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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성도와 감독과 집사=교회. 성도의 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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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성도와 감독과 집사=교회. 성도의 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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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성질이 난폭한 한 장교가 부하들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이 장교가 강물에 빠져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졸병이 그 장교를 구해 주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장교는 졸병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졸병은 "제가 원하는 것은 오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다른 병사들이 알게 되면 자기를 무척 미워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제 자리를 아름답게 하면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질서입니다. 인간생활에서 제 자리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추한 것은 없습니다. 학생이 술집에 앉았다거나 보초가 오락실에 앉아 있는 것은 꼴불견이기 이전에 악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될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은 모두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집단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고, 이적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일에 꼭 필요해. 그 사람은 마음이 넓어. 그가 없으면 일이 안 돼."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를 지목하여 감독과 집사라 말하고 성도와 구별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독(ejpivskopo")'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도록 선택된 목사와 장로들과 그 외의 사역자들을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책임은 성도들의 후원자로서 성도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집사(diavkono")'는 일반적으로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시종인, 특히 기독교인 선생과 목사, 집사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서로를 돕는 일과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빌레몬서의 수신자로 감독들과 집사들을 특별히 지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라는 말속에 그들이 이미 포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로 지목하여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감독들과 집사들을 특별히 지목해서 언급한 것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이었던 에바브로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빌립보에 다시 돌아갔을 때 그의 권위를 세워줌과 동시에 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전해 주는 일을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이 주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그 이상의 의미 곧 그들이 맡은 직무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짙어 보입니다. 바울은 성도 곧 교회를 장로나 집사들보다 앞서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자들이 교회의 건덕과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사역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할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서신 맨 앞에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고 또 어린 디모데를 동역자로 내세우고 있음과 또 중간에서는 자신과 디모데의 동역을 그림같이 표현한 점과, 에바브로 디도를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후 1:24)"는 말씀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자신들의 권위와 지배와 부(富)를 위한 디딤돌로 여기고 있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교회의 장로나 집사, 권사 무엇이 됐건 교회의 직분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임과 동시에 성도를 섬기기 위한 종일뿐입니다. 목사, 사모, 장로든 누가 됐든 예외 없이 교회의 직분은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종이어야 합니다(고후 4:5하). 성도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섬길 때 그 교회는 아름답게 자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당시의 감독직분은 욕심낼만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커다란 위험과 무거운 책임을 동반했습니다. 감독의 보상은 빈번한 곤경과 멸시와 배척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박해가 올 때면 전과자들 같이 맨 먼저 잡혀가서 곤욕을 치렀고, 성도의 보호자가 돼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지금 그들의 직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맡은 자로서 어떤 각오와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 그들의 자리를 온전히 지키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고난을 보상으로 삼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직분자는 명예와 특권의 의미로만 이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직분이 돈으로 매수당하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야심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까지 교회의 직분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잣대로 교계를 좌지우지하기도 합니다. 목사들조차 이방과 짝하다 망하고, 감투 좋아하다 망하고, 세상과 짝하다 망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망하는 게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묶어서 도매로 망하는 참으로 슬픈 시대가 됐습니다. 우리는 직분자들의 본래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고 제 자리를 바로 지킴으로 교회를 바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바울 당시만이 아니라 요즘도 각종 잘못된 교리들 때문에 기독교의 정통교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천번제라는 괴상한 것으로 헌금을 강탈해가는 악당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단의 그릇된 사상과 교훈으로부터 교회를 지킬 책임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 책임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 직분자들이 먼저 바른 신앙과 바른 행위에 있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서 '책망할 일이 없고'과 '한 아내의 남편이고' 그리고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한 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장로의 도덕적 인격이나 신앙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타인에게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3:2). 장로는 진리의 수호자로 스스로의 삶 속에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며, 말씀을 온전하게 신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럴 때만이 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른 성도들을 권면하고 거슬려 행하고 말하는 자들을 권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직분자들이 교회를 바로 섬기는 일입니다. 어린 성도가 갈 길을 제대로 가게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돌보고 인도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세운 것이 교회의 직분입니다. 