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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성도라는 부름의 축복.


"(빌 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세상에서 죄를 짓고 가는 것이 형무소입니다. 저는 전도를 위해 경찰서 유치장은 가본 일은 있지만 형무소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분들은 머리도 좋고,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면 감방 선배들이 늦게 들어 온 후배들의 신고를 받으면서 "너 왜 왔냐? 어디서 뭔 짓 했냐?"며 골탕도 먹이는데, 자칭 변호사도 있고 판사도 있는데 그들이 "야, 넌 1년 6개월이다." 그러면 거의 정확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경제, 정치, 세계정세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다고 합니다. 정치인 하면 그 정치인의 족보까지, 그 사람이 과거에 뭘 했고 그 인물의 평이며 어느 계열, 당의 서열에 이르기까지 훤하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 다 아는 그들이 꼭 하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자기 죄 때문에 그곳에 와 앉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빠서 붙잡혀 왔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이를 갈면서 악의 기술들을 익히기 위해 온갖 지혜를 총동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피나게 익힌 악의 지식으로 자신이 묻힐 죽음의 구덩이를 더 깊이 파고들면서도 그것이 전혀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안다지만 실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알아야할 최고의 지식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인인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모르는 인간의 종착역은 지옥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호와를 안 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 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자기 속의 죄가 자기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선보다는 늘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도 해보지만 늘 넘어지고 자빠져서 후회를 거듭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모두가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구제 불능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타락하여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렘17:9)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들을 향하여 '성도'라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도(하기오이스)'는 히브리어 '카다쉬(분리하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카다쉬'는 구약의 제사에서 정결의식을 통해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의미하며, 신약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한 백성 즉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을 '구별된 자들, 거룩한 무리들' 곧 '성도'라 부르고, 스스로 죄인이기를 거부하며 죄인임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하여 '죽은 자들' 또는 '죄인'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놀랍게도 성경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도'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무리'라는 말입니까? 내가 나를 보아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우리를 '성도'라 부릅니다. 

바울은 지금 칭찬받을만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문제의 빌립보교회를 향해 편지의 맨 앞에서 '성도'라 부르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분을 확신시켜 놓고 그 신분에 맞게 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 자들이 가장 천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일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운 성도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빈부귀천 유`무식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방 종교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방 종교는 그가 이룬 수양한 결과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무 조건도 없이 믿는 자들을 통틀어 '성도'라 부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한 달은 고사하고 어제 하루만이라도 거룩한 하루를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적어도 양심이라는 걸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도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성도'라고 해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성별하심을 받은 거룩한 무리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보면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보면 얄밉고 간사한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못된 야곱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아셔야 합니다. 야곱처럼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자기만 복을 받겠다면서 다른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쳐대던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깊은 감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나 같은 사람이 목사, 장로, 집사, 성도가 된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나의 실력이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45:4)."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서 칭호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별명 곧 이스라엘의 명칭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엘'(la)과 '통치하다, 다투다, 힘을 가지다.'를 뜻하는 '사라'(hr;c)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칭호에 대한 설명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이야기에 나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라.(창 32:28)" 

