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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에서 성자(聖者)가 된 김선태 원장
시각장애 3만2000명에 빛을 선물 정작 본인은 58년째 앞을 못봐 
"아이센터는 아시아·아프리카인들까지 돕는 희망의 등대 될 것"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지하 4층, 지상 8층 건물이 신축되고 있다. 원래 실로암 안과병원이 있던 자리다. 여기서 지금까지 3만2000명의 시각장애인이 개안(開眼)했고 40만명이 무료진료를 받았다. 내년 10월 새'아이센터(Eye center)'가 완공되면 이곳은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1986년부터 병원을 운영해온 김선태(金善泰·67·목사) 원장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지만 정작 스스로는 앞을 보지 못한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만에 부모가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해 고아가 됐고 그로부터 20일 뒤 다시 수류탄이 폭발해 두 눈을 잃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고모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매질을 당한 뒤 그 집을 빠져나온 그가 택할 길은 거리에서 동냥하는 것밖에 없었다. 

서울, 경기도 이천·안성·여주, 충북 음성·진천, 대구, 경북 안동과 부산에서 그는 밥을 빌어먹다 거지생활 2년 반 만에 마침내 왕초거지까지 됐다. 맹인(盲人) 안마사를 거쳐 겨우 미군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하기까지의 세월 속에서 그는 짓밟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짓밟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돕고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작년 막사이사이상(賞)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가 됐다. 그 인생을 되짚어 본다. 

 
◆ 천애의 고아

김선태는 1941년 9월 경주 김씨 가문의 3대(代) 독자로 태어났다. 서울 신당동에서 옷 장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6·25전쟁이 터진 지 열흘째인 7월 4일, 놀러 나가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선태야, 지금 전쟁 중이니 먼 곳에 돌아다니지 말고 위험한 장난 하지 말아라."

그 말은 그가 이승에서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와 보니 집이 잿더미가 된 채 사라진 것이다. 부모의 시신은 찾을 길조차 없었다. 무학초등학교 4학년으로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친구들과 왕십리, 뚝섬 일대에서 콩 서리, 참외 서리 해먹고 들판에서 자야하는 신세가 됐다.

7월 18일 소년은 그날도 고아 친구 8명과 뚝섬 밭에서 참외와 수박을 주인 몰래 따먹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다. 그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수류탄 불발탄이 터진 것이다. 사흘 만에 그는 한 농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얘야, 너는 천만다행이구나. 네 친구 8명은 수류탄이 터질 때 다 죽었는데 너만 살아 남았다. 하늘이 너를 도우셨구나!" 그런데 조금 전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 흐르는 한강물이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라니….

 
◆ 환영받지 못할 자

손이 귀한 김씨 집안에서 어린 선태가 기댈 곳은 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가 사는 경기도 양주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주머니에 돈 한푼 없는 이 앞 못 보는 소년은 남의 짐 안에 숨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20일 만에 100리 길을 걸어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맹인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는 눈이 있어 일하고 개도 눈이 있어 집을 지키고 나중엔 잡아먹는데 너란 놈은 밥먹는 버러지에 불과한 놈"이란 욕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그에게는 '급살맞아 죽을 놈', '벼락맞아 죽을 놈'이란 말이 따라다녔다.

고모는 보기 싫은 소년을 가시가 잔뜩 돋친 아카시아 몽둥이로 매찜질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의 몸에는 당시 맞은 상처 흔적 60여곳이 50년 넘도록 남아있다. 소년은 가족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어 부지깽이로 팔뚝을 지졌고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내려쳤다. 목침을 던져 귀머거리가 될 뻔도 했다. 나중에 그 돈은 그 집 큰딸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그 해 12월 23일 소년은 마침내 탈출을 결심했다. 그 전날 가족이 "저 녀석을 집에 둘 수도, 데려갈 수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 평소보다 밥을 두 배 주면서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을 밥 속에 넣어 죽여버리자"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년은 엄동설한의 피란길로 나서야 했다.


◆ 소년 왕초거지

그는 전국을 돌며 동냥을 하다 마침내 부산까지 내려왔다. 자갈치시장·영도다리·국제시장·부산역 앞을 전전한 지 4개월 만에 그는 부하 15명을 거느린 왕초거지가 됐다.

―거지도 서열이 있습니까?

"등급이 있지요. 왕초거지, 그 다음이 내초거지·초초거지·신초거지·똘마니의 순서입니다."

―앞도 못 보면서 어떻게 왕초거지가 됐습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면 불쌍하다고 밥도 주고 돈도 줬어요. 다른 거지들은 내쫓기기 일쑤였지요. 거지들이 쓰는 전문용어가 있어요. 쌀밥을 백모란이, 고기를 왕건이, 아무렇게나 섞어주는 음식을 걸이라고 하지요. 저는 그걸 저 혼자 먹은 적이 없어요. 다 고루 나눠먹었지요. 그러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거지들까지 제 부하가 됐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있었어요. 교회에 같이 가야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가 제게는 천당같았거든요. 밥과 돈을 나누고 교회 가는 대가로 그들은 절 지켜줬고요."