직분자의 일은 어린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혹 우리 교회에는 장로가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직분을 맡아야만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종으로 묘사한 것은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직분 이전에 섬기는 것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직분이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직분자들의 일을 여러분 중 누군가가 감당해야만 합니다. 누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 섬기는 일만 잘하면 됩니다. 저희 같은 시골교회에서는 실제적으로 식당에서는 박집사가 주방장하고 김집사는 밥퍼 하고 여전도회 회장이 설거지를 했는데, 구제를 할 때는 여전도회 회장이 대장을 하고 박집사는 김집사는 짐 나르는 일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 문제에서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혹 장로든 집사든 평신도든 일을 맡게 되면 그 일의 초점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그 일에 참여한 모두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 받는 것입니다. 서로를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의 일에는 언제나 그 일을 통해서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가 됐건 은혜가 됐건 그 일에 참여한 자들이 누구는 발이 되고 누구는 손이 되어 도우면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든든히 붙어 서서 함께 감당해가면서 받은 은혜와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일에 참여한 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되 짐을 나누어 져야합니다. 그래서 장로도 있고 권사 집사 권찰도 있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의 성숙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직접 섬기는 본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굳이 장로나 권사가 아니라도 교회형편을 잘 알고 서로의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힘이 모자라거나 손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으면 차라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편하게 이루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없으면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는 듯이 우리를 불러 쓰십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모두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이 집안에만 있으면 싸울 일도 없고 다리 부러질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 안에 꼭 잡아 매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동무들과 어울려 놀면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억울한 일도 당하고 기쁜 일도 겪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양보하고 돕는 법을 훈련받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놀이라는 일을 통해서 성품을 훈련받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일을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을 닮은 거룩한 자로 훈련시키려고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이 모자라서 우리를 직분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완성해내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있고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일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일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익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서로 섬기는 것이 없으면 어찌됩니까? 싸움이 시작됩니다. 서로 섬김을 받겠다는 싸움입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싸움이 생기면 교회는 상처를 입고, 무엇보다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만약 맡은 자들이 이런 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지 못하면 교회는 병들게 돼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왠지 모르게 목사와 장로 사이에는 갈등이 많습니다. 서로를 견제하려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싸우는 교회에 가보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은 구석은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싸우기 시작하면 심지어는 강단에서 멱살잡이를 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사탄이라고 고함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모든 실력이 다 동원됩니다. 권력, 재력, 학력, 다 동원해서 자신들을 섬김을 받는 자로 세우기 위해 세력다툼을 합니다. 그렇게 악취를 풍기면서도 서로가 자신은 하나님 편이고 상대는 사탄이라고 악을 쓰면서 쌈질입니다.
그 모두 교회가 직분을 명예와 권세로 여긴 결과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 교회를 움직이려 하니 싸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교회문제를 세상법정에까지 끌고 갑니다. 개판인지 난장판인지 구별이 안 갑니다. 아예 교회문을 막고 서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말로 두들겨 패고 강단 아래에서는 설교자에게 욕설을 퍼붓습니다. 장로나 목사 모두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성도 모두는 이 일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섬기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시험거리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가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다가도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과 진리가 훼방 받고 있다고 판단이 되면 무조건 시비를 멈춰야 합니다. 교회는 지고 당하고 망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세워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를 섬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어려운 중에도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해 김장을 담그고 반찬을 준비해드리는 그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수고하고 대접을 받는 쪽 모두 즐겁기만 한 그 모습들을 보면서 '이제는 많이 자랐구나!' 하는 안위를 얻었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면서도 기뻐하시는 그 모습이 제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이 보였습니다. 성도님들, 누가 교회의 지도자입니까? 누가 맡은 자입니까? 정답은 모든 성도가 다 지도자요, 다 맡은 자요, 다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섬기는 자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 중에 우리는 섬김을 받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선생으로, 어느 때는 제자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리는 주님의 본을 따라서 언제나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 앞에 사랑받을만하고 쓰일만한 조건과 실력이 있어서 직분을 맡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려하고 맡기시려는 일에 너무 모자라고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깊이와 넓이를 증거 해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사는 자인가를 증거 해내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야 너도 집사냐? 너도 장로냐? 너도 신자냐?' 비웃으면 멱살 잡고 싸우지 말고 '그래 네 말이 옳다. 그걸 감당할 실력도 조건도 내겐 없지만 하나님이 날 너무 사랑하셔서 날 용서하시고 직분까지 주셨다. 너도 그 하나님을 만나길 바란다.'