게 이야기 하면 돈이 없으면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두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과 사랑과 인격이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돈이 교육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이를 좋은 대학 보내려고 하면 세 가지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자금력, 어머니의 정보력입니다. 아버지의 무관심은 가치와 도덕적 기준을 버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언급한 것 같습니다. 결국 부모의 환경과 돈이 아이 교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교육자본주의입니다. 오늘날 공교육이 다 무너지고 사교육이 활개치고 있는 배경에는 돈의 논리가 교육마저, 인간마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갈릴리 가족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이 주는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갈릴리공동체 계약을 맺은 우리 갈릴리 성도들은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세상 속에 살고 있으니 세상이 가는 방향대로 아이를 교육할 것인가? 아니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아이를 교육할 것인가?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고, 어린이 주일인 오늘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대조적인 두 여인을 통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는 단지 자녀 교육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의 가치관을 설정하는 문제이고,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려는 두 어머니는 요셉의 어머니 라헬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입니다. 두 여인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여인은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자녀 없음으로 인해 가슴 아픈 세월을 한동안 보내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자녀를 얻었습니다. 이때까지 두 여인은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삶의 행보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얻고 나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으로서의 길은 비슷했지만 어머니로서의 길은 완전히 달랐다는 점입니다. 두 어머니에게는 공통점 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고, 그 차이점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두 어머니에게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라헬은 사람을 향해 살았고, 한나는 하나님을 향해 살았습니다. 라헬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향하여 살았습니다. 창세기 30장에 보면 라헬의 생활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자기 언니인 레아는 남편과 하루 밤만 동침하면 아들을 순풍순풍 낳는데, 자신은 남편을 끼고 살아도 자녀가 생기질 않습니다. 이에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남편을 향해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도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라헬을 그렇게 사랑했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자녀를 자기인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를 사랑했지만 막무가내로 대드는 그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떼를 쓰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보고 사는 여인이었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괴로움 후에 라헬은 아들을 얻었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생각해 주셨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할 때 남편에게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남편의 위로의 손길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향해 눈길을 고정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떼를 쓰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고백을 이름에 담았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인이었습니다.
 
둘째로, 두 여인은 아기를 낳은 후에 보인 반응도 달랐습니다. 라헬과 한나 모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였습니다. 라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신지라"고 했고, 한나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여인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이름을 짓는 데부터 달랐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은 후 "요셉"이라 지었습니다. 요셉은 더하다는 뜻입니다. "아들 하나만 더가 아니라 경쟁하고 있는 언니 레아처럼 네 명 다섯 명 제게 주십시오."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들 더 주십시오.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감사하기는커녕 아직 부족함을 느끼면서 더 많은 자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한 쪽 팔에 자식을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팔로는 또 한 자녀를 안길 원했습니다. 감사보다는 더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 이게 라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보인 그녀의 인간성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요셉의 동생을 잉태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난산하여 아기를 낳자마자 라헬 자신이 죽었습니다. 그 아들 이름이 슬픔의 아들 베냐민입니다. 더 달라고 했으나, 자식으로 인한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 들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찬양하는 한나에게는 불만이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하셨습니다.
 
셋째로, 이런 두 어머니 믿음의 차이는 아이를 키우는 데서도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라헬은 아이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더 달라."는 것입니다. 더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현재 가진 것을 절대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더 달라는 판에 현재 가진 것을 내놓겠습니까? 이름 속에는 "하나님, 요셉은 내 자식입니다. 절대 내놓지 못합니다. 끝까지 내가 키울 겁니다." 이런 욕망이 풍겨납니다. 비록 기도로 얻은 아들이기는 하지만 요셉 내 아들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해서 입히고, 제일 좋은 과외교사 붙여주고, 제일 좋은 음식 먹여서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머니를 보는 것 같습니다. 돈으로 제일 좋은 입히고, 돈으로 제일 좋은 과외선생님 붙여주고, 돈으로 제일 좋은 음식 먹이겠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기도로 자녀를 얻었지만 세상적인 방법으로 요셉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당한 어려움을 한번 보십시오. 자식을 편애해서 키우니까 형들이 동생을 팔아버렸습니다. 어려움 중에 얻은 아들이라고 특별하게 채색 옷을 입히니까 그 채색 옷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습니까? 교육적 입장에서 본다면 라헬의 교육은 처참하게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뒷받침 되지 않은 교육은 무너지게 됩니다. 돈이 중심이 된 교육은 인간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심히 걱정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돈으로 교육하고, 자기중심적으로 교육 받은 아이들이 어떤 가치관을 형성하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인 줄 알기에 마음을 비웠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키운 후 에 엘리 제사장이 있는 실로의 성막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가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려 나실인으로 쓰임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어떤 아들입니까? 옆에 끼고 살아도 아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지옥엽 같은 그 아들을 뚝 떼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라헬처럼 움켜쥐고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자라게 하였습니다. 돈으로 키우고 물질로 교육하는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아이를 키웠습니다. 더군다나 아들을 맡긴 대제사장은 성막에서 가슴에 한이 차올라 기도할 때에 술 먹고 중얼거린다고 비난했던 바로 그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제사장에게 아이를 맡겼습니다.