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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강,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


369, 378, 377.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개역개정) 


제법 가문을 자랑하는 두 '양반'이 어느 날 장터에 있는 정육점에 함께 갔습니다. 그중 한 양반이 먼저 "이봐 쇠돌이, 고기 한 근 주게."하자 정육점 주인이 고기 한 근을 싹둑 베어 봉지에 담아주었습니다. 이어서 다른 한 양반도 "여보게 김 서방, 나도 고기 한 근 주시게나." 청했습니다. 그런데 고기 한 근의 크기가 달랐습니다. "아니, 고기 크기가 다르잖아!" 처음 고기를 산 양반이 따지자 정육점 주인이 "그것은 고기를 베어낸 사람이 달라서 그래요. 처음 고기는 쇠돌이란 자가 베어서 작고, 다음은 김 서방이 베어서 큰가 봅니다." 이웃, 특히 무시해버리고 싶은 이웃에 대한 작은 배려와 관심이 이웃과의 관계를 밝게 해 줄뿐만이 아니라 신앙성숙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확인하면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특히 구약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여겨 반 기독교운동을 벌이고 있는 자들의 무식을 그대로 반증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만인 앞에서 법은 공평하다는 현대에 살면서도 그 법이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 얼마나 무력한가를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겨난 것이 현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약자는 언제나 강자를 위한 희생양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수없이 강조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이 가진 자들을 위해 존재하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 성경에 요즘 가진 분들이나 채권자들이 보면 하나님을 망령든 노인이나 정신 나간 분으로 여겨 입에 게거품을 물고 항의할 내용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집에 가서 신 24:10-22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임금체불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도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또 동족들에게 무엇을 빌려주면 이자는 얼마나 받도록 했을 것 같습니까? 한 푼도 못 받게 했습니다. 겨우 담보물만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담보물은 누가 정했을 것 같습니까?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가 정했습니다. 그나마 그 담보물이 겉옷인 경우엔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줘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겉옷은 낮에는 해를 가리는 천막역할을, 밤에는 추위를 막는 이불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자의 보호에 대해서 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정한 법적지위보장과 더불어 보호와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나그네와 고아를 억울하게 재판하지 말고, 과부의 옷 담보를 금하셨습니다. 이로써 무엇 하나 내세우거나 의지할 것이 없고, 자기 권리마저 주장할 힘도 없는 약자들의 권익을 철저히 옹호하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토대 위에 서있었습니다. 율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비의 규례(신 24:19-22)를 더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자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 보장책으로 추수할 때 일부러 곡식과 과일을 밭에 남겨두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종으로 압제를 받았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 역시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진 자의 횡포를 막고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길입니다. 이 길은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기회로 주어진 성도로서의 삶의 훈련장입니다. 베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로 이웃을 섬길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웃의 고통은 내게 선을 베풀 기회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나의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된 삶이고 감사한 삶이며 성공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얻을 것이 있고 손해 볼 것이 없는 가진 자와 나누고 교제하기를 기뻐하지만 성도는 되받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와 나누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자신의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배고프고 애통하는 자들의 곁에 자신의 눈길을 두고 계십니다. 고아와 병든 자와 슬픈 자들 곁에 우리를 두신 것은 우리가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선한 이웃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할 때마다 ~항상" 빌립보 교인들을 '매일 빠짐없이' 기억했고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 내용이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기도 내용이 무엇을 담아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다'(pa'")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모든, 어떤, 온, 전체의, 만유, 만민, 매(일), 많은(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연약한 빌립보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염두에 두고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의 소망은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성숙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회복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만이 아니라 온 로마와 그 식민지까지 염두에 두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항목 가운데 첫 번째는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너희 사랑을...풍성하게 하사(1:9)' 여기서 사랑은 어떤 특정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나타나야하는 보편적인 사랑으로서 성령의 열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풍성이 질과 양에서 과잉하는 것이라면 제 생각이 맞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일 동안 얼마나 기도하셨고 그 중에 얼마를 이웃과 모든 피조물에까지 확대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폭을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위한 기도를 넘어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관심이 있을 모든 피조물에까지 우리의 관심의 폭을 넓혀가야만 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에는 기도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고통중의 연약한 이웃을 생각하고 베풀고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우리의 관용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 누구에게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모든 간구와 모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할 정도로 모든 피조세계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모든 곳에 나의 사랑도 함께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교제를 해온 것을 깊이 감사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고난에 동참했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궁핍했을 때 구제하기도 했습니다(롬 15:26). 