고 말할 뻔뻔한 뱃심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품을 훈련받지 못하면 우리는 교회에서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고 악을 쓰게 됩니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고 교회 청소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목사라고 신사복 입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러면 누가 그의 말을 기쁨으로 따르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 그대로 사시다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맡은 자들은 더더욱 주님이 보이신 본을 따라야 합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물론 세상 지도자들은 나를 죽여 너를 살린다면 미친놈이라 비웃을 것입니다. 세상은 너를 죽여 내가 살겠다고 악을 쓰고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사는 데 어찌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삶을 통하여 지도자의 삶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6-28)." 성경은 맡은 자는 낮은 자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지 못함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가장 먼저 훈련받아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이 섬긴다는 말에는 배 밑에서 노를 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를 노예로 부리고 있는 악당들을 살리기 위해 노를 젓는 것입니다. 억울하지만 지고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이 온유해지고, 더 많이 긍휼을 베풀고 더 많이 자비해지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것이 없이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고 분노가 있다면 아직 설익은 신앙입니다. 이 섬김이 없으면 40일 금식기도 백번하고, 성경을 천 번 읽었어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멸시와 슬픔, 고난과 심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체제와 정치, 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 철저하게 당하셨지만 끝가지 참고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길을 요구하십니다. 행6:1-6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집사의 자격이 나옵니다.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방언이나 신유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잘 가르치고 신앙생활에 열심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에 온전히 지배당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날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직분까지 주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못남과 실수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내 판단에 망할 것 같아도 그가 가라시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성도의 직분은 철저히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으로 주님을 증거 해내는 삶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실력이나 조건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려면 무엇부터 챙깁니까? 학력, 재력, 권력 엉뚱한 것부터 챙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무서운 세균 같은 발상입니다. 여러분들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그 직분으로 주님의 은혜와 간섭에 더 많이 매달리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으로 여러분들이 얼마나 크고 많은 주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자인가를 드러내야합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의 직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세상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의 덩어리로 똘똘 뭉쳐진 자들입니다. 그것을 증거해 보이기 위한 것이 직분이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교회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고, 사랑의 주님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구제, 봉사, 선교, 무슨 일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해 보이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자기가 받은 모든 은혜와 진리와 구원을 모두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친불친을 따라서 누구는 편들고 누구든 왕따를 시키는 일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성도가 꼭 명심할 것은 교회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지체된 것을 늘 확인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지체이기에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이를 악물고 섬겨야합니다. 긍휼을 베풀 때 더욱 그리해야합니다. 대개의 경우 도움을 받는 분들은 불평이 많습니다. 이것은 제가 교회의 도움을 받아봐서 압니다. 받아먹는 제 마음속에 거지근성 같은 것이 있어서 '기왕이면 더 주지.' '줄 바에는 좀 나은 걸 주지 이 따위냐?' '뭐 줄려면 집까지 갖다 줄 것이지 창피하게 날보고 지고 가래!' 여하튼 내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더란 말입니다. 도움을 받다 보니 그랬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인색해. 더 내놔' 이겁니다. 그럴 때 시비를 걸거나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성내지 말고 '옳습니다. 고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예' 연습해야 합니다. 주고 뺨맞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상대에게 채워줄 필요나 부족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사랑과 섬김으로 드러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상대를 아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 마음이 약한 자,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기 위해서는 직분자는 그들의 연약한 부분들을 찾아서 채우고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환자는 항상 투덜대기 때문에 많은 관용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자기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과정을 통해서 상대에게 주님의 사랑을 체험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맡은 자들이 할 일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택함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부윤 사랑의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대소면 부윤리 93번지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당입니다. 부윤 사랑의 교회는 부윤사랑의 교회에 소속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임이며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부윤 사랑의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부윤 사랑의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수고하는 일터에 부윤사랑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수만큼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일터에서 사람들은 부윤사랑의 교회가 좋은지 나쁜지, 빛인지 어두움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자인지 거지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투덜대고 비웃고 조롱하고 괴롭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죽여 너를 살리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용서와 희생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면서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법은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영향을 미쳐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이 교회 성도 한 사람이 곧 부윤사랑의 교회의 얼굴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심으로 아름답게 쓰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