―교회는 거지도 반겨주던가요?

"저는 교회에 갈 때는 왕자(王子)거지라는 심정으로 갔어요. 동냥받는 돈 중에서 가장 깨끗한 돈만 골라 헌금했지요. 개중에는 저를 동냥하러 온 거지인줄 알고 내쫓는 교회도 있었지요. 옻이 올라 온 몸에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면서도 교회에 갔을 때는 나병(癩病)환자로 오해받아 내쫓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이웃교회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 천대를 어떻게 이겨냈나요?

"처음에는 지독한 증오심이 안 생길 수 없지요. 죽여버리겠다는 마음도 들고 그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고막이 터졌을 때 자연 치유된 게 그 분의 뜻이 아니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고모 집에서 학대당할 때 허리끈을 풀러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도'죽지 마라! 네가 자라서 옛 이야기하고 사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어요. 우물에 빠져 죽으려 할 때는 '참아라, 빨리 나오너라' 하는 목소리도 들렸지요."

―혹시 목사라고 하나님의 말을 들었다고 하는 건 아닙니까? 저는 47년 동안 온갖 신(神)에게 다 빌어봤는데도 그런 목소리 한번 들은 적이 없는데.

"절박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하십니다."

―그 고모와는 다시 못 만났나요?

"못 만났습니다. 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지금도 그 사람들을 원망합니까?

"그 시절에는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던 시절입니다. 집에서 고사(告祀)지내던 시절이지요. 전쟁이 안 났으면, 부모님이 살아 있으면 더 좋았겠지요. 그렇지만 고모님 댁에서 차별, 슬픔을 당하지 않았다면 저는 안마사나 침 놓는 사람, 점술가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고 넘어가는 성격입니까?

"처음에는 내성적이었지요. 고생을 하면서 바뀐 겁니다."


◆ 유전(流轉)

거지사회에는 온갖 정보가 유통된다. 부산에서 왕초 노릇을 하던 그에게 부하들은 "서울로 가자"고 했다. 서울에 가면 미군부대도 많으니 얻어 먹기도 좋고 돈도 많이 번다는 이야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왔다. 여러 번을 망설이던 김선태는 전쟁 중인 서울로 잠입했다. 

한강을 건너려면 도강증(渡江證)이 필요한 시절이었지만 용케 피해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그 때 그에게 한 미군병사가 다가왔다. '플리즈 헬프 미'라는 소리를 들은 병사는 소년을 부대로 데려가 코코아도 주고 양말과 속옷까지 주더니 영등포 우신초등학교에 있던 이탈리아 병원에 입원시켜줬다. 

―이제 고난의 끝이 보인 건가요?

"난생 처음 안락한 대우를 받았어요. 상처를 치료받고 음식도 푸짐하게 먹었어요. 치료가 끝난 후에는 삼애고아원에 데려다 줬지요."

―그곳에는 문제가 없었습니까?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삼애고아원에는 300명의 고아가 있었는데 정상인 고아들에게 매일 구타당하고 놀림을 받았지요. 한달 후에 그 고아원을 나왔습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다시 거지생활을 하다 미군 종군(從軍)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용산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으로 저를 보냈는데 그곳은 삼애고아원보다 더 형편없었습니다. 다시 천애원이라는 고아원을 갔다가 그곳 역시 똑같은 상황이어서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부산에 돌아오니 익숙했겠군요.

"당시 정부가 거지 소탕령을 내렸어요. 저는 국제극장 뒷골목에 있다 끌려갔는데 다행히 질(質) 좋은 거지로 분류돼 모범적인 고아원으로 배치됐어요. 더구나 그 고아원에서 라이트하우스(Light house)라는 초등학교 입학을 추천해줘 마침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요."


◆ 면학의 길

―라이트하우스면 말 그대로 빛이 활짝 보이기 시작한 건가요?

"점자(點字)를 열심히 배워 4학년으로 편입하고 한 학기 뒤에 6학년으로 월반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선생님들이 문제였어요.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장애인들을 마구 때리고…. 안마까지 강제로 시켜 안마사가 돼보기도 했어요. 1년6개월간 배우는 것은 좋았지만 고난을 체험했다고 봅니다."

―안마사까지 했습니까?

"1954년 어느 날, 저를 그렇게 미워하던 양 사감님이란 분이 유원지인 송도 근처에서 안마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니 대나무로 된 피리를 줬어요. 당시 맹인 안마사들이 대나무 피리를 불고 다니면 손님들이 '안마쟁이요' 하고 불렀지요. 그 때 어른들이 벌이는 안 좋은 모습을 알게됐어요. 한 달 해보고 '절대 안마사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돈은 잘 벌었지만요." 