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대하는 영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한나의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한나가 아들을 이렇게 키운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은 이스라엘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으로 사무엘이 대제사장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지파 사람만 되는데, 사무엘은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면서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에브라임 지파인데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분별력이 부족하여 수모를 준 여인이 아이를 낳아서 자신에게 맡기는 그 믿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엘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무엇으로 보상할꼬? 이 마음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마침 자신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가문의 대가 끊어졌습니다. 이때 엘리는 사무엘을 자신의 아들로 양자를 들여 대제사장으로 세우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구원자요, 영웅이었습니다. 아들을 뚝 떼어 하나님께 맡기는 한나의 결단을 통하여 사무엘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어떻게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돈으로 교육하는 방법 거절해야 합니다. 부모 품에만 붙들어두려고 하는 교육 포기해야 합니다. 돈으로 하는 교육은 실패합니다. 부모 품에 가두어 두는 교육은 실패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한나처럼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한나처럼 자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녀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라헬처럼 욕망으로 바라보지 말고,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겨 키워야 합니다. 자식을 내 손에 붙잡고, 내 방식과 내 뜻대로 키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게서 뚝 떼어 하나님 가까이로 붙여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손을 놓으면 아이가 넘어질 것처럼 불안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놓는 순간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는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내 자식이라는 마음을 버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로 성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때,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라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비록 라헬이 요셉을 내놓지 않고 품에 안고 살았지만, 그래도 요셉도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잘 키운 것 아닙니까?" 그럴듯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라헬이 그를 자기 품에서 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오게 된 것은 라헬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키우고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죽었기 때문에 요셉을 하나님이 키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키우시는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라헬이 죽은 후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라헬을 대신해서 요셉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채색옷을 입히고 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아버지 야곱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아예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완전히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후에 그가 입었던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께 보여주면서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고 말했지요. 그 순간부터 야곱은 요셉을 마음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곱아, 네 아들 요셉을 포기해라. 죽은 줄로 알고 있거라. 요셉은 네가 채색옷을 입히고 끼고 돈다고 해서 훌륭하게 되는 게 아니다. 요셉은 내가 책임지마. 너는 빠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이 라헬을 대신해서 요셉을 끼고 살면 제대로 교육이 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의 아들 교육은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요셉만 채색옷을 입히고 편애했습니다. 요셉이 형님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다녀도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잘못되어도 그대로 방치하는 무책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야곱의 영향권 밖으로 멀리 뚝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돌볼 수 없도록, 아예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훈련시켰습니다. 이게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애굽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사는 동안 낮아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요셉은 고난을 견디는 힘도 얻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슴에는 들판의 맹수처럼 야성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만약 아버지 품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그는 마마보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에 신앙 다 팔아 먹고 세상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요셉은 그 고통을 통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았기에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후에 흉년을 만나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요셉은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 집에서 호위호식할 때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고귀한 것을 노예의 옷을 입고 고생 중에 배웠습니다. 사무엘이 실로의 성막에서 성장했다면, 요셉은 애굽에서 자랐습니다. 실로의 성막과 애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교실이었습니다. 사무엘과 요셉 두 사람은 부모와 떨어져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내 곁에 붙잡아 두고 내 방식대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을 비우고, 뚝 떼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키워주셔야 우리 자녀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들처럼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 영적인 도전 속에서 자녀를 바로 세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서신서에서 만나는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인 혼혈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처럼 업신여겼습니다.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을 저급한 민족으로 취급했습니다. 양쪽에서 다 비난받아야 했던 혼혈아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이때 그의 어머니 유니게는 한나처럼 자녀를 뚝 떼어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바울은 후일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성경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것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의 가치관에 우리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 공동예배에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자녀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는 여 집사님이 있습니다. 사랑의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졸리는 눈 비비며 어머니 손잡고 나와서 도시락 싸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섬기기 위해 설거지로 봉사하는 청소년들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주 작고 미미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섬김이 구비된 자녀를 하나님이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써야 할 사람을 찾으실 때 바로 그 아이가 하나님 눈에 가장 먼저 보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갈릴리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하나님 눈에 뛰는 그 아이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자녀 교육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 그리고 우리의 전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 이것은 우리 인생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돈이 교육을 주도하고, 부모의 품이 교육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녀를 뚝 떼어서 하나님께 맡기면서 사는 새로운 방법에 도전해야 합니다. 이런 교육정신 가지고 걸어가는 우리의 자녀들 위에 사무엘과 같은, 요셉과 같은, 디모데와 같은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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