여기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는 그 문구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입니다. 그 문구에는 '통치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와 '다투다, 힘을 가지다'를 뜻하는 '사라'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투쟁하신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방으로부터 거룩한 이스라엘로 구별하신 것은 더럽고 추한 야곱을 통치하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투쟁하시겠다는 언약적인 암시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어떤 능력이나 자질이나 자격이 있어서 그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바울 역시 그랬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적대자였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면서 하는 짓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의 원수로 세상의 친구로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분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세상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요,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평화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서는 더 없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면서 살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라는 무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 묶인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의 신분을 확인받음으로 해서 그들의 거룩을 위한 삶에 동기를 부여받았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자신과 빌립보 교인 모두를 '성도'라 복된 무리로 하나로 묶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후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신분에 걸 맞는 성도의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 죄 값을 남김없이 모두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와 함께 부활의 몸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시는 보호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복됨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 가도록 운명 지어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성도'라는 부름 속에 깨우치고 싶은 성도의 신분이고 수준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썩고 냄새나고 영영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가 자기 보혈로, 죄로 죽어 냄새나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꽁꽁 묶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옷으로 입혀서 죽어 썩어진 송장냄새를 다 닦아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것이 되게 하셔서 썩어 냄새나는 이전 것을 모두 씻어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은혜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천하 만민을 복으로 인도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보호사심으로 말미암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셔서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과도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이요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극소수의 초대교인들이 그 험난한 시대에 그토록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성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직이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능력이 이교도에게까지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심오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토록 힘을 잃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성도가 섬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섬긴다는 것은 성도의 삶의 방식뿐만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반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 교회를 향하여 요구할 변화가 있다면 성도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그의 서신 맨 앞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성도라 일깨우는 것은 그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도라는 부름의 의미를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우리는 구별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자들로서 날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성도가 모이고 만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민족이 갖지 못한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별된 백성이 되었고,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우리는 세상에서 그렇게 구원받았으며 구별됨을 받은 성도입니다. 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본적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로 구별되어진 너무나도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 있습니까? 그렇게 존귀한 자로 부름 받은 자인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렇게 구별된 자로 살기가 소원입니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영적으로 미숙할지라도 그렇게 살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 훈련이 우리의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기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겉과 속이 같아지기까지, 천국시민의 삶이 습관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훈련하고 또 훈련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더 많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시민의 삶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시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성경말씀을 교본으로 삼아 날마다 익혀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그 앞에 설 수 있게 정결함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의인이 됐다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이 됐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고 죄책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빠가 됐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성도가 됐다는 의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깨끗이 씻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성도라 부름으로 상기시키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음에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분을 확인시켜 놓고 그 다음 말을 이으려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에 부모님들이 말썽꾸러기 자녀를 불러다 놓고 훈계에 앞서 "네 가문이 뭔지 아냐? 너를 낳기 위해 네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일깨워 놓고 말을 시작하는 식입니다. 성도는 '죄의 오염에서 정결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깨끗이 목욕을 한 자들입니다. 원래 죄는 우리의 겉만이 아니라 우리 속까지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오염됐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된 우리는 이제 모든 언행심사(지, 정, 의) 모든 것을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정결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거룩한 백성이 된 자가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복됨을 아시겠습니까? 이 복됨에 감이 잡히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옷 갈아입고서 더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행하는 것과 그것이 잘못인줄로 알고 그 흙구덩이에 빠져나오려 애쓰다가 흙탕물에 옷이 더렵혀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면서 자랄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전에는 어둠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어둠이 고향으로 알고 살았고 빛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리스도가 성취하셨고 성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천국행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라는 이름의 신비고 기적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이 부름으로 시작하는 속뜻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의 편지마다에서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해서 그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그는 그렇게 반복해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도라는 신분을 각인 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나머지 내용들은 바로 성도의 성도다운 싸움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은 우리의 권리이고 특권입니다.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성도가 됐다는 자랑과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위한 싸움이 있어야합니다. 

언제까지 싸워야 합니까? 베드로는 그 싸움을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까지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1-11참조). 어느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싸움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 안에 온전히 품기까지입니다(빌2:5).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죄악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도 최고의 목표요 목적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우리 예수님은 병든 교회와 병든 사회를 치유할 의의 태양이십니다. 성도의 삶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교제하며 그분만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와 불의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여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생명의 빛 되신 주님을 내 심령에 영접하고 온 인류의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따르고 우리의 삶 속에 빛으로 오셔서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서 빛으로서의 사명을 위해 날마다 죽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포기한 자요 자기 존재에 대해서 포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 묶여진 자들니다. 우리의 존재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생각 내 욕심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나 되었던 옛 구습은 끊겨지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 성품만이 살아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그의 거룩한 성품을 받은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과 행동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달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발로 거룩을 행하며 그리스도의 손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것이요 내게는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창조해 내시는 기적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지고 당하고 억울할지라도 끊임없이 사랑하고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 가도록 운명 지어진 자들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예외 없이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성도라 부르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는 거룩한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속의 빛으로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언행심사, 생각, 행동, 마음, 사고방식까지 모두 세상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지배를 따라 살도록 그리스도에게 묶여진 성도들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성도로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고 영광입니다. 부귀, 장수, 명예, 건강, 후손이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선택, 쓰임을 받는 세상이 모르는, '성도'라 구별되어진 사람만이 누리는 비밀스러운 축복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욕심낼 복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성도'의 무리 속에 있음을 기억하시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시고, 여러분들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 삶까지도 주의 뜻을 따라서 거룩하게 드리기로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헤아리면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는 감사와 찬양이 넘치기 바랍니다. 바울이 살았던 그 복된 성도로서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고 그 복된 '성도'의 삶을 넘치도록 누리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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