―돈을 잘 벌었다면 안마 기술이 뛰어난 모양입니다.

"여자 분들은 어린이 안마사를 좋아해요. 편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만일 초등학생이 안마하다가 맹인 어른에게 붙들리면 거의 반 죽여놔요. 그 세계의 불문율이에요. 저는 그게 무서웠어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 고통받았는데 눈을 떠 볼 노력은 한 적이 없나요?

"있었지요. 당시 박태선 장로라는 분이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수만 명을 모아 열흘 내내 집회를 했어요. 제 옆에 있던 여자분이 '박 장로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어요. 마침내 제 차례가 돼 용기를 내 '장로님! 내 눈을 보여주게 해주세요'라고 했지요."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분 팔이 기둥토막처럼 굵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기는커녕 느닷없이 주먹으로 내 뺨을 내려치는 거예요. 하마터면 청각장애인까지 될 뻔 했지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게 1955년이지요.

"효자동 서울맹아학교였습니다. 그 곳에서도 구타는 계속됐지만 제 생애의 은인을 만났어요. 평양신학교 교장을 하신 곽안련 선교사의 아들인 곽안전(알렌 클라크) 선교사를 만나게 됐지요. 그 분 도움으로 중학 입시를 준비해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고등학교도 숭실고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학생 3000명 중에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는데 동급생·하급생들이 참 잘해줬어요. 후암동 버스 종점에 내리면 가방도 들어주고 팔짱끼고 교실까지 데려다 줬어요. '누구든지 김선태를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는 묵계도 있었어요. 비로소 학생 왕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진학 때 난관이 많았겠지요.

"제가 고3 1학기 때 5·16이 일어났어요. 당시 대입 국가고시가 필답고사 250점, 체력장 50점 합해 300점 만점이었는데 원서를 내자 갑자기 기각통보가 온 거예요. 당시 법으로 시각장애인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지요."

―이번에는 어떻게 이겨나갔습니까?

"무작정 문교부 대학교육국장을 찾아갔어요. 하도 찾아가니 나중에는 제가 대학교육국에 들어서기만 해도 공무원들이 웃으며 '최 장학관님, 저기 또 반가운 손님 오십니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서른세 번을 찾아갔는데도 공무원들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줬나요?

"기적은 아니고 제가 식칼을 품고 갔지요. 국장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을 후진국으로 끌어내리는 적(敵)이오. 차라리 나와 함께 죽음의 길로 갑시다'라고 외치며 칼을 휘둘렀지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던가요?

"겁이 나서 뒤로 도망쳤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당시 문교부 출입기자들이 본 거예요.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됐어요. 그 덕에 저는 유명인사가 됐어요. 한동안 버스도 공짜로 타고 다니고 식당에서도 밥값을 내지 않았어요. 며칠 뒤 문교부장관이 시각장애인도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숭실대를 거쳐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목사가 된 뒤 미국 맥코믹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지요. 대단한 집념입니다.

"제가 부산 라이트하우스에서 냉대를 당할 때 바다 앞에서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께 물었지요. '제가 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요. 그 때 '될 수 있다'는 답을 들었어요."


◆ 결혼

―이성교제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습니까?

"저는 당시 학비도 벌어야 하고 기숙사를 나오면 갈 곳이 없는 처지였어요. 그런 입장에서 연애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지요. 이성을 생각하면 미래계획이 다 무너질 것 같았어요. 대학 3학년 때부터 제게 편지를 보내 사귀자는 아가씨는 많았지만요."

―무슨 매력이 있다고 구애(求愛)하는 편지가 왔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편지는 정말 많이 왔어요."

―그런데 왜 처음 결심을 꺾고 결혼한 겁니까?

"신학교 동창들이 '우리 있을 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을 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도 옳을 것 같아 선을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아내(김정자)를 만났습니다."

―만난 지 세 번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처지를 그대로 설명했어요. 가진 것도 없고 집도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확신은 있다고요. 아내는 '돈이 부족하면 절약해서 쓰면 되고 하나님이 주는 대로 감사하게 쓰면 된다'고 했어요. 제가 두 번째 질문을 했어요. 공산당이 공격해오는 상황이라면 신앙을 택하겠느냐, 공산주의를 택하겠느냐고요. 아내는 신앙을 택하겠다고 했어요. 그 두 마디로 끝이었습니다."

―신부 쪽의 반대가 심했겠지요.