이러한 교제는 바울이 빌립보 지역의 선교를 위한 방문의 첫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사역을 시작했을 때, 루디아는 그의 집을 개방했고(행 16:14,15), 간수는 그를 친절하게 대접했으며(행 16:19-34) 2차전도 여행시 바울이 데살로니가(빌 4:16)와 고린도(고후11:9)에 있을 때,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을 그의 마음속에 새겨 넣었습니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생각하고 목회자는 성도를 가슴에 새겨 넣는 관계!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입니까? 눈이라도 빼주고 싶은 그런 관계! 모든 걸 다 주고도 후회함이 없을 뿐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그런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축복,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우리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눈을 주님의 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눈은 약한 자, 힘없는 자, 병든 세상까지도 돌아보는 눈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돌보아야만 하는 이웃만이 아니라 병든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두를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열 명 중 하나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그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일 년에 만 명이 죽고, 뇌나 척추를 다쳐 평생 장애인이 되는 분이 오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공사장에서 산업 재해자가 일 년에 삼만이나 되고, 질병과 의료사고로 인한 장애자가 일 년에 삼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100명 중 4.7명이 뇌성마비, 소아마비 등 기형아라고 합니다. 게다가 경제는 엉망이 돼서 노숙자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옷 한 벌 아끼고 구두 한 켤레를 아껴서 쓸 곳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갈 곳도 없고 입고 먹을 것 없는 그래서 더 이상 팔아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기는 바로 우리의 사랑에 목마른 곳입니다. 성경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웃사랑, 이것은 배운 것이 없어도 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되고 얼굴이 못났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때가 이르면 거둘 날이 있습니다. 때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이든 간에 하나님이 정한 때가 이르면 거둘 것입니다. 남이 뭐라든 세상이 어떻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시고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어 거두시든 채우시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젊은 시절 사업이 너무 어려워서 그의 일을 다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갈 여비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친구가 선뜻 이십 파운드를 빌려주셨습니다. 멀리 미국으로 가는 사람을 믿고 빌려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빌려주신 돈은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열심히 일을 해서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하여 매일 저축을 했습니다. 그 돈이 다 마련이 됐을 때에 카네기는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평생 고마움을 잊지 말고 삽시다."라 말했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인간의 능력을 다 동원한다 해도 한 사람이 하나님께 입은 은혜조차 되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 가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성령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쏟아 부어주셔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말씀을 거역할 때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성삼위 하나님의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최고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땅을 다스리라. 그것이 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 가슴에 확인한 자들입니다. 그 근거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확신하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눔으로 그들의 시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기회가 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확신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탄은 환난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더 강하게 잡아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참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기쁨을 아는 자가 행복한 자요, 그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복되게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 사랑을 베풀기에 고파하는 사람,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그것을 기뻐하는 삶이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나를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람과 섬김을 통해 한 생명은 물론 모든 피조물까지도 새롭게 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사랑과 섬김과 인내를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킬 수 있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 친구, 부모, 심지어 모든 창조물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우리의 빚쟁이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죄인을 내가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사 그리스도가 돌보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돌보는 것이 성도 최고의 복입니다. 원수만이 온 만유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이웃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다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므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Origen은 '사랑의 빚은 영구히 우리와 함께 남아있고 이 빚은 우리가 날마다 갚아야 하며 영원히 질 것이다' 했습니다. 