"펄쩍 뛰었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장모께서 급성 방광염에 걸려 제가 다니던 신학교 근처 병원에 입원했는데 꿈 속에 '앞 못 보는 목사 후보생과 결혼하는 일을 반대하지 말라'는 예수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결국 승낙하셨지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신부 쪽 집안이 남대문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결혼 하루 전날인 1968년 11월 22일 남대문시장이 전소(全燒)되는 큰 화재가 일어났어요. 저도 믿기지 않는데 제 집사람 바로 앞집에서 불이 멈췄어요. 그래서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지요."

―결혼식은 어땠습니까?

"회현동 성덕교회에서 했는데 축의금이 딱 5만1000원이 남았어요. 그 돈 가운데 4만원으로 수유리에 방을 얻고 밥상 하나, 밥그릇과 국그릇 2개, 수저와 젓가락 2개, 독 하나를 샀지요."

―신혼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겠습니다.

"웬걸요, 아내가 수유리에 있는 임마누엘 여성 시각장애원으로 여행을 가자는 거예요. 그날 저녁 아내와 저는 원생들과 함께 된장국에 보리밥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 세상에 빛을 나누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한 게 1972년부터지요.

"그 때만 해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가 없었어요. 곽안전 선교사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영국에서 나온 선교사와 공동 사역(使役)을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남산 3호터널 입구에서 교회를 개척했지요. 그 교회가 창립된 게 1972년 1월입니다."

―그 때만해도 가난한 이들의 눈을 뜨게 해줄 여력은 없었겠습니다.

"1977년 평소 안면 있던 충북대 이정순 교수님이 찾아와 핸드백에서 돈 봉투를 꺼내는 거예요. 아들 결혼시키려 모아둔 돈인데 개안(開眼)수술비로 썼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개안수술을 시작해 1986년 실로암안과병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개안수술을 시작했지요. 지금까지 개안한 분만 3만명이 넘고 무료진료 받은 환자들이 40만명이 넘습니다."

―개안수술비는 얼마나 듭니까?

"병원에서 하면 보험적용을 받아도 90만~100만원이 드는데 저희는 30만원 한도에서 합니다. 개안수술이 대개 백내장 수술을 말하는데 제일 좋은 렌즈를 눈 안에 넣지요. 가난한 분들이나 장애인들은 전부 무료로 해줍니다."

―개안수술비는 어떻게 모금합니까?

"교회마다 찾아 다니며 설교를 하고 모금을 하는 방식이지요. 제가 다른 목사들께 인심을 잃지 않아서 이 교회 저 교회, 전국 방방곡곡 다니면서 모금을 합니다. 생일 기념으로, 결혼 기념으로, 자녀 입학 기념으로 모금해주는 분도 있고 일일찻집이나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내놓는 분도 있어요. 평생 환경미화원을 하며 폐품 모아 판 돈을 전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하루에 1달러씩 모아 1년에 365달러씩 보내주는 분도 있지요."

―실로암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연못 이름이지요. 예수께서 눈 먼 사람을 개안할 때 등장하지요.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중국 옌볜에도 실로암안과병원이 있다지요?

"1995년에 세웠습니다. 삼성 SDI에서 46인승 버스를 지원해줘 농촌·어촌·교도소·감호소를 찾아 다니며 안과 진료를 해주기도 하지요."

―실로암 병원은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된 겁니까?

"1981년이 세계장애인의 해였어요. 그 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음악회가 열렸는데 개안수술을 한 소녀가 나와서 감동적인 간증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한국교회 창립 100주년인 1985년까지 실로암 안과를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졌어요. 당시 장치혁 고려합섬 회장이 후원을 해주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이 고문을 맡으셨지요. 1982년부터 모금이 본격화됐는데 땅 문제가 생겨 예정보다 1년 늦게 병원을 열게 됐습니다."

―지금 실로암 병원을 헐고 아이센터를 다시 짓게 된 계기는 뭡니까?

"아이센터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까지 돕는 희망의 등대가 될 겁니다. 사실 어려울 때 이 일을 시작했어요. 2000년에 제가 뇌가 부풀어올라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 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5년 살면 많이 사는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 드렸지요. 제가 할 일이 많으니 살려달라고요."

―이번에도 응답이 왔나요?

"이번에는 안 왔어요. 그렇지만 5년이 지나도 살아있으니 제 소원을 이뤄지신 거죠."

―언제 완공이 됩니까?

"내년 10월입니다. 정인욱 복지재단에서 한 층을 기증해줬고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도 한 층을 기증해줬어요. 김건철 건축위원장도 한 층을 약속했고 방 2개, 3개를 기증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벽돌 한 장에 1000원씩 모금을 받는데 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거죠."

―막사이사이상의 권위가 대단하지요. 가나안농군학교를 만든 김용기씨도 받았고 김활란·장준하·장기려씨 같은 분들도 수상자 명단에 있더군요.

"그 상은 제가 원한 게 아니고 주한필리핀대사관에서 조사를 해 추천한 겁니다. 상이 아주 까다로워요. 아이센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노벨평화상을 받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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