성도가 이 사랑의 빚을 기억한다면 미움도 욕심도 시기와 질투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을 짊어진 자는 율법을 다 이루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37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내용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입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할 내 이웃을 내가 정하겠는데 그 범위를 어떻게, 얼마나 도와야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도움이 필요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때와 그 필요의 양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그 당사자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며 너는 다만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큼 필요한 자에게 도울 책임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질문을 한 율법사와 그 주변 모든 사람들의 종래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가히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돕는 자로서 '생색을 내려해서도 안되고, 내가 베풀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보람이 있는 일이냐 아니냐?'를 따질 게재가 못됩니다. 다만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만 '그를 도울 가치가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가?' 뿐입니다. 내 선택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랬다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굳이 '복음에서의 교제'를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에 동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멘'으로 답할 수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아직 먼 것입니다. 아멘으로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의 바울이나 빌립보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를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보면 남을 돌아볼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은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만유와 만민에까지 넓혀갔습니다. 그는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그들 자신의 형편도 전혀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어려운 형편을 전해 들었을 때 그들은 바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도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에도 벅찬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을 돌아본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이지 하나님을 기준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움을 주라고 하셨을 때는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는 자선 또는 구제생활을 권면하는 말로서 남을 위해 선을 베풀고 쌓으면 이내 그것을 좋은 결과로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이 그의 기도를 복음에 한정시키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빌1:4하-5)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가 그렇고 (ejpiv)와 (koinwniva)라는 단어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때문이라(ejpiv에피)'는 '안에, 위에, 대항하여, ~가까이에, ~곁에, ~에게서'의 뜻을 '참여하고'(koinwniva)는 '동료의식, 상호교류, 나누어줌'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기도하는 까닭은 그들이 복음 아닌 것에 대항하여 복음과 가까이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초점은 물론 우리의 삶의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싸는 것까지 우리의 시시콜콜한 삶 모두가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되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복음에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삶, 억울하고 화가 나도, 손해가 눈에 보여도 자기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는 삶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창조로 응답하실(행하실)' 기도라면 그 기도는 복음에 합당한 기도일 것이고, 그 기도는 응답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하리라.'는 '창조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바울이 앞에서 그의 감사를 이미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드린 것이라는 저의 생각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 4:4절의 (간구)'함은'과 요 14:14의 '행하리라'를 찾아봤더니 신기하게도 똑 같은 (poievw)였습니다. 그 시각이 새벽 3시가 아니었다면 환호성이라도 질렀을 것입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우리의 기도는 창조성을 가집니다. 내 욕심을 위한 기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정욕을 위한 기도는 응답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혹 난 그딴 기도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 하시던 대로 기도하시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면 성령이 깨우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남 생각이라곤 조금도 않는 이기주의가 점점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적십자 회비 납부률이 서울 강북은 70%인데 반해 부자동네 강남은 40%라고 합니다.(99,3.12 한겨례) 부자일수록 이웃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신혼부부의 이혼율이 30%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서로 기선을 제압해야한다며 악악 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죽여 너를 살리도록 운명지어진 자들입니다. 남을 생각해 주지 않는 사회란 동물의 왕국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자신을 통회해야 합니다. 

지금 이 사회 문제들의 원인 제공은 그 누가 했든 그 치료의 책임은 반드시 우리 성도들이 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릴 책임을 우리 성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여 이 사회를 살릴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 이 어려운 난국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 것을 증명해보일 기회이고 우리의 창조성을 발휘할 위대한 기도의 기회입니다. 그 기도는 반드시 만유와 만민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드러날 때만 창조성을 가집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사랑을 명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고, 이 땅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자의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한다면 만유와 만민에 대한 사랑까지 회복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그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모든 소유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박애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 사랑을 만유와 만인에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감정으로 느끼고, 그리스도의 발로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돕는 것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 해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생각하는 복된 삶이 나와 이웃을 변화시키고 병든 사회를 치유해나가는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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